88화. 하녀와 소드마스터2022.01.02.
로제타는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르문트의 안전을 위해 확인해야 할 것들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구간지기는 한창 자고 있었는지 다소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녀가 아르문트의 정부로 불리는 바로 그 하녀인 것을 알곤 재빨리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하의 말을 보러 오셨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이쪽입니다.”
마구간지기가 영업용 웃음을 지으며 로제타를 안내해주었다. 근육이 튼실하게 붙은 흑마가 있는 쪽이었다.
“건강해 보이는군. 어제나 오늘 이상한 반응을 보인 적은 없나?”
로제타가 말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사냥제 때문에 긴장한 탓인지 기사일 적 쓰던 말투가 튀어나왔다. 마구간지기는 그런 그녀를 남몰래 비웃었다.
‘말에 대해서 뭘 안다고 저렇게 떠든담. 기껏해야 한두 번 타봤을 거면서.’
물론 이러한 생각을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물론입죠. 어떤 분이 타실 말인데 감히 허술하게 관리하겠습니까. 잠도 줄여가면서 확실하게 살피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 손을 꼭 잡고 아부를 떠는 그의 모습에 로제타는 침묵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야 뻔했지만, 문제 삼지는 않았다. 맡은 일만 똑바로 한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그녀의 눈에도 말의 상태는 완벽해 보였다. 갈기에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눈동자도 또렷했다.
“그래. 사냥제 직전까지 계속 주의를 기울여주게.”
“예예, 알겠습니다.”
안심한 로제타는 다시 걸음을 바쁘게 옮겼다. 물론 마구간지기를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고, 사냥제가 시작되기 직전에 다시 한번 말의 상태를 살필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아르문트의 무기를 확인할 차례였다.
“리처드 경, 전하가 오늘 사용하실 무기를 좀 볼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아무리 로제타라도 그건 어렵습니다.”
“전하께서 시키신 일인데요?”
“그렇다 해도 안 됩니다.”
리처드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제타가 아르문트의 연인인 것도 알고, 믿을만한 사람인 것도 알지만 그래도 공과 사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믿는 그였다. 그리고 로제타는 그런 그의 태도에 무척 흡족해했다.
‘내가 후임 하나는 잘 뒀군.’
아무런 의심 없이 건네줬다면 기사단장에게 일러서라도 혼쭐을 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역시 리처드는 러크 같은 멍청이와는 달랐다.
“그럼 경이 보는 앞에서만 잠시 살펴볼게요. 제가 너무 불안해서 그래요…….”
로제타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리처드가 이런 것에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리처드는 곤란하다는 듯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보는 앞에서, 잠시만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전하께도 로제타가 이런 요청을 했다는 건 알릴 겁니다.”
“네, 그러세요.”
로제타가 즉답하자 그의 눈에 작게나마 깃들었던 의심이 사그라들었다. 리처드는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무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하나같이 관리가 잘 된 모습이었다. 로제타는 검과 활을 모두 유심히 살펴보며 어디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모두 아무런 이상 없이 깔끔했다.
“네. 잘 봤어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 생긋 웃었다. 그러자 리처드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신이시여. 부디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십시오.’
겨우 잊어가는데 저런 미소를 짓다니. 그가 마음속으로 슬퍼했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로제타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를 응시했다. 마음에 드는 부하를 바라보는 눈길이었으나 리처드로서는 무슨 의미인지 알 길이 없었다.
“경은 오늘 어디 안 좋으신 곳은 없으시고요?”
“예, 저는 괜찮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쳐다보지만 않는다면요. 리처드가 말을 삼켰다.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아르문트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로제. 거기서 뭘 하고 있나.”
아르문트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리처드를 노려보았다. 내 약혼자에게 시선 두지 말라 했을 텐데. 황금색 눈이 이렇게 말해오는 듯했다. 리처드가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로제타 양이 무기를 점검하고 싶다 해서 보여주는 중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르문트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얼마나 걱정이 됐으면, 검이나 활에 관해 문외한일 것이 분명한 로제타가 저런 행동을 했겠는가. 그런 그녀의 마음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물론 이 셋 중에서 가장 무기 보는 눈이 좋은 건 로제타였으나 마찬가지로 그로선 알 길이 없었다.
“그만하고 이만 들어와, 로제타. 그대도 준비하려면 바쁠 것 아닌가.”
“아, 로제타도 사냥제를 구경하러 가십니까? 올해는 전하께서 더 열심히 사냥하셔야겠군요.”
파트너께 명예로운 입맞춤을 해드리려면요. 리처드가 씁쓸한 얼굴로 덧붙였다.
“에이, 저는 그런 거 기대 안 해요. 그러니 무리 마세요.”
로제타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르문트의 말대로 그녀는 그의 파트너로서 행사에 참가하기로 했다. 행사에 참가한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게, 여자들이 할 일이란 별관에 얌전히 앉아 주전부리를 먹으며 파트너를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로제타는 다른 여자 파트너들이 그러하듯 가만히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굳이 아르문트에게 파트너로서 참석하고 싶다고 떼를 쓴 건 편한 잠입을 위해서였다. 그래야 사냥제가 열리는 장소로 자신을 데리고 가줄 테니까.
“전 이만 식사를 가지러 다녀올게요!”
“그대가 직접?”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로제타는 아르문트가 말릴 시간도 주지 않고 서둘러 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주방으로 향하는 이유는 아르문트가 먹을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모두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멜라니가 그녀 대신 봐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고, 발레리안이 준 마법 물품을 사용하면 1 황자가 사들인 독을 검출해낼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직접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독이 또 있을지도 모르니까.’
날이 날인만큼 모든 걸 확실히 하고 싶었다. 결국, 로제타는 주방에 서서 조리과정을 모두 확인한 후에야 다시 아르문트의 방으로 돌아갔다.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들은 로제타가 원래 저렇게 깐깐한 애였냐며 혀를 내둘렀다. 일부는 사랑이 대단하긴 하다며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식사가 끝난 후에도 그녀의 점검은 계속되었다.
“전하, 오늘 옷은 제가 입혀드릴게요.”
결연한 얼굴로 말해오는 로제타의 모습에 아르문트는 당황한 듯 몸을 흠칫 떨었다.
“전하 말고 아르문트.”
그러나 이 와중에도 호칭을 정정해주는 건 잊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옷을 벗기기 위해 다가왔다. 하얀 손가락이 그의 단추를 빠르게 끌어 내렸다. 손가락 끝이 피부를 스치자 아르문트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오늘따라 적극적인데.”
그가 유혹적으로 속삭였으나 로제타는 셔츠를 벗기고 새로 준비한 옷을 살피는데 바빠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문트가 가장 처음 죽었던 계기가 바로 옷 사이에 꽂혀 있던 독침 때문이었다. 이번이라고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녀는 이미 몇 번을 살펴본 옷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 뒤에야 그에게 건네주었다.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유혹을 해왔다.
“가기 전에 한 번만 더 할까?”
“어우! 그만 좀 해요. 그러다 죽겠어요.”
“날 과소평가하는군. 아직 한참은 더 할 수 있다만.”
로제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셔츠 구멍에 그의 팔을 끼워 넣었다.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의 반응이 귀여운지 연신 웃음만 흘려댔다.
“사랑해, 로제타.”
그가 시원하게 트인 눈매를 접으며 속삭였다. 로제타는 느닷없는 사랑 고백에 멈칫했다. 제법 자주 들은 말이기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상하게 사랑한다는 표현만큼은 들을 때마다 민망했다. 로제타가 두 뺨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이번에도 차마 사랑을 입에 담지는 못했다. 아르문트는 그것에 섭섭해하면서도 당황한 그녀를 배려해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내게 뭐 줄 거 없나?”
“네?”
로제타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거 서운한데. 파트너를 이리 홀대해도 되는 건가?”
그녀는 그제야 그가 무얼 말하는지 깨달았다. 여자는 사냥제가 시작되기 전 제 파트너에게 무사와 승리를 기원하는 선물을 주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리고 정작 로제타는 아르문트를 지키는 데 정신을 온통 빼앗긴 탓에 이를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그깟 선물을 준다고 아르문트가 무사할 리가 없잖아! 진짜 무사하길 바라면 옆에서 지켜야지.’
로제타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아르문트의 입장에서는 서운할 만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얼른 고개 숙여 사과의 말을 뱉었다.
“죄송해요, 전하. 제가 신경을 못 썼어요.”
“괜찮아. 이런 행사는 처음이니 모를 수 있지. 장난이었으니 그리 마음 두지 마.”
아르문트가 옅은 미소를 걸친 채 그녀를 위로했다. 늘 로제타에게만은 무한한 관용을 베푸는 그였다. 로제타는 양심이 찔려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사냥제가 처음이 아니었고, 그런 전통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파트너로서 구경을 오겠다는 마음은 여전한가? 불편한 자리일 수 있을 텐데.”
아르문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군가 그녀의 신분과 하녀라는 위치를 놓고 빈정댈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힘들면 중간에 먼저 돌아올게요.”
“그래. 감히 그댈 힘들게 한 놈의 이름은 꼭 기억해놓고.”
내 반드시 그놈 인생을 힘들게 만들어줄 테니. 그가 웃으며 살벌한 말을 덧붙였다. 로제타는 그를 따라 웃으며 옷매무새를 단정히 가다듬었다.
“사냥제가 끝나고 며칠 뒤에, 파티가 열리는 것 알고 있나?”
“네. 저번 연회보다는 작은 규모라고 알고 있어요.”
“맞아. 황태자로서 참석은 해야 하지만, 보여주기식 행사이니 그리 오래 머물진 않을 거야. 어쨌든 그때도 파트너로서 함께해주겠나?”
“물론이죠, 전하. 절 두고 다른 여자랑 가시려고 했어요?”
“그럴 리가.”
다 됐어요. 그녀가 아르문트의 가슴을 가볍게 톡톡 치고는 손을 떼어냈다. 사냥제 복장은 그가 평소 입던 옷보다 다소 달라붙는 편이었는데, 그 덕에 튼실한 몸이 더 잘 드러났다.
‘너무 야한 것 아니야?’
로제타가 그의 차림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노출이 있는 게 아닌데도 어쩐지 매혹적으로 보였다.
“……오늘 저녁에는 불꽃놀이를 할 거야. 규모가 크진 않지만, 시장에서 봤던 것보단 화려하겠지.”
아르문트는 로제타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방에서 함께 보자. 저번처럼.”
가만히 눈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이 너무 멋져서,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네, 그래요.”
“곁들일 와인은 내가 준비하지. 주당인 그대를 위해 넉넉히.”
“주당 아니라니까요!”
로제타가 씩씩거리자 아르문트는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사냥제를 무사히 끝내고, 아르문트와 와인을 마시며 불꽃놀이를 보는 거야.’
생각만 해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도 준비를 해야 했다. 방으로 돌아온 로제타는 파트너로서 사냥제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것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가 아닌, 펑퍼짐하고 장식이 없어 입고 벗기가 편한 원피스였다. 머리도 예쁘게 치장하지 않고 하나로 단정히 묶어 올렸다. 그리고 평범한 치마 아래에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비밀이 있었으니. 바로 그녀가 원피스 안에 신축성이 좋은 바지와 딱 달라붙는 검은 상의를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은 황태자의 전속 하녀이자 연인인 로제타가 아닌, 소드마스터 로제타 메이필드가 활약해야 하는 날이니까.
‘내가 나설 일이 없다면 좋겠지만.’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검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아르문트가 하사한 검을 바꾸어둔 것이었다. 로제타는 아무 일도 없이 사냥제가 무사히 지나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굳이 실력을 드러낼 필요 없이, 그의 뒤만 지루하게 따라다니다 끝나기를. 며칠 전부터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불안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기를, 바라고도 바랐다. 그러나 몇 시간 뒤, 그녀의 노력은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기어코 사냥제에 피바람이 불고 만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