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사냥제의 시작2022.01.06.
“못 보던 옷이군.”
아르문트는 준비를 마치고 나온 로제타를 보며 말했다. 그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녀가 이렇게 단출한 차림으로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눈에는 편안한 옷을 입고 있는 로제타도 예쁘게만 보였다. 화려한 장식이 없는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우아하고 단아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그녀가 귀족들이 가득한 자리에 간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가 함께 있어 줄 수 없는, 그런 불편한 자리에. 귀족들에게 치장은 곧 제 부와 권력을 드러내는 수단과도 같았다. 안 그래도 남 말하기 좋아하는 그들이 주제도 모르고 로제타의 차림새에 대해 떠들어댈 것이 벌써 눈에 보였다. 아르문트는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에게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려 했다. 그러나 혹 그녀의 마음이 상할까 염려된 탓에 말문을 떼기가 어려웠다. 흔들리는 시선에서 이러한 생각을 읽어낸 로제타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오늘은 왠지 이런 옷을 입고 싶어서요. 아르문트, 혹시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그럴 리가. 아름답기만 한데.”
아르문트가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후회했다. 이렇게 말한 이상 차마 그녀에게 환복할 것을 요구할 순 없다.
“그럼 다행이네요. 저는 아르문트한테만 예뻐 보이면 되거든요.”
우습게도 아르문트는 그녀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움이 많은 로제타는 은근히 애정 표현을 안 하는 편이었고, 그러한 까닭에 가끔 이렇게 애교를 부릴 때면 아르문트는 너무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렇게 된 이상 로제타에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제안하는 대신, 감히 헛소리를 지껄이는 놈을 잡아 죽인다. 아르문트가 결연한 눈으로 다짐했다.
*** 사냥제가 개최되는 곳은 타마린도 숲으로, 황성에서 삼십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제법 규모가 큰 데다 나무도 울창하게 늘어서 있어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이 이곳에 서식했다. 연보랏빛 꽃이 숲 전체에 무성하게 피어난 모습이 아주 아름다우나, 종종 위험한 동물이나 마수가 출몰하는 경우가 있어 황실에서는 병사를 보내 민가를 보호하곤 했다. 주기적으로 사냥제를 개최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다만 사냥제가 열기 전에 너무 위험한 맹수나 마수가 없는지 점검을 하기에 혹 마수를 마주치면 어떡하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늘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아르문트야 사정이 달랐지만 말이다.
“황태자 전하! 오셨습니까!”
아르문트가 마차에서 내리자 먼저 도착해 있던 귀족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아르문트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곤 다시 뒤를 돌아 손을 내밀었다. 로제타가 내리기 쉽도록 돕는 것이었다.
“어머, 세상에.”
로제타가 마차에서 내리자 누군가 탄성을 흘렸다. 아르문트의 예상대로, 그녀의 옷차림을 비웃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이상의 빈정거림은 없었다. 아르문트가 살벌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본 까닭이었다. 크흠, 흠. 방금 탄성을 뱉었던 귀족들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르문트는 그들에게 경고하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로제. 아까도 말했지만, 누가 감히 그대를 욕보이거든 내게 바로 말하도록 해.”
“네, 전하. 너무 걱정 마세요. 설마 그러려고요.”
그의 의도를 파악한 로제타가 해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르문트는 마지막까지 서늘한 눈빛으로 주위를 쏘아본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로제타는 혼자가 되었다. 다들 눈치만 볼 뿐 그녀에게 말을 걸지도, 아는 척을 하지도 않았다. 비웃고 빈정거리는 대신 아예 무시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눈짓 몇 번으로 이렇게 새로운 전략을 펼치다니. 로제타가 감탄했다. 아무래도 귀족들은 그녀가 자존심이 상해 날뛰거나 울먹이기를 원한 모양이지만, 로제타에게는 조금의 충격도 주지 못했다. 애초에 기대한 것이 없을뿐더러, 다른 귀족들과 친목을 쌓자고 나온 자리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눈치 보면서 있다가 중간에 몸이 안 좋은 척하면서 빠져나가야지.’
이미 발레리안과 그러기로 입을 맞춰두었다. 로제타가 이곳 황실 소유의 별관을 벗어나 숲 쪽으로 다가가면, 발레리안은 결계에 조그마한 틈을 만들어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때까지 그녀는 얌전히 앉아 쉬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로제타가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누군가 로제타를 소외시키자는 암묵적인 룰을 깨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로제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눈앞의 여인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루니엘라 영애.”
페이즐리가 반짝거리는 은발을 곱게 묶어 올린 채 생긋 미소 짓고 있었다.
“어머, 저번에 이름을 불러주시기로 하지 않았나요?”
“아, 죄송합니다. ……페이즐리.”
“죄송하긴요. 옆에 앉아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로제타는 그 누구를 상대할 때보다 딱딱하게 굳었다. 마지막으로 페이즐리를 만났을 때, 로제타는 그녀에게 아르문트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며 단호하게 부인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렇고 그런 사이가 돼버리고 말았으니,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모를 따름이었다. 페이즐리는 그런 그녀의 사정을 알만 하다는 듯 쿡쿡 웃음을 흘렸다.
“축하드려요, 로제타. 전하와 잘 되었다고 들었어요.”
“그, 네, 그게…….”
“저번에도 말했지만, 전 황태자 전하가 아니라 로제타에게 관심이 있으니,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요.”
페이즐리는 다른 귀족들이 들을 수 없도록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게다가, 설령 제가 전하를 마음에 두었었다 해도, 로제타가 민망해할 게 어딨나요? 먼저 쟁취한 사람이 가지는 게 당연한데.”
로제타가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생의 페이즐리는 자신이 알던 그녀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르문트의 약혼녀이자, 아내였던 그녀는 라그나르의 황태자비답게 항상 차분하고 우아해 보이기만 했는데. 지금의 페이즐리는 어려서 그런지, 확실히 더 통통 튀고 생기 넘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아르문트에게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하긴, 이전에도 그저 쇼윈도 부부에 불과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고맙긴요. 참, 로제타. 사냥제는 이번이 처음이죠? 규칙이 어떻게 되냐면…….”
페이즐리는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사냥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듣자 하니 그녀는 사냥제에 무척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승리자의 파트너가 되고 싶어 하기보다는, 사냥제에 직접 참석하고 싶은 눈치였다. 이 또한 의외의 면모였기에 로제타는 다 아는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설명을 흥미롭게 경청했다. 한편, 로제타를 배척하던 귀족들은 천하의 루니엘라 공녀가 그녀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교계의 퀸인 그녀가 로제타를 감싸니 상황이 영 애매해진 것이었다.
“저, 루니엘라 영애. 저기 크라우드 영애가 할 말이 있다는데, 잠시 와주시겠어요?”
“보다시피 제가 지금 대화 중이라서요. 정 급하다면 할 말이 있는 분이 직접 오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한 영애는 어색하게 끼어들어 페이즐리를 빼 오려고 했으나, 페이즐리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분위기가 싸늘해지려는 찰나,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사냥제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었다.
“와! 저기 출발하네요!”
한 여인이 손가락으로 숲 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녀의 말대로 숲의 한쪽에서 말들이 온갖 방향으로 우르르 달려가기 시작했다.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눈으로 아르문트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는 하인인 말콤과 리처드의 사이에서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이야, 전하는 말도 잘 타시네요.”
누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감탄했다. 시선을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하얀 머리에 푸른 눈. 순수하면서도 예쁜 외모가 특징인 테오도르 신관이었다.
“테오도르 신관님.”
“좋은 아침이에요, 로제타 양.”
테오도르 신관이 해사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혹시 사고가 날 경우를 대비해 온 모양이었다. 그가 로제타의 옆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곧 페이즐리와 그의 시선이 마주했다.
“이분은…….”
“아, 페이즐리. 이쪽은 전하의 전속 신관인 테오도르 신관님이세요.”
“안녕하세요. 테오도르입니다.”
테오도르 신관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쭈뼛쭈뼛 인사했다. 페이즐리가 워낙 미인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사교성이 썩 좋지 않은 편인지, 굉장히 쑥스러워 보였다.
“반가워요, 페이즐리예요.”
반면 페이즐리는 굉장히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테오도르 신관에게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했고,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마주 잡았다. 둘 사이에 선 로제타는 뜬금없는 상황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곧 페이즐리가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귀여워라. 로제타, 이분 애인 있대요?”
“아마…… 없을걸요……?”
“잘됐네요.”
로제타의 푸른 눈동자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루니엘라 영애와 테오도르 신관이라니. 전혀 상상치도 못한 조합이었다.
사냥제가 시작된 지 약 십 분 후. 페이즐리와 테오도르 신관이 대화를 나누는 걸 구경하던 로제타는 슬슬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일어났다. 오늘따라 피곤해서 먼저 가보겠다는 말에 페이즐리는 무척 아쉬워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렇게 슬며시 별장을 벗어난 그녀는 마차를 지키던 하인의 눈을 피해 숲 쪽으로 향했다. 워낙 나무가 많아 몸을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워낙 많은 기사와 마법사들이 참여한 행사이다 보니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됐다. 조심조심 결계로 다가가니 약속했던 장소에 미세한 틈새가 보였다. 발레리안이 미리 만들어둔 것이었다. 로제타는 유연하게 움직여 틈새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좋아, 이제 전하만 찾으면 돼!’
그녀는 저 멀리 황제와 함께 있을 발레리안을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발레리안은 대회의 공평성 상 아르문트와 동행할 순 없지만, 멀리서나마 그의 무사를 살피고 있을 것이었다. 아르문트가 정확히 어느 쪽으로 향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이렇게 넓은 곳에서 그를 찾기란 쉽지 않을 테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리 걱정할 게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숱한 회귀를 통해 아르문트가 이 숲에서 즐겨 찾는 곳이 어딘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쯤이라면…… 저쪽으로 가면 되겠네.’
어느새 나무에 오른 로제타가 주위를 살펴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늦지 않게 아르문트를 따라잡기 위해 재빨리 다리를 움직였다. 얼마나 뛰었을까. 슬슬 숨이 차기 시작했을 때 즈음, 어디선가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가 멀어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말 울음소리였다. 로제타가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응시했다. 정확하게 그녀가 가고 있던 방향이었다. 순간 불안한 직감이 밀려들었다.
‘전하……!’
그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로제타는 스스로가 달리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나무 사이를 뛰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점점 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전하! 꽉 잡으십시오! 전하!!”
리처드의 목소리였다. 불안이 현실이 되는 순간, 로제타는 목격하고 말았다. 커다란 마수와 다급히 대치하고 있는 리처드와, 벌벌 떨고만 있는 말콤. 그리고 미친 듯이 날뛰는 말 위에 앉아 겨우 중심을 잡고 있는 아르문트의 모습을. 히히힝-!! 척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은 흑마가 앞발을 높게 들어 올리더니, 이내 마수의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아르문트는 간신히 고삐를 붙잡은 채 떨어질 듯 말듯 매달린 상태였다. 이를 발견한 로제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마지막까지 확인했는데, 어째서? 마수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으나,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아르문트.’
나의 주군이자 연인. 그를 살려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