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감히 내 것을 넘봤으니2022.01.09.
“전하!!”
리처드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마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마수의 피부가 워낙 두꺼운 탓에 제대로 된 상처는 입히지 못했다. 당장 아르문트를 쫓아가야 하는데. 리처드가 이를 갈았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정도 급의 마수에게 등을 보였다간 오히려 자신이 위험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콰앙! 마수의 발이 리처드의 뒤에 있던 바위를 단번에 산산조각냈다. 일반적인 성인 남성의 세 배 정도 크기의 마수는 공격 하나하나가 파괴력이 엄청난 데다, 공격하는 속도도 제법 빨랐다. 뛰어난 기사인 그가 상대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따돌릴 수 있을 정도도 아니었다. 즉, 아르문트를 구하러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수를 먼저 죽여야만 했다.
“제기랄……!”
리처드는 마수의 공격을 피해 검을 찔러넣으며 거친 욕설을 뱉었다. 제발 내가 갈 때까지 무사하기를. 그가 간절히 바랐다.
“히이익! 사, 살려, 살려주세요! 리처드 님!”
황태자궁에서 제법 오래 일한 하인인 말콤이 온몸을 벌벌 떨었다. 안타깝지만 리처드는 지금 그의 안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설사 말콤이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리처드에겐 최대한 빨리 마수를 잡는 게 더 중요했다.
“커억!”
결국, 말콤은 전투 중 날아온 바위에 어깨를 얻어맞고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는 뼈가 부러지는 고통에 컥컥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잖아.”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처드는 한창 마수의 목을 베기 위해 집중하던 탓에 말콤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했으나, 그다음 것은 들을 수 있었다.
“약속이랑, 커헉, 다르잖아……!”
이런 말은 없었잖아. 없었는데 왜. 말콤이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계속해서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리처드의 시선이 그제야 마수가 아닌 말콤을 향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커다란 흉터가 난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 사고가 일어난 장소는 숲의 초입에서 제법 거리가 먼 곳이어서, 별채에 있는 귀족들이나 따로 자리를 마련한 황제와 황후는 현재의 사태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알아챈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대마법사 발레리안이었다. 발레리안은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자리가 황제와 황후의 것과 제법 가까웠던 탓에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단숨에 손을 들어 올리고 마나를 끌어모았다. 위험에 빠진 아르문트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마법이 완성되기 직전, 누군가 그를 방해했다.
“어머, 윈저프리드 경. 경이 끼어드는 건 반칙이에요.”
황후의 부채가 발레리안의 어깨를 가볍게 톡 건드렸다. 순간 마나가 흐트러지며 마법 또한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렸다. 발레리안의 단정한 눈썹이 일순 사납게 휘었다. 푸른 눈동자 위에도 흉흉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는 금세 평정을 되찾곤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위험에 처하신 것 같습니다.”
“네? 그럴 리가. 결계가 이렇게 튼튼한걸요. 황실 마법사들이 공들여 친 결계예요. 그렇게 허술하진 않답니다.”
황후는 과한 걱정이라고 덧붙이며 우아한 몸짓으로 부채를 팔랑거렸다. 아르문트를 돕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뱀 같은 여자. 발레리안이 이렇게 생각하며 황후를 마주 보았다.
“물론 마법사들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황태자 전하는 장차 라그나르의 황제가 되실 분이니, 얼마나 걱정을 한들 과하지 않지요.”
“황제가 되실 분이라면 경의 도움 없이도 이런 사냥제쯤은 훌륭히 마치실 겁니다. 공정성도 해치지 않고요.”
“글쎄요. 고귀한 자리인 만큼 벌레도 자주 꼬이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벌레들은 없애주는 것이 오히려 더 공정하다 봅니다만. 황후 폐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번에는 황후의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여우 같은 놈. 그녀의 눈이 이렇게 말해오는 듯했다. 황후와 1 황자를 벌레에 비유한 발레리안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뻔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아르문트가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재차 마법을 쓰려는 순간. 또다시 예상 못 한 변수가 발생했다.
“쿨럭! 쿨럭쿨럭……!”
느닷없이 황제가 격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주름진 손바닥 위로 검붉은 피가 몇 방울 비쳤다.
“폐, 폐하! 이게 무슨……! 여봐라! 당장 폐하를 치유해라!”
“세상에, 폐하!”
황후는 경악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근처에서 대기하던 신관들이 황급하게 뛰어와 황제의 상태를 살폈다.
“윈저프리드 경!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얼른 폐하를 보호하세요!”
그녀는 가만히 서 있던 발레리안에게 앙칼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하. 발레리안이 남몰래 헛웃음을 뱉었다. 이 순간에 갑자기 황제가 아프다니. 아무리 황태자가 중요하다 해도, 황제와 비교할 수는 없다. 제국의 지존인 그의 안전보다 황태자의 안전을 우선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즉, 당장 아르문트와 로제타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발레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황후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황제의 안위를 살피고 있었다. 다만 늘 연기를 일삼는 발레리안에게는 그런 행동이 마냥 순수하게만 읽히지 않았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당신 계획이었을까.’
그는 황제를 향해 느릿하게 다가서며 고민했다. 치유 마법에 소질이 없는 그로서는 사실 지금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경계하고 있는 것 정도가 다다.
‘인정하지. 이 여잔 1 황자처럼 무식하지 않아.’
찰나 같은 순간, 황후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것도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이는 눈빛과. 동시에 발레리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렇다고 날 우습게 보면 곤란한데.”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살거리며 천천히 손가락을 튕겼다. *** 로제타는 흑마의 뒤를 따라 뛰고 또 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차기 소드마스터인 그녀라고 한들 말이 달리는 속도를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그냥 말도 아니고, 황태자를 위해 바쳐진 명마 중의 명마이니,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 게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로제타는 포기하지 않고 달렸다. 말이 지나간 길마다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고, 수풀이 눌려 있어 뒤를 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말의 상태가 척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그러나 문제는 행여 아르문트가 날뛰는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다면 중상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낙마 사고는 늘 끔찍한 결과를 자아내곤 했다. 대부분 목이나 허리가 부러져 죽었고,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해도 반신불수가 되기 일쑤였다.
‘제발, 제발 무사하기를.’
그녀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빌고 빌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이전 회차까지의 그녀는 제 유일한 과오를 지우기 위해 아르문트를 지키려 했다면, 지금의 로제타에게는 더 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와 나눈 소중한 시간, 크고 작은 추억 하나하나. 그리고 서로를 향하는 애틋한 마음. 아르문트의 목숨에는 이 모든 것이 걸려 있었다. 만약, 이번에 그가 죽는다면, 그래서 또다시 이 지겨운 굴레가 시작된다면. 다음 회차의 아르문트는 언제 그녀를 사랑했었냐는 듯 다시 차갑게 변할 테다. 함께한 추억도, 사랑도 그녀만의 것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도 두려웠기에 자꾸만 눈물이 펑펑 흘러 눈 앞을 가렸다. 로제타는 빠르게 고개를 저어 눈물을 털었다. 시야 확보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운명처럼, 희미한 시야 속에 찾던 이의 모습이 담겼다. 우거진 수풀 사이에 아르문트가 누워 있었다. 붉은 피로 이마를 온통 물들인 채로.
“아르문트!!”
비명 같은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안 돼, 안 돼……! 로제타는 절박하게 소리치며 기절한 아르문트에게로 다급히 달려갔다. 게거품을 물고 쓰러져있는 흑마를 뛰어넘어 다가가자 마침내 아르문트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그녀는 빠르게 아르문트가 숨을 쉬고 있는지 살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사이로 미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살아 있다. 이를 깨닫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피를 흘리고 있는 그를 앞에 두고 울고 있을 시간은 없다. 로제타는 서둘러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이마가 살짝 찢어졌을 뿐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말에서 떨어졌는데 생채기 몇 개가 고작이라니.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아니, 기적이 아니야.’
그의 머리카락을 넘기며 상처를 보던 로제타가 일순 손가락을 움츠렸다. 아르문트에게서 희미한 마나가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느낌의.
‘발레리안……!’
발레리안의 마나였다. 이는 즉 그가 아르문트를 마법으로 보호했음을 의미했다. 보호 마법 덕에 기절할지언정 큰 부상은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로제타가 그의 얼굴을 하염없이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깊은 안도감이 밀려들며 억지로 참아 눌렀던 감정이 다시금 북받쳐 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아르문트의 허리 아래로 팔을 끼워 넣었다. 얼른 그를 테오도르 신관에게 데려다줄 작정이었다. 보호 마법 덕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행여나 뇌진탕이라도 왔을지 모르는 일이다. 여러모로 치유가 급했다. 그러나 아르문트의 상체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뒤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발레리안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기척.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예측했던 장면이 시야에 담겼다. 검은 복장의 자객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누가 보내서 왔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딱히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에 로제타는 아르문트를 조심히 안아 들었다.
“그래, 그런 건 안 중요하지.”
어차피 말하라고 해도 불 리가 없고. 로제타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객들은 빠르게 눈짓을 주고받더니, 이내 놀라운 속도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목적은 황태자를 암살하는 것. 범행을 목격한 자는 함께 죽여주는 것이 당연하다. 날카로운 단검이 로제타와 아르문트를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검 끝은 그들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고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다.
“뭐……!”
자객 한 명이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다른 자객들은 황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방금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남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도 숙련된 암살자인 자신들의 앞에서!
“마법인가……!”
자객이 이를 빠득 갈며 중얼거렸다. 듣자 하니 대마법사 발레리안 윈저프리드가 황태자의 편에 섰다 했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다. 말에서 떨어지고도 별 상처 없이 살아남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기에는 아무런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순간이동은 고위 마법이라 이렇게 마나를 남기지 않는 것이 불가능할 텐데. 당황한 자객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주위만 둘러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들의 뒤로 누군가 나타났다. 딱 붙는 검은 옷차림에, 붉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 방금까지만 해도 그들의 앞에 서 있던 그녀. 로제타였다. 아르문트를 안전한 곳에 숨기고 돌아온 로제타는 검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긋 웃었다. 자객들은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재빨리 그녀를 공격해왔다. 쓸데없이 지체하지 않는 것이 과연 잘 훈련받은 자객다웠다. 로제타는 몸을 틀어 검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그러곤 제 기운을 반지에 불어넣었다. 파앗! 그녀에게서 환한 빛이 터져나왔다. 이를 마법의 전조증상으로 착각한 자객들은 다급히 뒤로 물러나 방어 자세를 취했다. 곧 빛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자객들이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긴 생머리가 바람결에 살랑였고, 푸른 눈동자는 선명하게 빛나며 그들을 향했다. 하얀 손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검이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자, 이제 다시 해볼까.”
하녀가 아닌, 소드마스터의 모습으로 돌아온 로제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히 내 것을 넘봤으니, 대가를 치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