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들켰다2022.01.13.
자객들은 고작 몇 합 만에 눈앞의 여인이 손에 꼽을만한 강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검을 한 번이라도 휘둘러 봤을까 싶을 정도로 가녀린 몸. 그 몸에서 나오는 힘이 그들의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는 다수를 상대하는 상황임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무표정한 얼굴 위로는 여유가 묻어났다.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고, 검을 휘두르는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며, 갑작스레 방향을 전환해 공격해오는 속도는 이제껏 그들이 경험한 적 없는 수준이었다.
“조심해라! 깨달음을 얻은 자다!”
대장 격의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이를 들은 자객들은 경악하여 크게 뒤로 물러났다. 저렇게 어린 나이의 여자가 그런 경지에 올랐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저 무시무시한 실력은 깨달음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불가능했다. 자객들은 바짝 긴장한 채 전투에 임했다. 그들 중 비슷한 수준에 오른 자는 대장 한 명뿐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금세 목숨이 달아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무리 긴장을 한다 한들 실력의 격차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결과가 드러났다.
“커헉……!”
“끄아악!”
로제타는 무심한 얼굴로 자객의 심장을 찌르고, 또 목을 베었다. 사람을 죽이는 손길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으며, 옷에 피가 튀는데도 표정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이는 즉 그녀가 이러한 전투에, 살인에 익숙하다는 뜻이었다. 로제타의 경우 암살자들을 처리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닌 데다가, 전쟁 경험도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객들에겐 이것이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저런 실력과 경험이라니. 흡사 괴물을 마주한 것만 같았다.
‘젠장, 갑자기 어디서 저런 게……!’
분명 황태자의 주위 인물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왔거늘, 이런 인물에 대한 얘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비슷한 생김새의 여인은 들어본 적이 있다. 황태자의 하녀 출신 애인, 메이필드 남작가의 영애가 정확히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졌다고 했다.
‘설마 호위기사를 고용해놓고 애인으로 위장한 건가?’
자객들의 대장은 처참하게 죽은 부하들의 시신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지금 알아챘다고 한들 바뀔 것은 없다. 고작 몇 분. 몇 분 만에 모두가 죽었다. 암살 대상이 대상인만큼, 정예만을 데려왔는데도. 그리고 아마 자신 또한 몇 분 뒤에 같은 신세가 되리라.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으나,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그녀이기에 더 잘 알 수 있었다. 저 여자에게서 살아 돌아갈 방법은 없다. 얼굴을 당당히 드러낸 채로 실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곧 애초에 목격자를 살려둘 마음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최대한 발버둥 쳐보는 수밖에.’
동료들의 시체 속에 홀로 남은 여인의 눈동자가 사납게 일렁였다.
“으아아!”
그녀는 함성을 지르며 로제타를 향해 달려들었다.
‘소리를 지르며 공격한다니. 암살자 맞아?’
로제타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이상행동을 의아하게 여겼다. 자객 중 가장 실력이 좋은 여자였다. 로제타가 회귀 전의 경험이 없었다면, 처리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로제타는 가장 높은 경지에 올라본 경험이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저 정도의 자객쯤이야 별것도 아니었다. 당장 멱을 따주지. 로제타는 이렇게 생각하며 검을 고쳐잡았다. 단검 하나가 그녀를 향해 쇄도했다. 로제타는 이를 느긋하게 쳐냈다. 그러나 여태껏 쭉 여유롭던 그녀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자객이 느닷없이 다른 방향으로 도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르문트를 숨겨두고 온 쪽이었다.
‘이 자식이……!’
로제타는 다급히 뛰어올라 자객의 뒤를 쫓았다. 어떻게 그의 위치를 안 보고도 알았는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이제는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다행히 그녀의 속도가 훨씬 빠른 덕에 금세 자객을 따라잡았다. 이상하게도 자객은 자신이 곧 공격당하리란 걸 알면서도 방어 자세를 전혀 갖추지 않았다. 모든 면이 다 무방비했다. 꼭, 제 목숨을 이미 포기한 사람처럼. 로제타는 이것이 무얼 뜻하는지 잘 알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임무만은 완수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런……!’
로제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미친 듯이 뛰어 자객을 지나쳐갔다. 아니나 다를까 자객은 수풀을 향해 단도를 던졌다. 정확히 아르문트가 있는 쪽이었다. 로제타는 주저하지 않고 그 앞을 막아섰다.
“크읏!”
날카로운 검날이 등을 갈랐다. 그녀는 생살이 썰리는 고통에 신음을 흘리면서도 빠르게 뒤를 돌아 자객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컥……!”
로제타의 검이 자객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었다. 붉은 피가 검신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자객은 피를 울컥 토해내더니, 이내 천천히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곧 숨이 끊어졌다.
“하아…….”
그녀가 죽은 걸 확인한 로제타는 크게 한숨을 뱉었다. 불이 붙은 것 같은 홧홧한 고통이 등에서 느껴졌다. 피가 줄줄 흘러내리며 그녀의 옷을 적셨다.
‘오랜만에 다쳐보네.’
로제타는 눈썹을 찌푸리며 상처를 가늠해보았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제법 깊게 베인 듯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비명을 꽥꽥 질러댈 고통에도 그녀는 차분했다. 워낙 고통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베인 상처치고 유난히 아픈 걸 보아, 아무래도 검날에 독이 발려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러면 낫는 데 오래 걸리는데…….’
쯧. 그녀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다양한 독에 면역이 있으니 죽지야 않겠지만, 한동안 통증으로 고생 좀 하게 될 것 같았다. 신관에게 상처를 보이기도 애매했다. 일개 하녀가 이런 부상을 입을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괜한 의심을 사면 곤란하다. 황궁 밖으로 나가 그녀를 모르는 신관에게 치유를 부탁할 수야 있겠지만, 대부분 실력이 허접해 빠른 회복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로제타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곤 아르문트를 향해 다가갔다. 등의 고통은 최대한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르문트는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처럼 수풀 사이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다행히 이마의 피는 멎은 것 같았고, 다른 이상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때, 로제타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르문트가 아니라, 자신이.
‘목이 왜 이렇게 허전하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자 피 묻은 피부가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 가슴 위에서 달랑거리던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온데간데없었다.
‘안 돼, 아르문트가 준 건데……!’
아무래도 아르문트를 쫓아올 때 나뭇가지에 걸려 끊어진 모양이었다. 목걸이보다야 그의 목숨이 훨씬 중요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에게는 그 목걸이도 몹시 소중했다. 무려 아르문트가 그녀에게 고백하며 준 선물이니까.
‘일단 아르문트를 신관에게 데려다주고, 나중에 다시 와서 찾아봐야…….’
로제타는 침울한 얼굴로 아르문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에게 손가락 끝이 닿은 순간, 옆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촤악! 그녀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기척의 주인공은 깜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런, 로즈. 날 죽이려고?”
화려한 마법사 복장에 예쁜 귀걸이를 착용한 남자. 발레리안이었다.
“발레리……!”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를 마주하자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발레리안은 생긋 미소 지으며 그녀를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늦어서 미안. 황후가 뱀처럼 붙잡는 바람에.”
커다란 손이 로제타의 볼을 감쌌다. 그러자 상쾌한 기운이 그녀의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하더니, 피와 흙으로 더러워진 몸이 깨끗해졌다.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응, 괜찮아.”
로제타는 시침을 뗐다. 그에게 다친 걸 들켜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흥분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원. 다행히 다친 부위가 등이라 그리 눈에 띄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아프긴 엄청 아팠지만, 괜찮은 척 연기하는 것쯤이야 쉬웠다.
“황태자는?”
“전하도 무사하셔. 네 마법 덕분이야. 고마워, 발레리.”
“고맙긴 뭘. 아, 그런데 지금 황태자의 기사와 신관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 아까 오는 길에 마주쳤거든. 그러니 넌 슬슬 자리를 뜨는 게 좋을 것 같아.”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테오도르 신관이 오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아르문트가 더 빨리 치유를 받을 수 있으리라.
“기사가 그러길, 범인은 하인 놈인 것 같다더군. 배후는 더 조사해봐야 확실해지겠지만.”
하인이었다고. 로제타가 사나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사냥제 시작 전 그녀가 상태를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말은 멀쩡했다. 그러니 그 하인 놈이 사냥제 중간에 말에게 흥분제를 먹인 것이 분명하다. 그 자식도 미리 떠봤어야 했는데. 황태자궁에서 오래 일한 하인이기도 하고, 또 이전 생에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놈인지라 미처 경계를 못 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제 안일함을 탓했다. 죄책감 때문인지 등에 난 상처가 더 아파져 왔다.
“발레리. 미안한데, 돌아가는 길에 혹시 내 목걸이가 떨어져 있는지 좀 확인해줄래?”
“……목걸이?”
“응, 전하가 주신 거. 저번에 네가 줬던 거랑 똑같은 디자인이야. 아까 달려오다가 끊어진 것, 같아.”
극심한 통증 때문에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다행히 크게 이상해 보이진 않았는지 발레리안은 추궁하는 대신 눈만 가늘게 뜨고 서 있었다. 얼른 도망가야겠다. 로제타는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며 생각했다. 워낙 눈치가 빠른 그이니, 피 냄새가 이상하리만큼 짙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지금은 죽은 자객들의 시신에서 나는 냄새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럼, 나는 먼저 가볼게.”
“잠깐, 로즈. 혹시 모르니 내 옷을 걸치고 가.”
“아냐, 아냐! 괜찮아!”
로제타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그녀의 의견 따위 무시하곤 제 겉옷을 벗었다.
“정말 괜찮아, 발레리! 그냥 내 목걸이만 좀 부탁할게!”
“뭐가 괜찮아. 보니까 옷도 좀 찢어진 것…….”
그는 뒷걸음질 치는 그녀의 팔을 단호하게 붙잡았다. 하필이면 손가락 끝이 옆구리를 스쳤다. 상처와 가까운 부위였던 탓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너, 이거 뭐야.”
도망칠 새도 없이 발레리안이 그녀를 빙글 돌렸다. 그 탓에 찢어진 옷깃 사이로 시뻘건 상처가 드러났다.
“별거 아냐. 그렇게 큰 상처도 아니고…….”
로제타가 그의 눈치를 보며 변명했다. 척 보기에도 발레리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은 더 하얘졌고, 긴 눈매는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이게. 별 게 아니야? 로제타, 너 미쳤어? 당장 말했어야 할 거 아냐!”
발레리안이 드물게도 언성을 높였다. 그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저 새끼를 위해서 다치고, 희생하는 게 얼마나 익숙하면. 이런 상처가 별것이 아닐 수 있는가. 저 새끼가 얼마나 좋으면, 등이 갈리고도 고작 목걸이 얘기나 하고 있는가, 이 말이다. 화가 미친 듯이 치솟았다. 로제타가 왜 자신에게 상태를 숨기려 했는지 이해가 가면서도, 아프다 말 한마디 없이 황태자에 대한 얘기만 떠들어댄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저, 발레리. 미안해…….”
로제타는 그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발레리안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입술을 강하게 짓씹으며 분노를 억눌렀다. 아픈 몸으로 제 눈치를 보게 둘 수는 없다. 그가 천천히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러 껴안았다. 로제타는 상처가 눌릴까 봐 몸을 살짝 움츠렸으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발레리안이 자신을 일부러 아프게 할 리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희미한 기운이 그녀의 상처를 덮기 시작했다. 부드러우면서 간질거리는 느낌. 치유 마법이었다.
“돌아가서 제대로 치료받아. 알다시피 난 치유 쪽은 약하니까.”
“응, 고마워…….”
“그리고 제발, 내게 이런 거 숨기지 마.”
“응.”
로제타가 고개를 자그맣게 끄덕거렸다. 치유 마법 덕인지 확실히 고통이 한결 가셨다. 여전히 아프긴 했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훨씬 참을 만했다.
“저, 이제 그만 놓아줘도 될 것 같은데……. 혹시나 전하가 보시면 어떡해.”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치유 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르문트 앞에서 그와 포옹하고 있는 게 영 찔렸기 때문이었다. 발레리안은 불만스럽다는 듯 눈썹을 휘었다. 이 와중에도 황태자 놈만 신경 쓰는 것이 짜증이 났다. 그는 일부러 그녀를 더 꽉 껴안으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또 시한부인 척이나 해. 불쌍해서 넘어가 주겠지.”
또, 또, 말 안 예쁘게 한다. 로제타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평소처럼 타박하진 못했다. 방금 자신이 지은 죄가 있는 데다가, 괜히 대화가 길어져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팔에 힘을 주고 그를 밀었다. 테오도르 신관과 리처드가 오고 있다 했으니 슬슬 떠나야 했다. 그러나 발레리안을 완전히 떼어낸 순간. 로제타의 눈에 당혹스러운 장면이 담겼다. 황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문트가 깨어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