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그대가 나를 속였구나2022.01.16.
심장이 아래로 철렁 떨어져 내렸다. 찰나 같은 순간, 수많은 후회와 걱정이 로제타의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별관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할 사람이 이런 곳까지 와 있다니. 그것도 누가 봐도 수상한 차림새를 하고! 발레리안이 마법을 써준 덕에 핏자국이 지워지긴 했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살랑살랑한 원피스를 입고 있던 사람이 위아래로 온통 새카만 옷을 걸치고 있는 상황은 의심스러울 게 분명했다. 그녀를 지금껏 하녀로 위장하고 있던 암살자라고 오해한다 해도 달리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레리안과 껴안고 있는 모습까지 들켜버렸다. 심지어, 하필이면 그가 들어선 안 되는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설마, 들었을까……?’
로제타는 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푸른 눈동자가 불안으로 마구 흔들렸다. 다른 것은 무어라 변명할 여지라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방금 대화를 들었다면 돌이킬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럼 또 시한부인 척이나 해. 불쌍해서 넘어가 주겠지.”
이걸 도대체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옆에서 조심성 없이 대화를 나눈 것에 자책하며, 다급히 손을 뻗어 발레리안을 밀어냈다. 그러곤 재빨리 아르문트에게 다가가 주저앉았다.
“아르문트! 정신이 들어요?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르문트를 걱정했다. 실제로 걱정이 되기는 했다. 아무리 발레리안이 보호했다고 해도 낙마하며 어딜 어떻게 다쳤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 대한 걱정보단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미약하게나마 앞섰다.
‘제발, 제발 정신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들었어라!’
그녀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아르문트가 상체를 일으키는 걸 도왔다. 얼마나 절박했는지 등의 상처는 더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여전히 아프긴 했지만 지금은 아파할 겨를도 없었다. 아르문트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나무에 등을 기대앉았다. 컴컴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차례로 발레리안과 로제타를 향했다. 피가 묻어 붉어진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고 마침내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제.”
다행히 머리는 멀쩡한 모양이었다. 이게 정말 다행인 일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말콤이 말에게 흥분제를 먹인 것 같아요. 전하가 낙마한 뒤에는 자객들이 몰려왔고요. 제대로 작정한 일이었어요. 다행히 발레리안이 적절한 순간에 마법을 써서 크게 다치진 않으신 것 같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얼른 치료를 받으셔야 해요.”
로제타는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동안 재빨리 머리를 굴려둔 덕에 어색한 티는 나지 않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대답이 아르문트의 의문을 만족시키진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왜 그대가 이곳에 있는지 묻는 거야.”
“아, 그게…….”
로제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또한 미리 대답을 생각해두긴 했다. 그러나 그의 차가운 눈빛을 보니 왠지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아르문트의 다정함에 한껏 취해 있던 탓에, 저런 시선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너무 걱정이 돼서, 발레리안을 따라왔어요. 미안해요, 아르문트.”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아르문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따라오겠다는 걸 그렇게 반대하던 그이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적어도 나를 암살자라고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 로제타는 이렇게 자위했다. 그러나 상황은 자꾸만 그녀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보다 전하, 상태는…….”
“방금.”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대마법사와는 왜 껴안고 있었나?”
쿵. 또다시 심장이 가장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행세하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렸다.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해. 그녀는 저 자신을 재촉했으나 이미 너무 많은 거짓말을 뱉은 탓에 새로운 변명거리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로제타가 파리한 안색을 하고선 입술을 달싹거리자 아르문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오늘 아침,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꼭 가장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면, 지금 그의 황금색 눈동자 위로는 원망과 증오의 빛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차라리,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자.’
로제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결심했다. 발레리안과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이며, 그에게 황태자의 편에 서달라 부탁한 것도 자신이라고. 그렇게 밝힌다면 최소한 이상한 오해는 피할 것이다. 그러나 이내 거칠게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지며 그녀의 입을 가로막았다.
“또 시한부인 척하라는 말은, 도대체, 뭐고.”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로제타를 응시하며 씹어 뱉듯 말했다. 아르문트는 모든 것을 보고 들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화가 난 것이었다. 그의 분노를 코앞에서 마주한 로제타는 석상처럼 굳은 채 침묵했다.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시한부라는 거짓말을 했다는 말은 뱉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다 나았다는 얘기를 듣고 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기에,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밝혔을 때의 배신감 또한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해.”
아르문트가 으르렁거리듯 사나운 목소리로 재촉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밝혀질 사실이다. 차라리 자신의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나을 테다. 그러나 로제타는 이를 알면서도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말하라고 했어.”
두 번째 재촉이었다. 목소리 끝이 분노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이유로 희미하게 떨렸다. 로제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아르문트, 저는-.”
그때였다. 저 멀리 수풀 너머로 인기척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마법사님! 거기 계십니까?”
“전하! 제 말 들리십니까! 전하!”
테오도르 신관과 리처드였다. 발레리안이 말했던 대로 그를 쫓아온 모양이었다. 로제타의 눈빛이 흔들리며 수풀 쪽을 향했다. 겨우 벌어졌던 입술도 다시금 굳게 다물렸다.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르문트는 테오도르 신관과 리처드의 등장에도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로제타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곧 두 남자가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그들은 로제타와 아르문트, 발레리안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급히 달려왔다.
“세상에,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테오도르 신관이 빠르게 아르문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신성한 빛이 번지며 그의 몸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치유를 마친 테오도르 신관은 한결 안심한 표정으로 손을 떼어냈다.
“휴, 큰 상처는 없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낙마하기 전에 대마법사님이 마법을 쓰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런데 로제타 양이 이곳까진 무슨 일입니까? 그것도 그런, 이상한 차림으로요.”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리처드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오도르 신관은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화들짝 놀라 로제타를 훑어보았다.
“테오도르 신관.”
“예, 예? 예, 전하.”
로제타의 차림새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테오도르 신관은 갑작스럽게 제 이름이 불리자 말을 더듬거렸다. 아르문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로제타를 해독한 게 그대가 맞는가.”
“예? 아, 세타르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 치유한 적 없습니다.”
“……그럼 다른 신관이 그녀를 치유한 적이 있나?”
“어, 음……. 실례지만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다들 대신관의 눈치를 보느라 치유를 꺼린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만…… 어쨌든 그 극독이 그렇게 자연 치유되다니 그야말로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싸늘한 침묵 속에 테오도르 신관의 웃음소리만 메아리쳤다. 테오도르 신관과 리처드는 그제야 무언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아르문트의 눈치를 봤다. 아르문트는 여전히 로제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서 내려와 목을 향했다.
‘아, 목걸이.’
로제타가 황급히 손으로 목을 가렸다. 반사적인 행동이었으나 오해를 가중하기엔 충분했다.
“하.”
아르문트가 눈썹을 거칠게 일그러뜨리며 헛웃음을 뱉었다. 아닐 거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리라, 하며 필사적으로 다른 이유를 찾던 그였으나, 이제는 확실해졌다.
‘그대가 나를 속였구나.’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제 삶보다도 더 사랑하는 여인은 여태껏 저를 철저하게 농락해왔고, 그는 또다시 진심이라는 허상에 놀아나고 말았다. 아르문트는 견딜 수 없는 배신감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짧은 손톱이 피부를 파고들어 피가 흘렀다. 그러나 아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분노가 온 정신을 잡아먹은 탓이었다.
“즐거웠나?”
아르문트가 당장이라도 로제타의 목을 조를 듯 살벌한 태도로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굴던 나를 구경하는 게, 그리 재밌던가?”
“아르문트, 그게…….”
“그래. 애초에 그대는 처음부터 후회하는 기색이었지.”
그는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읊조렸다. 아르문트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무리 연애에 미숙하다 해도, 처음으로 밤을 보낸 다음 날 그녀가 자신을 종일 피해 다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그러나 사실을 인지하면 스스로만 고통스러워지기에, 애써 모른 척했을 뿐이었다.
“사랑을 입에 담지 않는 것도. 그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테고.”
“아니, 아니에요, 아르문트. 그게 아니라-.”
“그만. 그 입 다물어, 로제타.”
아르문트가 차갑게 명령했다. 변명 따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그대가, 내게 그럴 수가 있어. 조용히 죽어가던 나를 이렇게 살고 싶게 만들어놓고. 또다시 죽여놓는가. 지독한 원망의 말이 목구멍 끝까지 꾸역꾸역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서글픔도 밀려들었다. 우습게도 아르문트는 이 모든 것을 모르는 척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시 그녀와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자신을 농락한 로제타가 증오스러운데도, 빌어먹을 연모가 아직은 가시질 않아서.
“전하.”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발레리안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해입니다. 궁에 돌아가서 확실하게 사정을 설명하겠습니다.”
그의 표정 또한 아르문트의 것처럼 딱딱했다.
‘멍청한 새끼가 감히 어딜…….’
모든 사정을 아는 그로서는 로제타에게 성을 내는 황태자 놈이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다만 로제타의 입장을 배려해 이러한 심정을 티 내지는 않았다. 황태자에게 비밀을 들킨 것에 대해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고 말이다.
“간략하게만 말씀드리자면, 로즈와 전 소꿉친구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족처럼 자란 사이예요. 괜한 소문이 날 걸 방지하기 위해 제가 비밀로 해달라 부탁했습니다.”
친구. 가족. 요즘 들어 몹시 불편해진 단어였고, 특히나 황태자에게는 이런 말로 그녀와 자신의 사이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발레리안의 부연에 리처드와 테오도르 신관이 남몰래 눈빛을 교환했다. 대마법사 발레리안의 ‘소중한 사람’이 바로 로제타였다니. 사교계가 온통 뒤집힐 만한 정보였다. 그러나 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르문트의 표정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낯빛이 더욱 험악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소꿉친구.’
드레스룸에도 들어오는 사이이자, 서로의 집에서 자고 가기도 한다는 그. 아르문트가 가장 경계하던 두 상대가 동일인이었다는 뜻이었다.
‘로즈.’
얼마나 친밀하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애칭을 불러댈까. 그는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며 제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는 상상을 지워내려고 애썼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마지막이라는 말에 로제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대가 자주 만나러 간다는 친구. ‘루시아’는 진짜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