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진작부터 사랑이었다2022.01.20.
로제타는 알고 있었다. 그의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한다면, 아르문트는 이대로 완전히 떠나버리라는 걸. 그리고 다시는 그녀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이지 않을 거란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적어도 그의 곁을 계속 허락받기 위해선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그래야 아르문트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러나 아르문트의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하자,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찬란하던 황금색 눈동자는 깊은 분노와 슬픔으로 어둡게 물들었다. 늘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던 단정한 입매는 울분으로 부르텄다. 지금까지 그를 위한답시고 해온 거짓말들이 결국 그를 저렇게 상처입히고 말았다. 그것을 깨닫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니요.”
결국, 진실이 튀어나와버렸다.
“그런 친구는 없어요. 발레리안을 보러 간 거였어요.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전하.”
로제타는 눈을 질끈 감아 이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죗값을 치르겠다는 듯 아르문트를 빤히 응시했다. 다만 위아래로 흔들리는 시선에서 두려움이 묻어났다.
“……그래.”
아르문트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마지막이라도 사실을 말해주니 고맙군.”
사나운 목소리를 뱉어낸 입술이 비소를 머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로제타를 바라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진실하기를 바랐지만, 그렇다고 그 진실이 저런 것이기를 원하진 않았다. 어쩌면 차라리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하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이토록 비참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 그래도 한 번의 진실이 나았을까. 아르문트는 스스로의 마음조차 종잡을 수가 없어 그저 돌아섰다. 그러곤 로제타를 뒤에 둔 채 떠나버렸다. 적어도 그녀가 제 시야에서 사라져야 제 가슴이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리처드와 테오도르 신관은 아르문트와 로제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눈치를 보며 그의 뒤를 따랐다. 무어라 인사말을 남긴 것도 같았으나 로제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떠나가는 아르문트의 뒷모습만을 응시했다.
‘마지막.’
그 단어 하나가 자꾸만 머리를 맴돌았다. 언젠가 아르문트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떠나갈 수 있다고 늘 되새기던 그녀였다. 만약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그를 향한 제 충성심만큼은 절대 달라지지 않으리라고, 그를 살려내겠다는 다짐은 반드시 지켜낼 거라고 다짐했었다. 이별의 이유를 다양하게도 떠올리며 미리 마음을 다잡았었지만, 그날이 오늘이 되리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헤어지리라고는.
-“오늘 저녁에는 불꽃놀이를 할 거야. 규모가 크진 않지만, 시장에서 봤던 것보단 화려하겠지. 방에서 함께 보자. 저번처럼.”
순간 오늘 아침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와 술잔을 기울이며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저녁을 기대했었는데. 억울함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뜨거운 감정이 가슴속에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향한 애정이 가득 배어 있는 그의 말들이 자꾸만 생각나 심장을 할퀴어댔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해. 우리 관계가 영원하지는 않으리란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잖아. 그보단 이제 어떤 방식으로 아르문트를 지켜야 할지를 고민해야…….’
로제타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기억들을 지워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짐작했다고 한들 아픔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시야는 어느새 잔뜩 흐려져 어지럽게 흔들렸고, 누군가 목을 옥죄고 있는 것처럼 숨쉬기가 어려웠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로제타는 뜨겁게 달아오른 눈으로 아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잔뜩 나약해진 이성은 기어코 가장 떠올려서는 안 될 것마저 머릿속에 재생시키고 말았다.
-“사랑해.”
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던 여름밤. 진중하면서도 쑥스러운 듯한 얼굴로 제 진심을 고백해오는 아르문트의 모습이었다.
-“날 똑바로 응시하는 그대의 푸른 눈동자가 좋아.”
로제타는 회귀하기 전부터 그의 황금색 눈동자를 좋아했다. 전쟁의 어둠 속에서 연약하게 빛을 내던 그것이 꼭 따뜻한 햇살 같아서.
-“종종 분홍빛으로 물드는 두 뺨도, 환한 미소를 짓는 입술도, 모두 아름답고.”
아르문트는 잘 웃지는 않는 편이었지만, 그렇기에 가끔이라도 웃을 때면 로제타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그가 조금이라도 더 자주 웃을 수 있기를, 어떻게든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은근히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모습이, 연약한듯해도 알고 보면 그 누구보다 강인한 속내가, 흔들림 없이 제 생각을 표현하는 목소리가…… 그냥 그대의 모든 것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워.”
그의 모든 것이 애틋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로제타가 시간을 돌아온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의 죽음이 그녀 인생 최초의 실패이기 때문도, 제 자존심을 위해서도 아닌, 그저 살아 있는 아르문트를 다시 보고 싶어서. 제 명예, 권력, 부. 이 모든 걸 미련 없이 포기할 만큼, 그가 너무나 소중해서. 바보 같게도 로제타는 이제야 알아차리고 말았다. 자신은 생각보다 그를 더, 정말 더 많이 좋아했으며…… 그를 향한 마음은 진작부터 사랑이었다는 걸. 그러나 때를 놓친 말은 감히 그에게 닿지 못하고 그녀의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저대로 가게 둘 거야?”
발레리안이 짙은 정적을 깨고 물었다. 우습게도 로제타는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안 쫓아가?”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선 발레리안이 재차 질문했다. 로제타는 그제야 이성을 조금이나마 되찾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쫓아가면…… 무슨 말을 해?”
“…….”
“사실이잖아. 모든 게 다 거짓말이었던 거…….”
무표정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왈칵 일그러졌다. 입 밖으로 내뱉자 가슴을 에는 듯한 슬픔이 더욱 치솟는 기분이었다. 붉어진 눈가에 금세 눈물이 팽 돌았다. 발레리안은 차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침묵했다. 무어라 더 조언할 말은 있었지만 꺼내지 않았다. 로제타와 아르문트의 관계를 지독히 싫어하던 그에게는 이대로 두는 것이 더 좋을 터다.
“미안. 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
그는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잘근 깨물며 사과했다. 제 말실수 때문에 상황이 악화된 것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로제타는 상냥하게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내가 경솔했어……. 죄책감 느끼지 마, 발레리.”
그녀는 발레리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느릿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애끓는 설움이 묻어났다. 발레리안은 이 와중에도 저를 위로하는 모습에 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시선을 내렸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쿵. 심장이 거세게 내려앉았다. 핏기가 없이 창백한 피부와 초점 없는 눈동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으나 안간힘을 쓰고 버티는 모습. 평생토록 그녀의 곁에 붙어 있던 그였으나 저런 표정을 본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로제타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은인, 메이필드 남작 부인이 작고하였을 때.
“로즈.”
발레리안이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무 시간 끌지 말고, 황태자를 찾아가.”
그는 숨겨뒀던 조언을 얼른 뱉어냈다. 로제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도무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 기분이 어떻게 되든 간에, 그녀만큼은 슬프지 않기를 바랐다.
“찾아가서 말해.”
“……뭐를? 진짜, 진실을?”
전부 다 털어놓을까? 난 사실 당신의 호위기사이고, 당신을 살리기 위해 수차례 회귀해왔다고? 거짓말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 거였다고? 로제타가 떨리는 눈으로 고민했다. 가슴이 미칠 듯이 갑갑하고도 억울해, 그냥 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그랬다가 또 죽으면 어떡해.’
자신이 협조를 구한답시고 진실을 밝혔을 때, 아르문트는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죽었다. 직접 확인하진 못했지만 누군가 심장마비라고 외치는 걸 들었다. 이번 회차의 아르문트는 분명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심장이 갑자기 건강해졌을 리는 없다.
“아니. 그냥…… 네 진심을 말하면 돼.”
발레리안은 눈썹을 지그시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네가 보인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니었다고.”
제기랄. 그가 마음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녀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제 입으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애정이 담긴 눈길도, 환한 미소도. 고백을 받아준 마음도, 다 진심이었다고. 제대로 말하면 돼.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언젠가 그 자식도 이해할 테니까…….”
“…….”
“그러니까 울지 마.”
네가 울면 난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발레리안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며 중얼거렸다.
‘진심.’
로제타는 우두커니 서서 발레리안의 조언을 되새겼다. 그래, 그의 말대로 모든 사실을 알려주진 못하더라도, 여태껏 미처 꺼내 보이지 못한 진심은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문트가 그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로제타는 꼭 제 입으로 말하고 싶었다. 당신을 오래도록 사랑해왔다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발레리안을 마주 보았다.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는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응, 네 말대로 해볼게. 고마워, 발레리.”
로제타가 울음으로 일그러진 입꼬리를 살포시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뭘.”
발레리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 사냥제는 혼란 속에 다급히 마무리되었다. 황제가 각혈한 데다, 황태자 또한 암살당할 뻔했으니 더 이어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자택으로 돌아갔고, 황실에서는 기사단을 보내 사건을 조사하기 바빴다. 그리고 리처드의 증인 하에 말콤은 수감되었다. 수감 도중 암살당할 가능성을 대비해 따로 믿을만한 기사들을 배치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편, 발레리안의 도움을 받아 궁으로 돌아온 로제타는 곧장 아르문트의 방으로 달려갔다. 한시라도 빨리 그에게 사과하고, 제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의외의 존재가 그녀의 방문을 단호하게 막아섰으니-.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처드였다.
“……네?”
“죄송합니다만 전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는 차마 로제타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리처드는 한때 그녀를 좋아했던 입장으로써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몹시 난처했으나,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 법. 아무리 로제타라고 한들 제 주군의 명을 거스를 순 없었다. 결국, 로제타는 리처드를 뚫지 못하고 제 방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려고 했다. 또다시 리처드가 막아서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곳에도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제 방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요?”
“예. 이미 로제타의 짐은 다른 방으로 옮겨두었습니다. 하녀장이 안내해줄 겁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방까지 옮기다니. 약간의 억울함이 샘솟았으나 이내 가라앉았다. 여태껏 자신을 속여온 자를 옆방에 두고 싶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마리아의 안내에 따라 얌전히 새로운 방을 배정받았다. 아르문트의 침실에서 가장 먼 위치였다. 그것이 마음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 같아 속이 쓰렸다. 로제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아르문트를 만나려 했다. 그러나 일개 하녀의 능력으로 황태자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르문트는 더는 그녀에게 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멀리서 그를 발견하고 다가가려 하면 냉큼 자리를 옮겼고, 이름을 불러도 무시했다. 하루가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쿡쿡, 방금 봤어? 내가 다 창피하다, 진짜.”
“쯔쯧, 내 저렇게 될 줄 알았지. 예쁘장한 여자가 자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서는 로제타를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때는 친하게 지내자며 아양을 떨던 이들이었다. 애초에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로제타는 그리 개의치 않았지만, 조롱과 괴롭힘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 그녀가 무시할 수준을 벗어났다. 어느 날, 머리 위에서 물이 잔뜩 쏟아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쏴아아! 제 방에서 한 걸음 발을 내디뎌 나오자마자 더러운 구정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아르문트의 생각으로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로제타는 피하지 못하고 물을 뒤집어썼다. 먼 곳에서 그런 그녀를 비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귀찮게 구네…….”
로제타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그들의 의도와 달리 그렇게까지 화가 나거나 경악한 상태는 아니었다. 과거 신입 기사이던 시절 이보다 더 험한 일을 당하기도 했기에, 이쯤이야 별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침 그녀를 만나러 온 친구의 눈에는 무척이나 별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어떤 새끼 짓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