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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거짓 속의 진심 (94/145)

94화. 거짓 속의 진심2022.01.23.

험악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간식거리를 들고 서 있는 멜라니와 엘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로제타를 만나러 오는 길에 방금 벌어진 사건을 목격한 모양이었다.

16549582830956.jpg“어떤 새끼 짓이냐고! 당장 안 나와?!”

멜라니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군지는 몰라도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마음이 두 눈 위로 이글거렸다. 재빨리 다가와 손수건으로 로제타의 얼굴을 닦아주는 엘리아 또한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가운 눈동자 위로 살기가 묻어나는 듯도 했다. 당연하게도 범인은 나오지 않았다. 멀리서 구경하던 하인들은 멜라니의 기세에 다른 쪽으로 슬그머니 사라졌고, 지나가던 기사도 흠흠 헛기침을 하며 못 본 척을 했다.

16549582830962.jpg“멜라니. 난 괜찮아.”

로제타가 어설프게 웃으며 멜라니를 진정시켰다. 등을 토닥여주려 했으나 구정물로 더러워진 손을 발견하고 그만두었다.

16549582830956.jpg“괜찮긴 뭐가……! 얼른 씻으러 가자, 이리와!”

그러나 멜라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로제타의 손을 붙잡았다. 엘리아는 여전히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듯 둘러보며 로제타의 곁에 찰싹 붙었다. 둘은 로제타를 사용인용 욕실로 이끌었다. 직접 씻겨주기라도 할 기세였기에 로제타는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16549582830962.jpg“나 혼자 다녀올게!”

16549582830956.jpg“혹시 안에서 누가 널 또 괴롭히려 하면…….”

16549582830962.jpg“아냐, 안에 아무도 없는걸. 이 시간에 누가 있겠어.”

멜라니는 아쉽다는 듯 물러섰다. 로제타의 말대로 근무시간인 지금은 욕탕을 사용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물론, 멜라니와 엘리아는 근무시간임에도 로제타를 만나러 오긴 했지만.

16549582830956.jpg“……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무슨 일 있으면 불러.”

16549582830962.jpg“그냥 방에서 기다려도-.”

16549582830956.jpg“아니, 여기서 기다릴 거야.”

엘리아가 단호한 태도로 로제타의 말을 잘랐다.

16549582830956.jpg“갈아입을 옷은 우리가 넣어줄게. 그러니 안심하고 씻어.”

확고한 눈빛을 확인한 로제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후 욕실로 향했다. 예상대로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천천히 옷가지를 벗어 내렸다. 필사적으로 멜라니와 엘리아를 들어오지 못하게 한 이유가 곧 그녀의 등 위에서 드러났다. 여전히 뻘건 속살이 비치는 커다란 상처. 사냥제 때 암살자에게 당한 것이었다. 발레리안이 몰래 치유사를 불러준 덕에 따로 치유를 받기는 했지만, 검날에 발려 있던 독이 이미 피부에 스며든 탓에 회복이 더뎠다.

16549582830962.jpg‘이걸 보여줄 순 없지.’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상처였다. 징그럽기도 징그럽거니와, 괜히 들켰다간 이상한 오해를 살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신을 진심으로 위해주는 친구들에게까지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새삼 갑갑했다. 로제타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목욕을 마쳤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약속한 대로 멜라니와 엘리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쪼르르 방으로 향한 그들은 간식을 나눠 먹은 뒤에야 제대로 말문을 열었다.

16549582830956.jpg“저…… 로제타. 혹시 전하랑 무슨 일 있었어?”

엘리아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말투도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로제타는 바로 답하는 대신 잠시 숨을 골랐다. 짐작했던 질문이었으나 곧장 대답하기는 쉽지 않았다.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혀왔다. 이별한 지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16549582830962.jpg“내가…… 지금까지 쭉 거짓말해온 걸 들켰어. 그래서 전하가 많이, 실망한 것 같아.”

16549582830956.jpg“아…… 그렇구나.”

멜라니는 황태자에 대한 쌍욕을 늘어놓으려던 계획을 곱게 접어 넣었다. 황태자궁에 떠도는 소문과는 달리, 더욱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까닭이었다. 그녀는 거짓말이란 게 무엇이냐 물을까 고민하다 입을 다물었다. 제 호기심을 채우는 것보단 친구를 위로하는 게 더 급했다.

16549582830956.jpg“다시 제대로 이야기는 해봤어?”

16549582830962.jpg“아니, 아직은. 그럴 기회가 있으면 좋을 텐데…… 쉽지가 않네. 보다시피 요즘 전하가 날 피해 다녀서…….”

로제타가 옅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척 보기에도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이를 확인한 멜라니와 엘리아는 동시에 시선을 교환했다. 일순 두 여인의 얼굴 위로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기회가 없다면 만들어주면 그만 아니겠는가.

16549582830956.jpg“걱정하지 마, 로지. 우리가 있잖아.”

16549582830956.jpg“응. 우리만 믿어.”

뭘 믿으라는 거지? 로제타는 맥락을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멜라니와 엘리아는 설명 대신 당당한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로제타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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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 오후, 회의를 마치고 황태자궁으로 돌아온 아르문트는 제 방 쪽이 유난히 소란스럽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코너를 돌자 하녀 몇몇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르문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옮겨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눈이 본능적으로 붉은 머리카락을 쫓았다. 붉은 머리의 하녀를 발견하자 아르문트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러나 머리카락 색만 붉을 뿐 그가 기억하는 여인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16549582859619.jpg‘……아니군.’

아르문트가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냥제가 끝난 이후로 그는 내내 이 상태였다. 로제타를 차갑게 내쳤으면서, 눈으로는 계속 그녀를 찾는. 그런 어리석은 상태 말이다. 로제타와 이별한 후 그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 살고자 하는 마음도, 하루하루의 즐거움도 그녀를 통해 알게 된 것이었으니, 그녀의 거짓말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처음으로 믿은 진심에 배신당한 기분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그러나 더욱 비참한 것은, 여전히 아르문트를 살게 하는 감정은 전부 그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이전과는 달리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16549582887109.jpg“지금 감히 전하를 앞에 두고 뭘 하는 겁니까?”

리처드가 인상을 쓰며 하녀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 중심에 서 있던 하녀, 멜라니가 불쑥 고개를 들고는 대답했다.

16549582830956.jpg“죄송해요, 전하! 제가 청소 중에 기름을 쏟아서…… 바닥이 미끈거리는 걸 수습하고 있었어요. 저,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무릎까지 털썩 꿇고 사죄했다. 과거 조그만 실수에도 사용인을 궁 밖으로 쫓아내던 아르문트의 이력을 생각하면 대형사고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리처드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매서운 눈길로 멜라니를 훑어보았다. 눈앞의 하녀가 제 동료인 러크의 오랜 친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런 사적인 이유로 아량을 베풀 그가 아니었다. 불호령을 내리려는 순간,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49582859619.jpg“되었다. 후원에 있을 테니 청소가 끝나면 불러. 경은 이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진 않나 감시하고 있고.”

16549582830956.jpg“네, 네 전하! 감사합니다!”

멜라니는 빠르게 고개를 조아려 감사를 표했다.

16549582887109.jpg‘저 인간이 웬일이래?’

의외의 친절에 리처드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반면 고개를 숙인 멜라니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르문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후원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다른 곳이 아닌 후원으로 향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적어도 그곳은 바닥이 미끈거리지 않을 테니까.

16549582859619.jpg“후우.”

아르문트는 후원으로 통하는 문을 나서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회의 내내 사냥제 기념 연회를 얼른 개최해야 한다며 침을 튀겨대던 모르트마르 백작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원래라면 오늘 열려야 했을 것이 황제의 건강 악화와 황태자 암살 시도의 배후를 찾느라 늦춰진 게 그토록 아쉬운 모양이었다.

16549582859619.jpg‘아니면 얼른 새로운 방법으로 날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거나.’

속이 뻔히 보이는 태도에 아르문트는 코웃음을 쳤다. 이번 사냥제에서 그는 분명 죽을 뻔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두려움이나 초조함은 크지 않았다.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을뿐더러, 그의 생각은 오로지 로제타에게만 쏠려 있기 때문이었다. 바쁜 일정이 끝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또다시 그녀와의 기억이 몰려와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 방법을 알 수가 없는 우울감도 함께였다. 아르문트는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벼운 가을바람이 불어와 그의 피부를 간지럽혔다. 그때였다. 미세한 향기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은은한 꽃내음 같으면서도, 달콤한 것. 익숙한 향기였다.

16549582887144.jpg“……아르문트?”

아니나 다를까 그의 뒤편에서 노랫가락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황태자궁에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다. 천천히 고개가 돌아갔다. 이내 시야에 계속해서 찾던 이의 얼굴이 담겼다. 로제타였다.

16549582830962.jpg“아르문트.”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로제타가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그녀 또한 제법 놀란 얼굴이었다. 이곳에서 얌전히 기다리라는 멜라니와 엘리아의 명령에 영문도 모르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전하를 이곳까지 이끌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다른 게 더 중요했다.

16549582830962.jpg“저…….”

말문을 열려는 순간 느닷없이 아르문트가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또다시 그녀를 두고 떠나가려는 것이었다.

16549582830962.jpg“잠시만요, 아르문트, 잠시만……!”

로제타가 다급히 아르문트의 옷깃을 잡아챘다. 지금이 아니면 그와 대화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그녀의 손길을 거칠게 쳐냈다. 타악!

16549582830962.jpg“읏!”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팔을 맞은 건 별로 아프지 않았지만, 아르문트의 손이 상처 근처를 스쳤는지 등에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 탓이었다. 그녀가 통증에 몸을 움츠리자 아르문트의 눈길이 크게 흔들렸다. 그 또한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을 뿐, 그녀를 아프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르문트는 잠시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별다른 변명은 늘어놓지 않았다. 로제타는 별로 아프지 않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16549582830962.jpg“죄송해요, 멋대로 잡아서 놀라셨죠.”

그는 침묵하며 로제타의 손목 쪽을 응시했다. 그녀가 웬만해선 아픈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방금의 신음이 더 신경 쓰였다.

16549582830962.jpg“잠시만, 아주 잠시만…… 시간을 내주세요, 전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눈썹을 바르르 떨며 부탁해오는 모습이 애처로웠지만, 아르문트는 감히 안타깝게 여기지 않았다. 애처로운 신세를 가장하며 그에게 접근해온 그녀다. 이런 반응 또한 연기일지, 새로운 전략을 펼치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미련하게도 벌게진 피부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마음속 한구석에는 그녀에게 이유를 듣고 싶다는 욕구가 자리했다. 결국, 아르문트는 제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16549582859619.jpg“……어디, 변명해봐.”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이 자신을 향하자 로제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미리 생각해둔 말이 잔뜩이었으나 막상 그를 앞에 두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행여나 그가 자리를 떠날까 서둘러 입을 열었다.

16549582830962.jpg“죄송해요. 여태껏 거짓말로 전하를 속여온 거…… 발레리안과의 관계를 비밀로 한 것도 모두. 정말 미안해요.”

아르문트의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고작 사과를 듣겠다고 시간을 내어준 게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만 더 확실하게 알게 되는 꼴이다. 안 그래도 더러웠던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16549582859619.jpg‘더 들어줄 필요도 없군.’

아르문트는 로제타가 말을 잇는 걸 기다리지 않고 곧장 몸을 돌렸다. 그러나 절박한 외침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16549582830962.jpg“다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아르문트가 우뚝 멈춰 섰다. 별것 아닌 말인데 이상하게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꽉 잡은 것처럼.

16549582830962.jpg“제 진심마저,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전하를 지키고 싶다는 것도, 계속 전하 곁에 있고 싶다는 것도.”

감정이 울컥 솟구친 탓에 목소리가 떨렸다. 울음기가 자꾸만 숨결 사이로 배어들었다.

16549582830962.jpg“전하를 좋아하는 마음도, 모두 진실이에요.”

로제타는 중요한 얘기를 꺼내기 전 호흡을 한번 가다듬었다. 그러곤 토해내듯 고백했다.

16549582830962.jpg“아르문트, 당신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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