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원하지 않던 손님2022.01.27.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그녀에게 들릴 것만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사랑해요.”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던가. 언젠가는 말해주겠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말해주겠지,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였다. 그러나 결국 고대하던 말은 듣지 못한 채 관계는 끝이 났다. 어쩌면 로제는 한순간도 날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내가 아닌 대마법사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차마 사랑을 입에 담지 못했던 걸까. 로제타와 이별한 후 아르문트는 이런 추측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곤 했다. 이는 그녀를 필사적으로 피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행여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방금 로제타는 분명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거짓 속에서도, 자신을 향한 마음만큼은 모두 진심이었다고……. 황금빛 눈동자가 일렁이듯 크게 흔들렸다. 격한 감정이 벅차오르며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차마 말로는 형용할 수가 없었다. 복잡한 마음들이 가슴속에서 마구 뒤엉켰다. 기다렸던 말인 만큼 희열이 느껴지면서도, 같은 크기의 울분이 뒤따랐다.
“세타르에는 면역이 있어요. 그래서 망설임 없이 대신 마실 수 있었던 건 맞지만…… 당신을 지키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
“깨어났을 때, 제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모습이 너무 좋아서…… 거짓말을 해서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래서 아르문트를 속였어요. 정말 미안해요.”
로제타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을 이었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눈물이 차올라 둥근 볼을 타고 흘렀다. 아르문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이상한 소리를 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고백받은 다음 날, 아르문트를 피해 다닌 것도 맞아요. 사실 무서웠어요. 제게는 당신이 너무 소중한데…… 우리 연애에는 끝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 언젠가 당신을 잃게 됐을 때, 그 슬픔을 홀로 감당하는 게 너무 힘이 들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
미안해요, 그러면 안 됐는데. 울먹이는 목소리로 속삭인 로제타가 숨을 헐떡였다. 그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 너무나 괴로웠다. 차가운 눈빛도, 목소리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한 주제에 울면 안 되는데. 그만큼 꼴 보기 싫은 게 따로 없는데. 이를 알면서도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기어코 애원의 말마저 튀어나왔다.
“아르문트, 저 다시 좋아해 주면 안 돼요……?”
추잡하기 짝이 없다. 로제타가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러나 이게 그녀의 최선이었고, 본심이었다.
“아니, 싫어하지만 말아줘요…….”
몇 걸음 뒤에서라도 좋으니, 당신의 곁에 머물 수 있게 해줘요. 그녀는 서럽게 속삭였다.
“그만.”
아르문트가 그제야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그녀 못지않게 괴로워 보였다. 미간에는 주름이 깊게 잡혔고 눈썹은 거세게 휘었다. 아르문트는 주먹을 강하게 말아쥔 채로 절박한 목소리를 냈다.
“제발, 그만해.”
잔뜩 힘이 들어가 핏줄이 불거진 팔이 부르르 떨렸다.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내 추잡한 모습을 경멸하는 걸까. 로제타는 젖은 눈으로 그의 떨림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그는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제 아랫입술만 강하게 깨물었다. 이가 부딪히는 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거친 숨을 몇 번 몰아쉰 그는 홱 몸을 돌리더니, 그녀의 반대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 그의 뒷모습만 멀어져갔다. 사냥터에서 그랬듯 또다시 홀로 남은 로제타는 소리 죽여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 다음날, 로제타는 퀭해진 얼굴로 밀린 일을 처리했다. 전속 하녀 자리를 박탈당한 그녀는 다른 하녀들과 마찬가지로 온갖 잡무를 처리해야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른 하녀들에 비교해 훨씬 많은 양의 일을 맡았다.
“일 배분이 왜 이딴 식이야?!”
“마리아 님이 시키셨대.”
“그 여자는 또 왜 난리래?”
“그러게 말이야.”
멜라니와 엘리아가 그녀를 대신해서 투덜거렸다. 어제 아르문트와 잘 풀지 못한 걸 알아차린 후로 유독 더 로제타를 챙기는 그들이었다.
“난 괜찮아.”
멜라니와 엘리아는 믿지 않겠지만, 로제타는 진심으로 한 소리였다. 쉴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일이 많다 보니 딴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호위는 한동안 발레리안이 전담하기로 한 덕에 아르문트에 대해 떠올릴 일도 적어졌다. 지금처럼 우울한 때에는 이렇게 바쁜 게 오히려 도움이 됐다. 다만, 괴롭힘을 당하는 건 별개의 얘기였다. 잠시 지속되다 곧 사그라들 거라고 생각했던 괴롭힘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신발에 녹슨 못을 넣어두질 않나, 점심에 벌레를 넣어놓질 않나. 악의가 가득하다 못해 철철 넘치는 짓거리가 이어졌다. 의아한 일이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괴롭힐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황태자와 연애놀음을 하며 일을 게을리했다는 것? 못마땅하게 볼 수야 있겠지만, 고작 그것 때문이라기엔 수위가 높았다. 멜라니와 엘리아는 로제타를 지키려 애를 썼지만, 그들도 하녀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모든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었다. 결국 로제타는 바쁜 와중에 괴롭힘까지 당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그들이 의도한 대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신발에 들어있던 녹슨 못은 진작 발견해서 버렸고, 꿈틀거리던 벌레는 얌전히 야외로 돌려보냈다. 걷던 중 누군가 다리를 걸면 태연하게 발을 밟고 지나갔고, 뒤에서 조롱할 때는 그냥 무시했다. 가끔은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짜증 나는 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괜히 시비가 걸렸다가 황궁에서 쫓겨나면 곤란했기에 무사히 참아넘겼다. 어쨌든 그녀는 실연의 아픔에 우울해하는 사람치고 따돌림에 매우 잘 대응했다. 슬픈 건 슬픈 거고, 못된 놈들의 장난질에 얌전히 당해주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오히려 애가 타는 것은 괴롭히는 쪽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괴롭힘 거리를 찾다 지쳤는지 아예 로제타를 따로 불러내기까지 했다. 마리아가 창고에서 기다린다는 말에 쪼르르 창고로 향하자 느닷없이 문이 닫혔다. 철컥. 잠금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로제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전적이다 못해 지루하군.’
두꺼운 문 너머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창의력이 이다지도 없으면서 뭐가 그리 좋다고 웃는지 모를 일이었다.
“거기서 며칠은 반성해!”
심지어 대사까지 진부했다. 로제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곤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타깝지만 할 일이 천지라 이런 곳에서 허송세월할 순 없다. 까드드득-! 손에 힘을 주자 단단한 문이 점차 휘어지더니 이내 벌컥 열렸다. 반쯤 뜯어진 것에 가까웠다. 며칠은 무슨, 몇 분도 안 돼서 탈출한 그녀였다. 촤아아! 그러나 로제타도 이것까지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저번에 당한 것처럼 문을 열자마자 진득한 액체가 그녀 위로 쏟아진 것이었다.
‘준비성은 대단하네.’
여길 어떻게 탈출할 줄 알고 2안까지 준비했담. 로제타는 눈을 질끈 감으며 감탄했다. 손으로 대충 얼굴을 닦자 곧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욱!”
참을 수 없는 악취에 로제타가 헛구역질했다. 찐득찐득한 붉은 액체. 심지어 흐물흐물한 덩어리도 곳곳에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제 피부를 물들인 액체를 응시하던 그녀는 이내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썩은 토마토잖아.”
이 정도 냄새라면 썩은 지 제법 됐을 것 같았다.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했을까. 적어도 주방 하녀의 도움이 있었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로제타는 질척해진 몸을 이끌고 다시 욕실 쪽으로 향했다.
‘얼른 씻고 다시 일하러 가야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주변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누군가는 연민의 눈빛을 보냈고, 또 누군가는 그녀를 비웃었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도 들려왔다. 젖은 옷 때문일까, 점점 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동시에 지독한 허망함이 밀려들었다.
‘도대체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고작 청소를 하려고 시간을 되돌렸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따돌림이나 당하면서. 차곡차곡 쌓인 우울감이 비로소 터져버렸다. 모든 게 다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저번 회차도, 이번 회차도 그저 헛되게만 느껴졌다. 이대로 영원히 회귀를 반복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바뀌지 않는 결과에 홀로 미쳐가는 건 아닐까. 어쩌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지도…….
“로지, 손님이 널 찾아왔-. 세상에! 너, 너 꼴이 왜 그래?!”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달려온 멜라니가 로제타의 상태를 확인하고 경악에 차서 비명을 질렀다. 보통 때 같았으면 괜찮단 말이라도 한마디 했을 텐데, 지금은 차마 그럴 의욕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의외의 존재가 그녀의 의지를 북돋아 주었으니-.
“뭐야, 그 더러운 꼴은?”
고동색의 긴 곱슬머리에, 새초롬한 눈매 속에 빛나는 녹안. 볼이 통통하고 귀여운 인상이나, 로제타의 눈에는 한없이 재수 없어 보이는 얼굴.
“웩, 설마 언니 너 따돌림이라도 당하니? 쪽팔리게.”
그녀의 이복동생인 셀레나 메이필드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의 등장에 로제타의 얼굴이 멍해졌다.
‘얘가 왜 여깄어……?’
그녀는 이런 의미를 담아 멜라니를 바라보았다. 멜라니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답답하게 그러고 서 있지 말고 얼른 방으로 안내해. 언제까지 세워둘 셈이야? 다리 아프게. 그리고 냄새나니까 씻고 와!”
셀레나가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고 명령했다. 오랜만에 저 싸가지 없는 꼴을 보니 짜증이 솟았다. 덕분에 로제타는 방금까지 그녀를 괴롭게 하던 생각들을 모두 잊고 얼른 욕실로 향했다. 저 시한폭탄을 얼른 처리하려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잠시 뒤, 방으로 돌아온 로제타는 제 이복동생의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했다.
“하, 이게 방이야? 진짜 더럽고 수준 떨어져서…….”
“그래, 나도 오랜만이라 너무 반가워.”
로제타가 생긋 웃으며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정말 반가운 건 아니었고, 얼른 셀레나를 치우기 위해 말을 끊은 거였다.
“그래서. 여기까진 왜, 어떻게 온 건데?”
“황태자 애인 동생이라고 말하니 들여보내 주던데.”
로제타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 저런 정보는 어떻게 알았으며, 알았다 해도 굳이 친하지도 않은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 정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그것도 이미 쫑난 모양이다? 난생처음으로 네 덕 좀 보나 했더니, 네가 그럼 그렇지. 무식하게 검이나 휘둘러대던 게 무슨 재주로 황태자를 꼬시겠어?”
피식. 셀레나가 대놓고 로제타를 조롱했다. 두통이 이는 기분에 로제타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쩜 이 계집애는 몇 분도 안 돼서 제 속을 이렇게 뒤집어 놓을 수 있을까.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그래, 잘 확인했으면 이제 그만 꺼져, 셀레나. 너 상대해줄 시간 없어.”
“왜, 또 괴롭힘당하러 가야 해서 너무 바빠?”
셀레나는 머리를 한쪽으로 갸웃하며 두 눈을 귀엽게 깜빡거렸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로제타를 더 화나게 하려고. 마음만 같아선 저 조그만 머리를 후려갈기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다.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상대를 건드리는 것은 로제타의 신념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게다가 셀레나를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간 아버지, 메이필드 남작이 또 노발대발하여 난리를 칠 게 뻔했다. 하녀로 자원할 때도 별소리를 다 지껄이던 그다. 괜히 귀찮은 일을 더 만들 수야 없다. 오랜 학습의 결과로 로제타는 셀레나의 시비는 무시하는 것이 가장 낫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요즘 너무 다사다난하여 정신적으로 몰려있던 탓일까. 자꾸만 제 신경을 긁는 그녀를 무시하기가 썩 쉽지 않았다.
“아니면 제발 만나 달라고 황태자한테 구걸하러 가기라도 해야 하나? 진짜 너-무 쪽팔린다. 수치스러우니까 어디 가서 내 언니라 하지 마, 응?”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아까부터 바깥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갑자기 가까워지더니, 방문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