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전하가 울렸습니까?2022.01.30.
부웅! 여인의 몸이 날렵하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자그맣지만 팔다리에는 근육이 탄탄하게 붙어 있는 몸이었다. 로제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제 앞을 가로지르는 인영을 응시했다. 너무 충격적인 장면인 탓일까. 1초가 마치 1분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그리고 눈을 한번 감았다 떴을 땐 이미 사건이 벌어진 후였다.
“꺄아악!!”
난데없이 공격을 당한 셀레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로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고.
“뭐? 구거얼? 쪽팔려-?!”
방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와 도약한 멜라니는 두 손으로 셀레나의 곱슬머리를 휘어잡곤 마구 흔들어댔다.
“이년이 언니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거대한 사자후가 방을 가득 울렸다. 로제타는 멍한 표정으로 제 친구가 셀레나의 머리채를 잡아 뜯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지끈거리던 머리가 순식간에 상쾌해졌다. 갑갑했던 속에 시원한 음료를 단숨에 들이켠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러기도 잠깐. 로제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셀레나가 소중하게 관리해온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뜯겨나가는 모습을 보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통쾌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말려야 했다. 제 이복동생의 성질머리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분명 멜라니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길길이 날뛸 테다. 로제타는 서둘러 멜라니를 향해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려 했다. 제 뒤에서 등장한 또 다른 친구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커다란 빗자루를 치켜든 엘리아가 셀레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퍽! 말릴 새도 없이 빗자루가 셀레나의 엉덩이를 강타했다.
“아악!”
긴 손톱으로 멜라니의 얼굴을 마구 할퀴던 셀레나가 또다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픈 것도 아팠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란 자신이 빗자루로 엉덩이를 맞다니. 그것도 일개 하녀에게!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하녀가 다시금 빗자루를 치켜드는 게 보였다. 그것도 반쯤 이성이 나간 듯, 초점이 없는 눈으로. 이번에는 머리를 후려갈길 심산이었다.
“자, 잠깐! 엘리아! 안 돼!”
로제타가 엘리아의 팔을 붙잡아 저지했다. 엘리아의 눈동자 위로 살기가 느껴졌기에 손길이 다소 다급했다.
“멜라니! 진정해, 진정!”
어느새 나타났는지 모를 러크는 잔뜩 당황한 얼굴로 멜라니를 떼어냈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엘리아를 향하고 있었다. 남몰래 엘리아를 자신만의 여신님으로 여기던 그로서는 지금의 모습이 몹시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멜라니는 마지막까지 셀레나의 머리를 놓지 않으며 그녀를 향해 험한 말을 마구 퍼질렀다. 기사단에서 일하며 온갖 소리를 다 들어봤던 로제타조차도 기가 죽을 정도의 욕설이었다. 한편, 훤히 열려 있는 문 바깥에서는 사용인들이 흥미로운 장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용하던 황태자궁에 이렇게 큰 소리가 났으니 하던 일을 멈추고 몰려올 만도 했다. 아마 그래서 러크도 때마침 등장한 모양이었다.
“이, 이 미친 것들이……!”
자신을 둘러싼 위협에서 겨우 해방된 셀레나는 따가운 두피를 부여잡고 숨을 씨근덕거렸다. 어찌나 고통스러웠는지 눈가에는 눈물도 찔끔 맺혔다. 멜라니의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 고동색 머리카락을 보니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내가 이대로 가만있을 것 같아?!”
셀레나는 살벌한 눈으로 멜라니와 엘리아를 쏘아보며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질렀다. 고작 하녀 주제에, 평민 주제에! 귀족인 자신을 공격하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녀는 잔혹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리라 다짐하며 이를 아득 깨물었다.
“왜, 또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려고? 너도 참 한결같다.”
쯧쯧, 로제타는 몇 번을 회귀해도 바뀌지 않는 인성에 혀를 내둘렀다.
“그래! 당장 오늘이라도 아버지께……!”
“이게 지금.”
갑작스럽게 등장한 남자가 셀레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셀레나는 뒤를 돌아봤다. 고개를 한껏 치켜들자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감히, 무슨 짓이야.”
잔뜩 화가 난 인상의 발레리안이었다.
“발레리!”
셀레나의 낯빛이 금세 밝아졌다.
“세상에, 이게 얼마 만이야? 반가워라.”
그녀는 언제 패악을 부렸냐는 듯 귀여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러곤 재빨리 고자질을 시도했다.
“보다시피 방금 이 평민들이 내게-.”
“아니.”
다만 효과는 썩 좋지 못했다.
“너 말한 거야. 네가 감히 무슨 자격으로 로제타를 찾아와?”
셀레나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발레리안이 평민들 앞에서 자신을 욕보이리라고는 차마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역겹게도. 발레리안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발레리, 어떻게 네가…….”
“셀레나 메이필드. 네게 애칭을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멍청해서 그것마저 잊어버렸나?”
발레리안은 차갑게 대꾸하고는 로제타의 곁으로 다가가 혹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셀레나를 대할 때와는 달리, 다정하기 짝이 없는 눈길로. 자매를 향한 태도가 이다지도 다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린 시절, 셀레나는 발레리안이 메이필드 가문의 후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그를 마치 제 아랫사람처럼 부리려 했다. 정작 후원은 메이필드 남작 부인의 개인 주머니에서 나온 것임에도 말이다.
‘거지.’
이것이 그녀가 발레리안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열 살 먹은 어린아이가 멋모르고 뱉은 말이라 치부하기엔 악의가 다분했다. 셀레나는 자신이 그 말을 할 때마다 발레리안과 로제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진심으로 즐겼다. 물론, 얼마 안 가 상황은 바뀌었다. 발레리안은 열다섯의 나이로 대마법사의 지위에 올랐고, 셀레나는 더는 그를 막대할 수 없었다. 여전히 어렸던 그녀는 아랫사람이라고 여겼던 이에게 존대해야 한다는 것이 끔찍하게 싫어 발레리안을 피해 다녔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가 찬 후에는 친한 척을 하기 바빴다. 세상 물정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저 거지 놈이 언젠가 내 동아줄이 되어줄 거야.’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여전했다. 그렇기에 셀레나는 발레리안이 자신을 냉대했음에도 그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러곤 만만한 상대에게 칼끝을 돌렸다.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엘리아를 진정시키고 있던 로제타가 바로 그 대상이었다.
“머저리같이 하인들에게 무시나 당하는 주제에, 뭘 좋다고 웃어?”
가시가 돋친 말에도 로제타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시끄럽게 짖어대는 옆집 개를 바라보듯, 시큰둥한 태도였다.
“거기, 빈센트 경. 구경만 마시고 이만 데리고 나가주실래요? 기사단장님께 이르기 전에요.”
로제타는 문밖에서 한참 구경 중이던 기사의 이름을 콕 집어 부르며 부탁했다. 느닷없는 호명에 기사 빈센트는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셀레나를 데려가기 위해 허둥지둥 다가왔다. 단장에게 혼나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너……!”
“앞으론 얼굴 보는 일 없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어디 가서 내 이복동생이라고도 안 하고 다녔으면 해.”
나도 창피함을 아는 사람이거든. 로제타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셀레나는 주먹을 꽉 쥔 채로 바들거렸다. 마음 같아선 더 소란을 피우고 싶었으나, 차후 수도 사교계에 데뷔할 걸 생각하면 기사들 앞에선 얌전을 떨어야 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홱 돌아섰다.
“두고 봐, 언니.”
셀레나는 뻔하디뻔한 협박을 남긴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
“어후, 저, 저 싸가지 없는 말본새 좀 봐. 머리를 한 움큼 더 뽑아줄 걸 그랬나.”
재수 없는 계집애. 멜라니가 흥 콧방귀를 뀌며 손을 털었다. 고동색 곱슬머리가 우수수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푸핫!”
그 기백이 마치 장군과도 같아 로제타는 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스운 것은 멜라니도, 엘리아도 마찬가지였는지 경쾌한 웃음소리가 잇따랐다.
‘그래. 그 무엇도 헛되지 않았어.’
이런 친구들이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비록 아르문트를 살리기 위해 회귀했다고는 하나, 그가 로제타의 전부는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힘이 났다. 이별의 슬픔은 여전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우울감에 빠져들고 싶진 않았다.
“저, 로제타. 그런데…… 대마법사님과는 무슨 사이……?”
멜라니의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러크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보아 아르문트나 리처드, 테오도르 신관이 둘의 관계에 대해 따로 떠들고 다니지 않은 듯했다.
‘하긴, 그중 누구도 그럴만한 인물이 없긴 하지. 특히 러크 경은 입이 싸니까.’
로제타가 알만 하다는 듯 러크를 응시했다. 뭐, 이제는 말해도 큰 상관은 없겠지. 이렇게 판단한 그녀가 천천히 대답했다.
“소꿉친구예요.”
“뭐?!!”
그리고 경악에 찬 반응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그보다, 로즈. 하인들에게 무시당한다는 건 무슨 뜻이야.”
발레리안은 다른 이들의 반응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며 물었다. 아까부터 쭉 눈빛이 사납더니만 저 말을 마음에 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차. 로제타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며 머리를 굴리는 찰나, 엘리아가 선수를 쳤다.
“말 그대로예요! 요즘 하녀 몇몇이 대놓고 로지를 따돌리고 있어요!”
“엘리아, 잠깐……!”
“음식에 벌레를 넣어놓고, 신발엔 못을 숨겨뒀어요! 오늘만 해도 우리 로지가 음식물 쓰레기를 잔뜩 뒤집어썼다고요!”
말리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엘리아는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빠르게 모든 것을 일러바쳤고, 이를 들은 발레리안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살벌해졌다. 이미 글렀다.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발레리안은 당장이라도 그 범인을 족칠 듯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창 구경 중이던 사용인들은 알 수 없는 한기에 몸을 움츠렸다. 그중 일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로즈.”
발레리안은 그들을 빤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 관계도 이제 알려졌겠다. 그냥 대놓고 말할게.”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지. 로제타는 불안감에 그를 올려다 봤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그를 다그치고 싶었으나 아직은 주위의 시선이 조심스러웠다. 이내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앞으로 누가 조금이라도 널 건드리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정말로. 발레리안이 사르르 웃으며 로제타의 인간관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곤 마치 눈물이라도 닦아주듯 엄지로 그녀의 눈가를 쓸었다.
‘이거 백 프로 또 소문난다.’
한동안은 자신을 둘러싼 소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짐작에 로제타는 다시금 눈만 질끈 감을 뿐이었다. *** 로제타의 예상대로, ‘황태자의 전 연인이었던 하녀가 알고 보니 대마법사와도 그렇고 그런 사이더라’ 하는 소문은 날개가 달린 듯 뻗어져 나가 결국 아르문트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무려 방에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잖아!”
“말은 소꿉친구라지만,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게 말이 돼? 무조건 다른 마음 있을걸?”
“내 말이!”
복도를 지나가는 하인들이 눈치 없이 조잘거리는 소리에 아르문트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책에 시선을 고정했으나 한참 시간이 지나도 한 장이 넘어가질 않았다. 머릿속에는 불쾌한 상상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기어이 로제타와 발레리안이 입을 맞추는 모습마저 떠올린 순간, 그는 평정을 가장하는 것을 그만뒀다. 타악! 방금까지만 해도 아르문트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이 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고도 분노가 잦아들지를 않아 아르문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였다.
“전하. 대마법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문 너머로 리처드의 당혹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문의 주인공이자, 지금 아르문트를 이토록 분노하게 한 당사자가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들라 해.”
아르문트는 저도 모르게 허락의 말을 뱉었다. 곧 문이 열리고 증오스럽게도 잘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순 허공에서 뜨거운 시선이 맞부딪혔다. 발레리안은 이제 기본적인 예의도 아예 집어치우기로 작정했는지 인사마저 생략했다.
“전하.”
그는 차가운 눈으로 아르문트를 응시하며 물었다.
“우리 로즈, 전하가 울렸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