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몰랐던 사실2022.02.03.
“……뭐?”
불쾌하게 휘어진 검은 눈썹 아래 안광이 형형했다. 아르문트는 반쯤 쉰 것 같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지껄였나?”
“우리 로즈를 울린 게 전하가 맞느냐 물었습니다.”
발레리안은 험악한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 뻔뻔한 태도에 아르문트의 관자놀이 위로 핏대가 불쑥 솟아올랐다.
‘우리 로즈.’
그녀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발레리안의 뒤를 따라 들어온 리처드는 경악한 나머지 입을 쩍 벌렸다. 안 그래도 요즘 제 주군의 성격이 부쩍 더 날카로워졌는데. 하필이면 지금, 그것도 저 인간이 저런 소리를 하다니. 이 정도면 그냥 대놓고 싸움을 거는 거로 생각해도 무방했다. 리처드는 불안한 눈으로 아르문트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발레리안을 응시하는 황금빛 눈동자 위로는 살기가 그득했다. 주먹을 강하게 말아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 같은 기세였으나, 다행히 아르문트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는 모양이야.’
휴. 리처드가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적으로 지금 대마법사 발레리안 윈저프리드와 척을 지는 것은 몹시 어리석은 선택이다. 황후와 1 황자에게 제대로 맞서겠다 선언한 이상, 대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로제타와 그렇게 끝난 것은 자신이 보아도 참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그래도 현실은 현실이 아니겠는가. 리처드는 이렇게 생각하며 슬쩍 제 주군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곧 발견했다. 자신의 예상과 달리, 날 것 그대로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아르문트의 얼굴을.
“내가, 로제와 무얼 하든.”
아르문트는 거칠게 긁히는 듯한 목소리로 씹어뱉었다.
“네놈과 무슨 상관이지?”
‘네놈’이라는 사나운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상태였다. 곧장 검을 뽑아 들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발레리안의 말은 분명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쾌했지만, 동시에 찔리는 데가 있었으니까.
-“아르문트, 저 다시 좋아해 주면 안 돼요……?”
충혈된 눈으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로제타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잔뜩 젖은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하는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아르문트는 감히 다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그 순간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그렇게나 자주 들여다봤으면 닳아 없어질 만도 하건만 기억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져만 갔다. 그만큼 그의 마음도 더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로제타는 거짓말을 했고, 여태껏 그를 속였는데. 그의 걱정, 고민, 사랑마저 모두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그녀가, 정말 지독히도 원망스러운데…….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로, 또 정말 진심인 것만 같은 눈물로. 그동안의 원망이 사그라들고 그리움이 고개를 내밀었다. 로제타가 보고 싶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미소도, 경쾌한 웃음소리도…… 모든 것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제게 애원하는 그녀에게서 다급히 떠나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곳에 계속 있었다간,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입을 맞출 것만 같아서.
‘정말이지 머저리 같게도.’
아르문트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재차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리고 발레리안은 그런 그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글쎄요, 이제 그쪽보다는 더 상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말했다시피, 로즈와는 가족보다 더 끈끈한 사이인지라.”
‘네놈’이라는 건방진 호칭에는 ‘그쪽’이라고 받아치는 그였다. 겉보기에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는 사실 예쁘게 포장한 폭탄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딴 헛소리를 하러 친히 방문했나? 대마법사가 그리 한가한 줄은 몰랐군.”
“듣기 싫은 소리가 모두 헛소리는 아니랍니다, 전하. 아직 배울 게 많으시군요.”
이어지는 빈정거림에 아르문트는 손가락을 느릿하게 까닥거렸다. 뚝, 뚝, 마디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리처드는 그의 눈빛이 점점 더 살벌해지는 걸 확인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가만뒀다간 싸움이 날 것 같은데, 그의 신분상 차마 끼어들기가 애매했다. 여자 문제로 대마법사와 치고받는 황태자라니. 저도 모르게 검과 지팡이를 빼 들고 황태자궁을 초토화하는 둘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리처드의 얼굴이 금세 창백해졌다. 차라리 자신이 문책을 받았으면 받았지,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리처드는 다급히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을 말리고자 했다. 그러나 한 발 내디디려는 찰나, 발레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행히 방금과는 달리 시비조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뭐, 개인적인 화풀이는 여기까지 하고.”
화풀이라니. 직접적인 표현에 리처드가 또다시 기함했다.
“이곳까지 온 이유는 따로 할 말이 있어서입니다.”
“……할 말?”
“남 좋을 일을 해주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해야 내 속이 덜 답답할 것 같아서요.”
발레리안이 낮은 숨을 한번 내쉬었다.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사실 그는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로제타를 속상하게 한 놈. 아르문트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하였으나 그랬다간 로제타만 다시 회귀하는 꼴이리라. 발레리안은 또다시 깊게 숨을 몰아쉬며 이글거리는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애썼다.
“짐작하셨겠지만, 이전에 말했던 ‘소중한 사람’은 로제타입니다.”
이번에는 아르문트의 눈썹이 사납게 휘어졌다. 그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그 콧대 높은 대마법사가 자신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이유이니, 잊을 리가 없다. 발레리안은 자신이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며, 그 사람이 아르문트를 지지하기에 자신도 그러기로 했다고 밝혔었다.
-“저 붉은 머리 하녀를 제게 주십시오.”
돌연 모든 걸 알면서 자신을 농락했던 그때의 발언이 떠올랐다. 처음 본 관계인 것처럼 연기하며, 그가 모르는 사이 밀담을 주고받았을 둘을 상상하면 참을 수 없을 만큼의 불쾌감이 치솟았다.
“제가 전하의 편에 선 이유는 오로지 로제타 때문입니다. 즉, 로즈의 마음이 바뀐다면 저 또한 마음을 바꿀 거란 얘기죠.”
이제는 협박인가. 아르문트가 코웃음을 쳤다. 머리가 좋은 그는 대마법사가 얼마나 소중한 전력인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가 꿋꿋하게 살아남겠노라 다짐한 이유가 로제타인 이상, 지금 그에게 그런 전력 따위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안타깝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랑을 꾸며낼 생각은 없어.”
“아니. 꾸며내실 필요 없습니다.”
발레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로즈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으니까요.”
제게는 무척이나 아쉽게도. 낮게 덧붙인 그가 말을 이었다.
“전하를 지켜달라 그러더군요. 자신과의 관계와는 상관없이, 계속. 특히나 자신이 곁을 지킬 수 없는 지금은 더 확실하게요.”
발레리안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아르문트를 응시했다. 방만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었으나 아르문트는 차마 지적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고작 한 계절 동안 참 많이도 위험하셨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독이 든 차를 마시고, 호수에도 빠지고, 방에는 저주가 가득하고, 사냥제에선 암살자를 마주하기까지.”
아르문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발레리안의 말이 이어질수록 가슴이 갑갑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언급한 사례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발레리안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로제타는 항상 당신을 구했죠.”
독이 든 차를 대신 마신 것도, 망설임 없이 호수에 뛰어들어 그를 구해준 것도. 친구인 발레리안에게 부탁해 저주를 확인한 것도, 모두 로제타였다.
“심지어 당신이 로제타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때도요.”
빠득. 발레리안이 짧게 이를 갈았다. 로제타가 회귀한 것까지 포함하면 사례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도 잔뜩 있을 테고 말이다.
“그런데 전하는 고작, 거짓말 몇 개를 이유로 로즈를 울리다니.”
양심이 없어도 적당히 없어야지. 발레리안이 간신히 날 선 말을 삼켰다. 상대가 황태자이기 때문에 자제한 건 아니었다. 한번 제대로 터트리고 나면, 그 뒤로는 더 자제하지 못할 것 같아서 참은 것이었을 뿐. 아르문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이 그가 느끼는 혼란을 드러내는 듯했다.
‘이렇게까지 말해줬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그의 혼란 따위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발레리안은 하,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그렇다면 더한 것을 터트려줄 작정이었다.
“그거 아십니까, 전하?”
여우를 닮은 눈초리가 사르르 휘어졌다. 이를 발견한 리처드의 몸은 더욱 경직되었다. 경험을 통해 대마법사가 예쁘게 웃는 게 좋은 징조가 아님을 깨달은 탓이었다.
“자객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전하를 찾은 거. 저보다 로즈가 먼저였습니다.”
“……뭐?”
처음으로 아르문트의 입이 열렸다.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분명 그때 로제타는 대마법사를 따라왔다고 했었는데……. 아르문트는 당혹감이 가득 배어 있는 얼굴로 발레리안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발레리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곤 말을 이었다.
“정신을 잃은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로제타가 자객과 대치했다는 말입니다.”
아르문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이미 충분히 충격적인 말이었건만, 발레리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자객의 검에 등이 베였고.”
쿵.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정처 없이 마구 흔들렸다.
“전하는 남몰래 피를 줄줄 흘리고 있던 로즈를 두고 그냥 떠나가셨죠. 참으로 매정하게도 말입니다.”
발레리안이 아르문트를 죽일 듯 노려봤다.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도 부르르 치가 떨렸다.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여기까지만 해야 했다. 이미 로제타의 허락도 받지 않고 너무 많은 걸 말해버렸다. 더 나갔다간 호되게 혼이 날지도 모른다. 한편, 아르문트는 초점이 없는 눈으로 허공만 멍하니 응시했다.
“참, 들으셨나요, 전하? 제가 앞으로 우리 로즈를 건드리는 놈은 누구든 가만 안 두겠다고 선언한 거.”
“…….”
“그거, 전하도 포함입니다. 부디 잊지 말고 기억해두세요.”
발레리안은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협박한 후 홱 뒤를 돌았다. 제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이만 이곳을 떠날 심산이었다. 다만 곧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얼마나.”
발레리안이 짜증스럽게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시야에 황태자의 모습이 담긴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굳히고 말았다.
“얼마나, 다쳤지?”
시체의 것처럼 핏기 하나 없는 피부. 붉게 달아오른 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아슬아슬하고도 절박한 모습. 이 모든 것이 낯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황태자와는 그리 만남이 잦지 않았는데. 언제 저런 얼굴을 보았기에 낯설지가 않을까.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은, 괜찮은가?”
절로 숨이 막혀오는 분위기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도, 사냥제에서 보았던 로제타의 것과 너무도 비슷했다. 순간, 발레리안은 로제타에게서 완벽한 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치 투명한 벽이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로제타와 황태자가 있었다. 콰직. 작은 소리와 함께 발레리안의 손바닥에서 피가 터졌다. 그의 손톱이 강하게 피부를 파고든 까닭이었다.
‘그런 건 직접 물어보시죠.’
발레리안은 이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아무런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이미 로제타를 위한 인내도, 배려도 모두 끌어내 사용한 탓이었다. 오늘의 발레리안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렇기에 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발레리안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뎌 자리를 떠났다. 들어올 때도 그랬듯 공손한 인사말은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예상치 못한 인물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