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이번에는 내 파트너로2022.02.06.
“뭐? 말콤이……!”
바람 부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오는 새벽. 남몰래 방까지 찾아온 발레리안이 가져온 소식에 로제타는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너무 당혹한 나머지 지금이 한밤중이라는 것도 잊고 큰소리를 내고 만 것이었다.
“죽……?!”
다행히 발레리안이 그런 그녀를 제지해주었다. 텁!
“웁!”
하얗고 커다란 손이 로제타의 입을 빠르게 가로막았다. 로제타는 그제야 제 목소리가 지나치게 컸음을 인지하고 말을 멈췄다. 새벽 달빛만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어둠 속에서 두 남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로제타는 이해했다는 의미로 눈을 깜빡거리며, 그가 손을 떼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다소 답답했던 탓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물거리고 말았다.
“윽…….”
발레리안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다급히 손을 떼어냈다. 새벽이라 더 날카로워 보였던 얼굴이 빠르게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로제타가 이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래, 죽었어.”
물론 로제타는 이미 발견한 후였다. 얘는 왜 다른 사람 사망 소식을 전해주면서 볼을 붉히나. 그녀가 마음속으로 의아해했다.
“사망 시간은 한두 시간 전인 것 같고. 타살이야.”
“……감옥 앞을 기사와 마법사들이 지키고 있었을 텐데, 타살이라.”
“맞아. 심지어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느닷없이 피를 토하며 죽었어.”
발레리안이 피곤하다는 듯 앞머리를 쓱 쓸어넘겼다.
“아직은 기사단에서 조사 중이지만…… 내 생각에는, 흑마법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로제타가 작은 목소리로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문트의 방에서 저주의 흔적이 잔뜩 나왔던 것만 봐도 뻔했다. 흑마법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저주가 가득할 리도, 멀쩡하던 사람이 느닷없이 피를 토하며 죽을 리도 없다.
“……현장에 직접 가봐야겠어.”
로제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선언했다. 황후의 철저한 성격상 증거를 남겨두었을 확률은 낮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가능할까?”
“그럼, 오빠만 믿어.”
발레리안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느끼하다 욕할만한 행동에 대사였으나 그가 하자 천하의 잔망꾼이 따로 없었다. 다만 이미 이런 것에 익숙해진 로제타는 그를 냉정하게 무시하고 뒤를 돌았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잠옷을 벗어 던졌다.
“로즈!”
경악한 발레리안이 다급히 돌아섰다. 겨우 원상태로 돌아왔던 얼굴은 다시금 새빨개졌다.
“어떻게 내 앞에서……!”
“안에 다른 옷 입고 있거든. 그리고 우리 사이에 뭘 이 정도로.”
로제타는 한시가 바쁜데 별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한다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었다. 발레리안은 여전히 그녀에게서 뒤를 돈 채 침묵을 지켰다. 방금까지만 해도 장난스럽던 얼굴에는 이제 조금의 웃음기도 보이지 않았다.
*** 터벅, 터벅.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계단을 울렸다. 검은 망토를 걸친 발레리안은 홀로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정말 혼자는 아니었으니.
“전에도 그랬지만 이거 정말 신기하다.”
투명한 망토를 머리끝까지 덮어쓴 로제타가 그의 뒤를 따르며 속삭였다.
“네가 좋아하니 나도 좋아.”
발레리안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로제타는 그런 그의 이마를 가볍게 꽁 때렸다.
“그만 좀 뒤돌아봐!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네에.”
발레리안은 능청스럽게 대답한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참 계단을 내려가자 마침내 지하 감옥의 삭막한 풍경이 드러났다. 과거 로제타도 범죄자를 잡아넣으며 종종 왔던 곳이었다.
“아, 대마법사님. 오셨습니까.”
곧 발레리안을 발견한 기사 몇몇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살인 사건 때문인지 기사들이 여럿 모여 있었는데, 그중에는 발레리안을 향해 썩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추가적으로 발견한 건?”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시신은 보존 처리만 한 후 손대지 않았습니다. 직접 확인하시죠.”
“예. 그러죠.”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발레리안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주위를 둘러보며 명령을 내렸다.
“그럼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습니까?”
“예? 갑자기 무슨…….”
“저 혼자 살펴보려 합니다.”
“아…….”
기사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다른 이였다면 단호히 거절했을 부탁이었으나, 상대가 그 윈저프리드라면 말이 달라졌다.
‘어차피 대마법사는 황태자의 사람인 데다, 이상한 행동을 할 것 같지 않으니.’
그냥 비켜줘야겠다고 마음먹은 찰나, 뒤쪽에서 날이 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무리 대마법사님이라도 그건 안됩니다.”
아까부터 발레리안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고 있던 기사였다. 피부가 유난히 곱고 차림새도 화려한 것이 누가 봐도 귀족인 듯했다.
“경은…….”
발레리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긴 한데 이름이 기억나진 않았다. 일개 기사 하나하나 이름을 외우진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에르 스투어. 스투어 백작가의 장남이야. 모르트마르 백작가와 인연이 있지.”
투명망토 아래 숨어 있는 로제타가 그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속살거리는 모양새가 귀여워 발레리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투어 백작가의 피에르 경이었던가?”
“……그렇습니다, 윈저프리드 경.”
은근한 반말에 피에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출신도 미천한 것이. 그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몰락 귀족 주제에 제 능력만 믿고 잘난 체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 성을 언급한 것도 그의 출신을 은근히 짚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건 말건 발레리안은 로제타가 시키는 대로 말을 이었다.
“스투어 백작께선 평안하십니까? 듣자 하니 최근 담배 사업에 큰 문제가 생겼다죠. 머리가 복잡하시겠군요.”
동시에 피에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스투어 가문에서 제조하는 담배에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선 위험 물질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은 그 또한 최근에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아직은 최측근만 알고 있는 정보를 어떻게 이자가……!’
마법으로 도청이라도 한 것인가. 피에르는 발레리안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어떻게 알았든 간에 지금은 모르는 척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 제가 뭔가 착각했나 봅니다.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 원. 자꾸 실없는 소리를 하고 다니는군요. 자꾸 이러다 또 어디 가서 헛소리를 할지, 두려울 지경입니다.”
발레리안이 능글맞게 눈웃음을 지었다. 아르문트를 찾아간 어제에 이어 이틀째 협박을 자행하는 그였다.
“그래서. 잠시 비켜주겠습니까, 피에르 경?”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며 묻는 그의 주위로 은근한 위압감이 번져 나왔다. 결국 피에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다른 기사들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발레리안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방음 마법을 펼쳤다. 로제타는 이를 확인하고 나서야 망토 속에서 빠져나왔다.
“협박이 아주 수준급이던걸, 발레리.”
“협박이라니. 난 네가 알려준 대로 말했을 뿐인걸. 그런 정보를 다 알고, 대단해, 로즈.”
“대단할 것까진 없어. 그냥 회귀자의 몇 안 되는 이점이지, 뭐.”
나한텐 큰 쓸모 없지만. 로제타가 시큰둥하게 덧붙였다. 발레리안은 그런 그녀를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회귀를 통해 얻은 정보를 잘만 이용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습이 로제타다워서 참 멋있었다.
“어디 보자-.”
로제타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사건이 일어난 감옥 안으로 향했다. 가까이 갈수록 피 냄새가 진하게 났다. 곧 까만 피가 온몸에 묻어 있는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보존 처리도 한 까닭에 살아 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상태였다.
“시체는 아직 안 살펴봤댔지?”
“응. 그런 건 보통 마법사한테 맡기니까. 기사들은 손이 너무 거칠어서.”
“일반화하지 마, 이 얌체 같은 마법사야.”
둘은 가볍게 티격태격하며 사건 현장과 시신을 구석구석 살폈다. 죽은 사람쯤이야 전쟁하며 수도 없이 보았기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만 가득할 뿐이었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잠깐, 여기……!”
말콤의 목구멍 안에서 이상한 것을 찾아낸 것이었다. 로제타는 환한 얼굴로 목구멍 안에 박혀 있던 것을 단숨에 빼냈다. 발레리안이 지적한 대로, 다소 거친 손길이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녹색의 동그란 구슬이었다.
“이게…… 뭐지?”
“별다른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아 마력핵은 아닌 것 같고…….”
둘은 한참을 머리를 굴리며 구슬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예쁘고 반짝거리는 구슬이라는 것 뿐밖에는.
“도대체 왜 이런 게 시체 입안에 있던 걸까.”
이해가 안 가네……. 로제타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어쩌면 황후가 수사에 혼선을 주려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일단 따로 알리지는 않는 게 낫겠어. 아까 그 기사 놈 태도를 보니 수사 과정을 제대로 믿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이건 내가 가지고 있을게.”
“응. 그러는 게 나을 것 같네.”
로제타는 한숨을 내쉬며 발레리안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곤 일말의 희망이라도 찾기 위해 질문했다.
“말에서 나온 증거는 어떻게 됐어?”
“확보했어. 정확하게 루나베리 효과야. 다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해.”
발레리안 또한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인지 쯧 혀를 찼다. 1 황자가 루나베리를 몰래 사들였던 것을 밝히며 그를 범인으로 몬다면, 그레이한은 분명 모르는 일이라며 발뺌할 것이다. 물론 어떻게든 타격을 줄 수야 있겠지만, 그를 단번에 끌어내릴 정도의 증거는 아니었다. 어설프게 공격을 시도하느니 조금 더 증거를 모으고 한 번에 제대로 목을 꺾는 것이 더 현명할 테다.
“차라리 나한테 흑마법을 쓰면 좋을 텐데.”
로제타는 연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지금 그녀의 단계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긴 하나, 소드마스터에게는 흑마법을 파훼할 힘이 있다. 사악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흑마법의 경우, 일반적인 마법보다 그 흔적이 진하게 남는데, 이를 제대로 파악하고 파훼하는 경우 마법의 증거물이나 다름없는 마력핵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오늘처럼 그 흔적이 다 지워진 경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로제타는 차라리 그 흑마법사가 자신을 공격하여 그를 통해 증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아무리 너라도 흑마법에 제대로 맞서는 건 아직 위험해. 알잖아, 로즈. 기사가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은 최대한 마법을 피하고 빠르게 본체를 공격하는 게 일반적이야. 괜히 마법 자체를 파훼하려 하는 게 아니라.”
“응, 그야 그렇지만…….”
“위험한 생각 하지 마.”
발레리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심각해진 분위기를 느낀 로제타는 괜히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긴 하네. 만약에, 내가 전하보다 먼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또 시간이 돌아가려나? 아니면 네 마법 효과가 끝나려나?”
다만 안타깝게도 주제 선정이 썩 좋지 못했다.
“로제타 메이필드.”
드물게도 발레리안이 그녀의 풀네임을 불렀다. 아차, 실수했다. 로제타가 상황을 파악하고 그를 올려다 봤다.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차갑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비롯된 걸 알기에 로제타는 빠르게 사과의 말을 뱉었다.
“미안, 미안해 발레리. 그냥 한 말이었어. 응? 앞으로 안 그럴게.”
“…….”
“그으, 그보다 말이야. 상황이 이런데 내일 있을 연회는 그대로 진행하려나?”
로제타가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후. 낮은 숨을 내쉰 발레리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마 진행될 거야. 모르트마르 백작이 더는 미룰 수 없다고 난리를 쳐댔으니까.”
그는 얌전히 그녀의 의도에 넘어가 주었다. 늘 그랬듯, 로제타 한정으로는 배려심이 넘치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황태자의 축사도 그대로 진행할 것 같아.”
로제타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굳이 이런 때까지 그래야 하나. 마음 같아선 아르문트를 찾아가 말리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째 좀…… 불안하네.”
로제타가 잘근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물론 발레리안이 그녀를 대신하여 아르문트를 지켜줄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썩 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안하면.”
발레리안은 안절부절못하는 로제타를 빤히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같이 갈래?”
자꾸만 로제타가 그를 자극한 탓일까. 참아왔던 욕심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내 파트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