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누굴 괴롭혀?2022.02.10.
손끝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로제타가 고개를 들어 발레리안을 마주 보았다. 그는 어쩐지 긴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방금 화를 냈던 것의 연장선인지, 표정도 사뭇 진지했다. 그가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그녀는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발레리안과 함께 파티에 참석한다면 아르문트를 직접, 확실하게 지킬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의 반응이었다. 아르문트는 그녀가 발레리안과의 관계를 숨겼다는 사실에 무척 분노했었다. 심지어 둘의 관계를 친구가 아닌 다른 것으로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발레리안의 파트너로서 연회에 참가하는 것은 활활 타오르는 분노에 장작을 더 넣어주는 행동이나 다름없다. 특히 그가 직접 축사까지 하는 연회이니 더욱이 그랬다.
“이미 우리 관계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했잖아.”
발레리안은 로제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믿고, 안 믿고는 그놈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야.”
“그건 그렇지만…….”
조금 다른 문제 같은데. 로제타는 복잡한 마음에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르문트는 발레리안과 달리 그녀의 회귀 사실과 목적을 알지 못한다. 그런 이상 받아들이는 게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아르문트가 알고 보니 페이즐리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고, 그녀 모르게 단둘이 종종 만나기도 했으며, 막상 이를 들키니 그냥 친구 사이이고 다른 사정이 있다고만 둘러댄다면? 또, 이로 인한 화가 풀리기도 전에 페이즐리를 파트너로 끼고 제 앞에 나타난다면? 고작 상상만 했을 뿐인데 속이 부글거렸다. 아무 죄 없는 페이즐리에 대한 질투가 순간 솟구쳤다. 역시 사람은 상대 입장에서도 생각해봐야 해. 로제타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모든 걸 고려했을 때, 아무래도 양심상 파티에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결심이 서려는 찰나, 발레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결국 황태자 놈을 지키는 거, 아닌가?”
로제타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맞는 말이었다. 로제타가 회귀한 이유는 아르문트를 살리기 위해서다. 그와 연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니 그녀는 아르문트의 안전을 위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비록 아르문트의 오해가 더 깊어진다고 해도, 혹은 그가 자신을 지금보다 더 싫어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차갑게 가라앉은 황금빛 눈동자를 떠올린 로제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잠시 두 눈을 감고 침묵하더니, 곧 마음을 정리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말이 맞아. 연회에 같이 가자, 발레리.”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애써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저리듯 아파져 오는 탓에 차마 밝은 웃음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이를 본 발레리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아까 생긴 상처로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분명 자신이 의도한 방향대로 흘러갔거늘, 이상하게도 영 속이 쓰렸다. 로제타의 결정이 오로지 아르문트를 위한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일순 그녀와 황태자의 얼굴이 또다시 겹쳐 보였다. 몇 시간 전, 절박한 얼굴로 로제타의 안부를 물어오던 그를 떠올리니 기분이 처참하게 가라앉았다. 다만 발레리안은 이러한 사정을 로제타에게 티 내지는 않았다. 황태자를 만나고 온 것도, 그녀가 다쳤다는 말에 황태자의 얼굴이 무너졌던 것도. 그 무엇도 알릴 생각이 없었다. 이미 그로선 로제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이 이상은 무리였다. 그렇기에 발레리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생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일 끝나면 연구실로 와. 내일 입을 드레스는 내가 미리 준비해놓을 테니까.”
“응? 새 옷까지 사려고?”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로제타가 고개를 갸웃하며 덧붙였다. 아직 한 번도 안 입어본 드레스가 옷장에만 여러 벌이었다. 그러자 발레리안은 불만스럽다는 듯 한쪽 눈썹을 휘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럼 설마, 다른 놈이 준 옷을 입고 내 옆에 서려고 했어?”
“크흠, 흠…….”
로제타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생각해보니 방금 떠올린 드레스들 모두 아르문트가 사준 것이었다. 그걸 입고 발레리안의 파트너로 참석한다면, 아마 아르문트는 더욱 화가 날 테다. 그녀는 이것조차 고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민망해져 괜히 다른 소리를 했다.
“그런데 미리 사둔다니.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고…….”
“로즈, 너에 대한 거라면 뭐든 알고 있어.”
발레리안이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로제타는 질린 표정을 지으며 그를 타박했다.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말하니까 더 변태 같거든.”
“응, 맞아, 변태.”
우리 로즈 한정으로. 그가 잔망스럽게 덧붙였고, 로제타는 그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내일 치 일까지 몽땅 해결하고 발레리안의 연구실로 향한 로제타는 그가 준비해둔 드레스를 입어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허리는 물론, 어깨와 골반, 심지어는 가슴 쪽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녀의 몸에 정확히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직접 재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진짜 변태일지도 몰라.’
앞으론 멀리해야겠다. 로제타는 뿌듯하게 웃어 보이는 발레리안을 사납게 흘겨보며 다짐했다. 그래도 하루 내내 일이 많았던 탓인지, 혹은 발레리안의 변태 같은 장난이 그녀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준 덕인지, 내일에 대한 걱정은 조금이나마 제쳐둘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갔다.
*** 연회 날의 새벽. 아직 해도 다 떠오르지 않은 시간, 아르문트가 눈을 떴다. 곧 낯설고도 익숙한 감각이 그의 온몸을 장악했다. 왜 이렇게 몸이 피곤하고 욱신거리는가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침대가 아닌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주위를 확인했다.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갈기갈기 찢어져 허공에서 대롱거렸고, 소파 쿠션은 온통 다 터져 있었으며, 탁자는 반쯤 부서져 그 잔해가 하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바닥이 하얀 이유는 간단했다. 찢어진 베개와 쿠션에서 나온 솜과 깃털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내리자 손톱이 깨져 손가락 군데군데 피가 굳어 있는 게 보였다. 광증이 또다시 발현했던 모양이었다. 아르문트는 질끈 눈을 감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을 옮기고, 테오도르 신관에게 치유를 받은 후로는 한동안 괜찮았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또다시 증세가 심해진 듯했다.
‘얼마나 난리를 쳐댔으면. 피곤하군.’
한숨도 자지 못한 것처럼 머리가 무거웠다. 몸은 몇 시간 동안 훈련을 한 것처럼 힘이 없었다. 이 정도의 피로감을 느낀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했더니, 한 가지 달라진 점이 떠올랐다.
‘로제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증이 발현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로제타가 빠르게 다가와 그를 제압해주었다. 덕분에 그는 쓸데없는 체력 소모 없이 빠르게 잠이 들 수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로제타는 다음 날 아침부터 바쁘게 일을 해야 하는데도 그를 신경 쓰느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아르문트는 새삼 지금까지 로제타에게 얼마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당연시했다는 것 또한,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로제타는 항상 당신을 구했죠.”
-“그런데 전하는 고작, 거짓말 몇 개를 이유로 로즈를 울리다니.”
어제 대마법사가 했던 말이 잔상처럼 남아 귓가를 맴돌았다.
-“정신을 잃은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로제타가 자객과 대치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결국 자객의 검에 등이 베였고, 전하는 남몰래 피를 줄줄 흘리고 있던 로즈를 두고 그냥 떠나가셨죠.”
특히, 이 말은 잠들기 직전까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다시금 속이 꽉 막혀왔다. 짙은 분노에 가려졌던 죄책감과 걱정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늘, 연회가 끝나면…….’
무언가 다짐하려던 바로 그 순간, 눈치 없는 누군가가 이를 방해했다. 방문 너머로 리처드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그의 기척을 읽은 모양이었다. 아르문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금 주위를 살폈다. 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다면, 분명 리처드에게도 기척이 느껴졌을 테다. 제 비정상적인 상태가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때마침 새벽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이성을 잃은 그는 제 옆에 로제타가 없음에 흥분하여 주위 물건을 마구 부숴대기 시작했다. 태피스트리를 찢고, 의자를 던지고…… 짐승이 따로 없는 꼴이었다.
-“전하!”
커다란 소리에 깜짝 놀란 리처드는 혹 자객이 들었나, 하는 의심에 곧장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것은 방 한가운데 서서 눈을 번뜩이고 있는 아르문트뿐이었다. 광증 상태의 아르문트는 과거 로제타에게 그랬듯 제법 멀쩡한 척 대화를 했다.
-“꺼져.”
-“예, 예. 죄송합니다.”
대화라기에는 다소 짧은 감이 있긴 했다. 로제타에게 한 것과 달리 매우 사납기도 했고 말이다. 어쨌든 리처드는 아르문트를 ‘이별의 아픔을 파괴적인 방법으로 푸는 중인 미친놈’ 정도로 보는 듯했고, 그 외의 의심은 사지 않았다. 아르문트는 낮은 한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경. 어제는 못 볼 꼴을 보였군.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제가 감히…… 실례했습니다.”
아르문트가 문을 열고 사과하자 리처드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사과를 들을 줄은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청소할 하녀를 불러주겠나. 아침은 생략하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아르문트는 대답을 들은 후 다시 문을 닫았다. 그는 방을 청소하는 동안이라도 잠을 청하려 했으나, 도무지 불가능했다. 로제타가 할 때와는 달리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를 흘끔대는 하녀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꼭 자신이 로제타를 만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결국 그는 날이 완전히 밝고, 하녀들이 연회용 옷을 가져올 때까지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안 그래도 예민하던 그의 성질머리가 폭발한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네? 그야, 입혀드리려고요!”
연회용 옷을 가져온 금발의 하녀, 이졸데가 아르문트를 향해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어찌 보면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순박한 미소. 누군가를 흉내 낸 것이었다. 그게 누구인지야 뻔했다. 말문이 막힌 아르문트는 차가운 눈빛으로 이졸데를 응시했다. 이졸데는 제 미래도 모르고 방긋방긋 웃어대기 바빴다.
“앞으로는 제가 도와드릴게요! 헤헤, 걱정 마세요!”
이렇게 바보처럼 굴면 이번에는 내게 관심을 주겠지. 이러한 속마음이 너무도 뻔히 보이는 모습에 근처에 서 있던 리처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졸데는 뻔뻔스러운 태도로 아르문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탈의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대와 전혀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어이가 없군.”
타악! 아르문트가 그녀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는 제 손에 더러운 것이 닿기라도 한 것처럼 미간을 구겼다.
“두 손 잘릴 각오 정도는 하고 한 짓이겠지?”
서늘한 목소리가 방을 울림과 동시에 사나운 기운이 빠르게 퍼져 나왔다. 숨이 턱 막혀올 정도의 위압감. 당장이라도 자신을 짓뭉개 죽일 것 같은 살벌한 기세에 이졸데는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몸만 벌벌 떨어댔다. 로제타에게 보여주던 따스하고도 다정한 태도 때문에 잠시 잊고 말았다. 눈앞의 사내가 바로 ‘그’ 황태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졸데는 구명줄을 찾듯 시선을 돌려 리처드를 바라보았다. 사용인들에게 제법 친절한 그이니, 어쩌면 자신도 도와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었다. 리처드는 냉정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그때, 예상 밖의 사람이 등장했다.
“전하!”
활발한 목소리로 아르문트를 부르며 방에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러크였다. 리처드와 함께 아르문트를 호위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어라? 뭐 하시던 중이었어요?”
살았다. 자신을 옥죄던 기운이 옅어진 것을 느낀 이졸데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평소 그토록 무시하던 러크 경이었으나 지금은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러크는 해맑은 얼굴로 그녀에게 더 큰 고난을 선사했다.
“어! 저 여자! 저번에 로제타 괴롭힌 걔 아닙니까?”
러크가 이졸데에게 삿대질하며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다만 말하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리처드가 전하껜 말하지 말고 따로 도와주자 했었는데……!’
러크는 황급히 리처드와 아르문트의 눈치를 봤다. 리처드는 반쯤 체념한 듯 눈을 질끈 감았고, 아르문트는…….
“……누가.”
전에 없을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누굴, 괴롭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