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로제를 만나야겠어2022.02.13.
러크는 빠르게 리처드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떻게 해야 하냐며 도움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리처드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음에도 애써 모른 척했다.
‘이 멍청한 자식이……!’
그가 속으로 거친 욕설을 중얼거렸다. 이미 제 입으로 몽땅 다 불어놓고, 이제 와 자신을 쳐다보면 뭐 어쩌란 말인가. 자신 또한 이 일을 함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이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문트는 러크의 행동만으로 이미 많은 것을 알아차렸다. 조각상처럼 수려한 얼굴이 더욱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주위를 맴도는 기운 또한 한층 무거워졌다.
“당장 말해.”
아르문트가 한 단어 한 단어 짓씹듯 뱉어냈다.
“지금까지 내게, 뭘 숨겼는지.”
“그, 그, 그게요 전하…….”
러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마구 더듬었다.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이 퍽 어리숙해 보였다.
‘저대로 두었다간 상황만 더 악화시키겠군.’
리처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말을 해도 어 다르고 아 다른 법. 러크가 헛소리를 하게 두느니 차라리 자신이 설명하는 게 나으리라.
“사실.”
그는 이후 아르문트에게 벌을 받을 걸 각오하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사냥제 이후로 로제타 양이 사용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해왔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최대한 저희 선에서 처리하려 했습니다만…… 듣자 하니 안 보이는 곳에서 계속 로제타 양을 괴롭힌 듯합니다.”
“……어떤 식으로 괴롭혔지?”
“그건…….”
이번에는 리처드도 대답을 망설였다. 다음 말을 뱉으면 아르문트가 격분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각오는 했다지만 두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예상외로 아르문트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이졸데를 응시했다.
“말해 봐.”
높낮이에 변화가 크지 않아 언뜻 들으면 차분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녀를 향한 눈빛과 분위기는 전혀 차분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나.”
“힉……!”
커다란 손이 압박하듯 그녀의 어깨를 쥐자 이졸데는 반사적으로 몸을 잔뜩 움츠렸다. 괴물.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단어 하나를 떠올렸다. 사람 같지 않은 얼굴로 황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는 황태자의 모습은 괴물이라는 표현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았다.
“저, 저, 저는 정말 모르는 일…….”
“얌전히 부는 게 나을 텐데.”
당장 손가락이 뽑히기 싫다면. 이졸데가 그의 눈빛에서 다음 말을 읽어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팔다리를 벌벌 떨어댔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마치 저 괴물이 제 목을 꽉 조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이 날 것 그대로의 살기를 감당하기는 불가능했다.
“말해.”
짧은 한마디였으나 이졸데는 이것이 최후통첩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정말 목이 달아나리라. 그렇기에 그녀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제 죄를 고했다.
“으, 음식물쓰레기를 부었어요! 구정물도 뿌렸고, 음식에는 벌레도 넣어놨어요. 창고에, 창고에 가두기도 했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리처드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들었던 것보다 괴롭힘의 수준이 훨씬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죄송, 죄송해요, 전하……! 그치만 저희가 원해서 한 게 아니었어요. 사실 버틀러 영애께서 따로 시켜서……!”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들려왔다.
“……애슐리 버틀러?”
라트랑제 의상실에서부터 로제타에게 무례하게 굴던 여자였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황실의 사용인들에게 압박을 넣다니. 그 여자가 정말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다.
“네, 네! 그 사람이요. 저희는 정말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에요!”
이졸데는 비굴하게 허리를 굽혀 빌었다. 어쩌면 이로써 제 죄가 참작될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으며.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르문트는 그리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경.”
“예, 전하.”
특히, 로제타가 관련된 일에 관해서는.
“데려가서 처리해. 관련된 놈들 모두.”
“알겠습니다.”
“저, 전하! 잠시, 잠시만……!”
이졸데가 비명을 지르듯 그를 불렀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요! 살려만……!”
“러크 경. 경도 나가보게. 이제 할 일이 많을 것 같으니.”
“예, 전하!”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를 철저하게 무시하며 러크에게 명령했다. 러크는 이 험악한 자리에서 도망갈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졸데는 리처드의 손에 끌려나갔다. 이졸데 말고도 많은 사용인들이 난데없이 기사들에게 붙잡혀 사라졌다. 정확히 어느 곳으로 끌려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좋지 못한 꼴을 당하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아르문트는 허공을 응시하며 느릿하게 셔츠 단추를 잠갔다. 음식물 쓰레기, 구정물, 벌레……. 이졸데가 말한 것들이 하나하나 그의 피부를 찔러댔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아르문트는 붉은 입술을 짓씹으며 원망하듯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정작 자신은 로제타에게 대화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투둑! 힘을 너무 줬는지 단추가 뜯어져 버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잠근다고 잠근 것도 잘못 끼워져 있었다. 언제부터 잘못 끼운 건지 차마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 순간, 불현듯 기억이 떠올랐다. 사냥제 날. 지금과 비슷한 시간, 바로 이 장소에서. 로제타는 정성스러운 손길로 그의 단추를 잠가주었다. 발갛게 볼을 붉히며 웃던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가 귀를 울렸다.
-“사냥제가 끝나고 며칠 뒤에, 파티가 열리는 것 알고 있나?”
-“네. 저번 연회보다는 작은 규모라고 알고 있어요.”
로제타에게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이 좋았었다. 제 가슴께를 매만지는 손길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때도 파트너로서 함께해주겠나?”
-“물론이죠, 전하. 절 두고 다른 여자랑 가시려고 했어요?”
-“그럴 리가.”
장난스럽게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오늘, 연회가 끝나자마자.’
아르문트는 셔츠 옷깃을 거칠게 잡아 쥐며 다시금 다짐했다. 한때 로제타가 서 있던 곳을 응시하는 시선은 새벽의 것보다 한층 더 확고해져 있었다.
‘로제를 만나야겠어.’
그러나 이때의 아르문트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바람과 달리 연회가 끝난 뒤에는 로제타와 대화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곧장 그녀를 찾아가지 않은 지금 이 순간을, 오래도록 후회하리라는 것 또한 말이다.
*** 연회장에는 제법 이른 시각부터 손님들이 찾아왔다. 사냥제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한동안 공식적인 파티가 없었던 만큼, 이번 연회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진 까닭이었다. 심지어 이번 연회의 경우 황후는 병석에 누운 황제를 보필해야 한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는다 했다. 따라서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를 즐길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귀족들의 발길이 연신 이어졌다. 애슐리와 그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음식물쓰레기까지 뒤집어썼다지 뭐예요. 얼마나 역겨울지, 상상이나 가시나요?”
애슐리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얘기하는 얼굴에는 조롱기가 가득했다.
“세상에, 끔찍해라. 제발 같은 귀족으로 싸잡히지만 않으면 좋겠네요.”
“영애! 같은 귀족이라뇨, 무슨 말씀을. 그렇게 비루한 가문도 귀족으로 치나요?”
“어머, 제가 실수했네요.”
애슐리 주위의 귀족 영애 둘은 재밌는 농담을 한 것처럼 꺄르륵 웃음을 뱉었다. 다만 그러면서도 은근히 주위를 살피는 건 잊지 않았다. 혹 저번처럼 페이즐리가 듣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한편 애슐리는 그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뿌듯하게 웃었다. 사실 그녀는 저번 파티 이후로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자신을 따르던 영애들이 페이즐리의 눈치를 보며 떠나가기도 했거니와, 또 몇몇은 몰래 로제타의 드레스를 만든 의상실을 찾으려 하다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로 현재 애슐리의 곁에는 저번에 비해 훨씬 적은 숫자의 추종자만이 남았으나, 그녀는 배신자가 걸러지고 진국인 사람만 남았으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며 자위하였다. 정작 그들은 애슐리의 가문인 버틀러와 사업상 관계가 있어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저 좋을 점만 보는 애슐리에게는 이를 알 길이 없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이 황태자의 입장을 알리자 시끄럽던 연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애슐리 또한 말을 멈추고 문 쪽을 응시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아르문트는 저번과 달리 파트너 없이 홀로 등장했다. 황태자의 정부랍시고 기세등등하던 그 하녀를 내쳤다더니, 입수한 정보가 사실인 모양이었다.
“전하!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 제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난다긴다하는 이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귀족이 빠르게 아르문트에게 밀려들었다. 그중에는 애슐리의 아버지인 버틀러 백작도 있었다. 우습게도 아르문트의 인기는 사냥제 이후 더 치솟았다. 황제가 공식 행사에서 각혈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언제 갑자기 황제가 승하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현재 계승 서열이 가장 높은 아르문트에게 미리 줄을 대는 귀족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모르트마르 백작가의 권세가 상당한 이상 여전히 1 황자의 편에 선 귀족이 더 많기는 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비율이 상당히 달라졌다. 특히, 아직 결혼하지 않은 딸을 둔 귀족들은 자신이 황제의 장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아르문트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기 바빴다. 귀족 영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빛 좋은 개살구쯤으로 불릴 때도 인기가 많던 그였으니, 지금은 오죽할까. 정부를 아낀다는 소문이 자자하긴 했지만, 그쯤이야 큰 문제도 아니었다. 다들 미래의 황후가 되고 싶어 그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잠시 실례하지.”
아르문트는 인파를 뚫고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데 실패한 귀족들은 아쉬운 얼굴로 그의 뒷모습만 쫓았다. 그리고 아르문트가 가는 방향의 끝자락에는 세 명의 여인이 서 있었으니. 바로 애슐리와 두 친구였다.
“저, 전하가 왜 제 쪽으로 오시는 거죠?”
애슐리의 옆에 서 있던 여인, 마가렛이 얼굴을 붉히며 속삭였다. 애슐리는 코웃음을 쳤다. 황태자 전하가 고작 바르가스 자작가의 차녀를 만나러 올 리가 없지 않나. 이 중에서 그의 관심을 받을만한 지위와 외모의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의 관심이 지나치게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황태자를 잘 구슬려보라며 땍땍거리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나쁜 일은 아닐 터다. 마침내 아르문트가 애슐리의 앞에 우뚝 섰다. 애슐리는 마가렛에게 거 보라는 듯 웃음을 흘리며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애슐리 버틀러.”
낮은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태자를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본 적은 처음이었다. 잘생겼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막상 시선을 마주하니 민망함에 입술을 떼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그녀는 절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대를 황태자 시해 혐의로 구속하겠다.”
“……네?”
잘못 들은 건가? 애슐리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르문트는 대답 대신 턱짓을 했다. 그러자 주변에 서 있던 황실 기사들이 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붙잡았다.
“자, 잠시만, 이게 뭔……!”
“전하! 제 딸에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버틀러 백작이 황급히 달려와 언성을 높였다.
“황태자 시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제 딸이 어째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버틀러 영애가 황태자궁의 사용인들을 매수하여 모의한 사실을 확인했네. 이것이 시해 목적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나?”
“예? 매수라니요?”
그럴 리가 없다고 주장하려는 찰나, 리처드의 손에 붙잡혀있던 애슐리에게서 억울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니에요! 매수한 건 맞지만, 그건 전하를 시해하려 한 게 아니라-!”
동시에 버틀러 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시해 목적은 아니었다며 열심히 더 주장했으나 이미 빌미는 잡힌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