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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희생하다 (101/145)

101화. 희생하다2022.02.17.

피식. 아르문트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16549584102956.jpg“본인이 이렇게 시인하는데. 더 반박할 셈인가?”

버틀러 백작은 입술을 꾹 깨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제 딸이 제 입으로 매수 사실을 밝힌 이상,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넘어가고 이후 최대한 시해 의도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게 현재로선 최선이었다. 아르문트는 그를 향해 생긋 미소 짓더니,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16549584102956.jpg“그대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어쩌면 오해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다만 황태자궁의 사용인들을 매수한 것이 확실한 이상, 취조는 피할 수가 없네. 영애는 최대한 정중히 모실 테니, 너무 염려 말고. 자세한 이야기는 연회가 끝난 다음에 하지.”

16549584102969.jpg“……예, 전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16549584102956.jpg“자, 이만 모셔 가.”

아르문트가 재차 턱짓하자 기사들이 애슐리의 팔을 붙잡고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16549584102969.jpg“이것 놔! 놔! 아버지, 아버지! 도와주세요!”

애슐리는 처절할 정도로 발버둥 쳤으나 소용은 없었다. 버틀러 백작도, 그녀의 친구들도 모두 그녀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한편 다른 귀족들은 동그란 눈으로 애슐리를 흘끔거렸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긴 했지만 다들 몹시 우스워하는 기색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연회장에서 황실 기사들에게 연행되는 백작 영애라니. 안 그래도 남 물어뜯는 데 혈안인 귀족들에게 이만한 가십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모습을 보인 이상, 재판 후 무사히 풀려난다고 하더라도 최소 몇 년은 사교계에 얼굴을 들이밀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계획한 아르문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16549584102956.jpg“내가 분위기를 흐린 것 같군. 그럼 이제 슬슬 연회를 제대로 시작해볼까.”

아르문트가 가볍게 손짓하자 악단이 눈치껏 연주를 시작했다. 귀족들은 방금의 소란은 금세 잊고 다시 황태자에게 어떻게든 말을 붙여보려 했다. 아르문트는 이에 적당히 대꾸하며 중간중간 문 쪽을 바라보았다.

16549584102956.jpg‘늦게도 오는군.’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1 황자 그레이한이었다. 형식상 축사를 시작하려면 모든 황족이 참석한 상태여야 하는데, 이를 아는 그레이한이 일부러 늦장을 부리는 듯했다. 사람 짜증 나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아르문트가 불만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얼른 축사를 끝내고, 먼저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그러곤 곧장 로제타를 찾아갈 심산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태산같이 많았다. 대마법사의 말대로 정말 다쳤는지, 괴롭힘을 당했다는데 몸은 괜찮은 건지. 자신을 향한 마음만은 진심이었다는 말은, 정말인지. 아니, 이것들도 모두 중요하긴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16549584102956.jpg‘미안해.’

그녀를 위험한 사냥터에 홀로 두고 가버린 것.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몰아붙여 자신에게 그런 애원의 말까지 하게 만든 것. 아무리 실망했다고 한들, 제대로 대화조차 하지 않고 쉬이 관계를 저버린 것. 이 모든 것에 대해 먼저 사과를 해야만 한다. 제 분노를 삭이고 제 잘못을 인정하는 데까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를 알기에 아르문트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찾아가고 싶어 마음이 조급했다. 때마침 입구에 서 있던 시종이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는 게 보였다. 누군가 곧 입장하려 한다는 신호였다. 그레이한 말고는 더 올 사람이 없었기에 아르문트는 시큰둥한 눈빛으로 문 쪽을 응시했다. 그러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린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잔을 툭 떨어트리고 말았다.

16549584102969.jpg“대마법사 윈저프리드 경과, 그 파트너이신 메이필드 남작 영애께서 드십니다!”

그가 아는 메이필드 남작 영애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곧 커다란 문이 열리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마법사 로브를 우아하게 펄럭거리며 걷는 발레리안과, 그런 그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고 있는 로제타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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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제타는 몸의 굴곡이 여실히 드러나는 실루엣의 은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야하기보단 우아하면서도 기품있는 느낌이었다.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를 한쪽으로 넘기고 기다란 속눈썹을 팔랑거리는 모습이 몹시 아름다웠다. 예상 밖의 조합에 귀족들이 빠르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황태자의 정부와 대마법사가 파트너로 참석하다니. 심지어 황태자의 표정을 보아 그는 이를 몰랐던 눈치다. 당연하게도 속닥거리는 목소리는 커졌고, 일부는 아르문트의 얼굴을 흘끔거리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16549584102956.jpg‘왜, 그대가 이 자리에…….’

아르문트는 평소와 달리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이 큰 까닭이었다. 로제타가 대마법사의 파트너로 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도, 자신과 함께 참석하자 얘기했었던 이 연회에. 괜한 억측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 가정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로제타가 대마법사와 마음이 통했다는, 그런 끔찍한 가정이었다.

16549584102956.jpg‘내가, 너무 늦장을 부려서.’

아르문트의 시선이 연약하게 흔들렸다.

16549584102956.jpg‘그래서…… 마음이 변했다면.’

그리하여 자신에게 이를 알려주려고 이곳까지 온 거라면. 그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날카로운 이가 입안의 여린 살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이 자리에서 그녀를 곤란하게 할 수는 없다. 이리저리 튀는 마음을 어떻게든 다잡아야만 했다. 피식. 그리고 발레리안은 그런 그를 응시하며 짧게 웃음을 흘렸다. 만족감이 가득한 미소였다.

16549584132669.jpg“발레리, 너 이상한 짓 하지 마.”

로제타가 이렇게 속삭이며 팔꿈치로 그의 허리를 쿡 찍었다. 발레리안이 아르문트에게 비웃음을 던지는 장면은 보지 못했으나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한 그녀였다.

16549584132674.jpg“안 해, 안 해. 얌전히 굴기로 약속했잖아. 걱정 마.”

발레리안은 순진한 척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눈웃음을 짓는 모습이 능청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또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기에 다른 사람에게 대화 내용이 들리진 않았지만, 발레리안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로제타에게 속닥거리는 모습만으로도 귀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16549584102969.jpg“윈저프리드 경! 오랜만입니다, 허허.”

마침 근처에 서 있던 바르가스 자작이 슬그머니 다가가 발레리안에게 말을 붙였다.

16549584102969.jpg“경이 파트너를 데려오시는 건 처음 보는군요.”

16549584132674.jpg“아. 로즈가 드디어 관계를 밝혀도 된다고 허락해줘서.”

발레리안이 해사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그것도 매우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한 방식으로. 로제타는 그를 사납게 한번 노려보며 남들 몰래 발을 밟았다. 그것도 제법 아프게. 윽. 빠르게 마법을 사용하여 제 발등을 보호한 그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하마터면 발뼈가 조각날 뻔했다.

16549584102969.jpg“……실례지만, 어떤 관계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바르가스 자작은 눈치껏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을 물어주었다. 덕분에 주위의 시선이 더욱 집중됐다. 아르문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또한 긴장한 것이 역력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발레리안의 입에서 연인이라는 말만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모두의 관심 속에 발레리안은 나긋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16549584132674.jpg“아주 긴밀한 관계죠.”

16549584132669.jpg“친구! 친구예요. 가족 같은 친구 사이!”

로제타가 목소리를 높여 그의 헛소리를 차단했다. 그러나 이미 들을 사람은 다 들어버린 후였다. 그 증거로 술렁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16549584102969.jpg“들었어?”

16549584102969.jpg“긴밀한 관계래.”

16549584102969.jpg“세상에 그럼 전하는 어떻게 된 거야?”

빼어난 청력을 소유한 로제타는 이런 속닥거림까지 모두 들어야 했다. 그녀는 발레리안을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6549584132669.jpg“흐지 말라그 흐쓸튼드…….”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발레리안은 그 의미를 단박에 알아들었으면서 못 알아들은 척 고개만 갸웃거렸다.

16549584132674.jpg“으응? 뭐라고 하는 거야, 우리 로즈?”

16549584132669.jpg“제발 그 주둥이 좀 다물어.”

그들의 곁에서 대화 내용을 훔쳐 들은 바르가스 자작은 콧김을 훅훅 내뿜었다. 올해 최고의 스캔들을 눈앞에서 직접 보다니! 그는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질문을 이었다.

16549584102969.jpg“그, 긴밀하다는 것은 혹-.”

16549584102969.jpg“1 황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그러나 눈치도 없는 그레이한이 하필 지금 입장한 탓에 대화가 끊기고 말았다. 그레이한은 화려한 패션으로 유명한 발레리안보다도 더 휘황찬란한 옷을 걸치고 연회장에 발을 들였다. 아름다운 황후의 유전자 덕에 그 또한 나름 미형의 외모를 지녔기에 아주 안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치장이 어찌나 과한지 꼭 신년 파티 정도로 커다란 행사에 참석한 것만 같았다. 얼마 전부터 복장에 신경 쓰기 시작한 제 동생을 의식하여 다소 지나치게 멋을 부린 까닭이었다. 그레이한은 오늘 자신의 모습이 무척 돋보이리라 기대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게 웬걸,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그를 주목하는 것이 아닌가. 실상은 그의 등장 탓에 대마법사와 황태자의 정부의 은밀한 관계에 대해 더 들을 수 없게 되어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사정을 알 리 없는 그레이한은 오만하게 웃으며 아르문트 쪽으로 향했다.

16549584162869.jpg“미안, 동생님. 내가 좀 늦었지. 오늘따라 폐하께서 나를 자주 찾으셔서 말이야.”

16549584102956.jpg“……이만 축사를 시작하지.”

그레이한이 기다렸다는 듯 빈정거렸으나 아르문트는 언제나 그랬듯 무시로 일관했다. 애초에 지금은 그의 시비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온정신이 로제타와 발레리안에게만 쏠려 있는 탓이었다. 그는 축사를 진행할 단상 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는 얼른 로제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어떻게든 빠르게 끝내고자 했다면, 지금은 연인처럼 함께 서 있는 둘의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워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곧이어 정석 그대로의 축사가 시작되었다. 그다지 흥미로운 내용은 아니었으나,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 서서 말하는 황태자의 모습이 엄숙하고도 아름다워 절로 시선을 잡아챘다. 반짝거리는 조명 탓인지 그가 더욱 빛나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귀족들은 축사가 진행되는 동안 중간중간 발레리안을 흘끔거렸고, 발레리안은 제 옆에 선 로제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그들에게 빌미를 더욱 제공해주었다. 한편, 로제타는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아르문트를 응시했다. 그때 후원에서 헤어진 후로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쩐지 얼굴이 더 퀭해 보였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기색이었다.

16549584132669.jpg‘설마 광증이 또 발현한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실제로 그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 유독 더 광증이 튀어나오곤 했으니까. 로제타는 행여나 아르문트가 쓰러지기라도 할까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그렇게 약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이상하게 오늘은 영 감이 좋지 않았다. 꼭, 사냥제 날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몇 분 뒤. 축사가 거의 마무리 될 무렵. 그녀의 눈에 이상한 것이 감지되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무도 건드리지도, 바람이 불어온 것도 아닌데도. 피부가 빳빳해질 정도로 오싹한 기운. 흑마법이었다. 대마법사인 발레리안보다도 더 먼저 이를 감지한 로제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도약했다.

16549584189104.jpg“전하!”

황실 소속의 기사들은 갑작스럽게 뛰어나와 아르문트에게 달려드는 로제타의 행동을 공격으로 간주하고 다급히 검을 뽑아 들었으나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 로제? 아르문트 또한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이름을 입술 위에 머금었다. 로제타는 설명도 없이 그를 강한 힘으로 밀쳐냈다. 그 순간. 다른 이들 또한 그제야 발견하고 말았다. 몇천 개의 크리스털이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럽게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16549584132674.jpg“로제타!”

발레리안의 비명 같은 외침을 마지막으로 거대한 샹들리에가 로제타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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