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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그것이 연정이었음을 (102/145)

102화. 그것이 연정이었음을2022.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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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이 아득했다. 물속에 잠겨있는 것처럼 시야가 희미했고 소리는 윙윙거렸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탓인지 어지럽기까지 했다. 귀족들의 비명이 온 곳에서 난무하는 때, 아르문트는 반쯤 멍한 얼굴로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제 주위를 둘러싼 기사들이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너무 머리가 아파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뜨거운 숨만 뱉어냈다. 어디에 베였는지 피부는 따끔거렸다. 그러나 곧 어두운 시야 위로 그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여름 장미를 닮은 붉은색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모습.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로제타의 절박한 얼굴.

16549584265314.jpg‘로제타.’

그녀를 떠올리자 절로 눈이 떠졌다. 아르문트는 방금까지 그를 괴롭히던 두통도, 어지럼증도 모두 까맣게 잊고 당황한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그리고 곧 기사들 사이로 방금 자신이 서 있었던 단상의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떨어져, 사방으로 크리스털과 유리가 조각나있는, 그 참상이. 그리고 그 아래에는 하얀 팔 한쪽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형태의 팔이었다.

16549584265314.jpg‘꿈인가.’

아르문트가 멍한 눈으로 하얀 팔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꿈인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빌어먹게도 지독한 악몽. 그래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저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 자신을 대신하여 깔린 사람이 정말 로제타가 되어버리니까. 이내 바닥에 툭 떨구어 두었던 손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닿았다. 천천히 시선을 내려 아래를 바라보자 붉은 액체가 보였다. 샹들리에 쪽에서부터 길게 이어져 흘러온 것. 로제타의 피였다. 이를 깨달은 순간 현실감이 지옥처럼 밀려들었다. 동시에 주변의 소리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16549584265321.jpg“전하! 괜찮으십니까?!”

16549584265326.jpg“저, 전 당장 신관을 불러오겠습니다!”

리처드는 창백한 얼굴로 그의 안위를 살폈고, 러크는 황급히 다른 쪽으로 뛰어갔다. 아르문트는 리처드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흔들리는 눈으로 샹들리에 쪽만 응시했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49584265331.jpg“로즈!!”

발레리안이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샹들리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대한 샹들리에와 그 파편들이 공중으로 확 솟아오르더니, 이내 벽 쪽으로 거칠게 날아갔다. 콰앙! 쨍그랑! 커다란 진동과 함께 깨지는 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던 귀족들은 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다행히 사람이 없는 쪽으로 날려서 별다른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만약 사람이 한두 명 있었다고 해도 발레리안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현재 그는 다른 사람의 안전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6549584265331.jpg‘무사할 거야. 크게 다치진 않았을 거야.’

발레리안은 쓰러져있는 로제타에게로 다급히 다가가며 주문을 외우듯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무사하리라는 생각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반인이야 이런 사고를 당하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게 분명하지만, 로제타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다. 몸 자체가 일반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튼튼하다. 게다가 샹들리에가 그녀를 향해 떨어지는 순간, 발레리안은 분명히 느꼈다. 자신의 것 못지않게 거대하고도 장엄한 기운이 로제타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위험을 인지하자마자 다급히 보호 마법을 사용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샹들리에에 흑마법이 걸려 있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로제타의 기운이 너무 짙어 차마 끼어들 수가 없었던 게 더 컸다. 분명,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기운이었을 것이다. 발레리안은 이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있는 로제타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한 순간, 그 확신은 순식간에 자리를 감췄다. 로제타의 상태가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삐져나온 한쪽 팔을 제외하고는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피부 곳곳에 크리스털과 유리가 박혀 있었고, 머리는 크게 찢어져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일반인과 비교해 나은 점이 있다면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것뿐이었으며, 그마저도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했다.

16549584265331.jpg‘왜?’

무너지듯 주저앉은 발레리안이 이내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그녀를 안아 지탱했다. 그러곤 제 마나를 있는 힘껏 끌어내 치유마법을 사용했다.

16549584265331.jpg‘어째서.’

어째서, 깨달음을 얻은 로제타가 이렇게 크게 다친 건가.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방금의 그 기운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시체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발레리안은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제 입술만 짓씹어댔다. 희미한 치유의 빛이 꾸준히 로제타의 몸에 스며들었지만 큰 효과는 볼 수 없었다. 아무리 마나를 잔뜩 불어넣는다 한들 미숙한 그의 실력으로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아슬아슬한 숨을 겨우 붙여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16549584265331.jpg“제발, 로즈……!”

발레리안은 자신의 재능이 부족함을 탓하고 또 탓하며 마나를 짜냈다. 신관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 그녀를 치유해야만 했다. 그때, 무언가 이상한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곳에 비교해 그나마 멀쩡한 로제타의 왼손에 무언가 조그만 것이 쥐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조그마한 구슬. 저번에 시체에서 발견한 것보다는 커다랗고, 어두운 기운이 스며들어 있는 것. 마력핵이었다. 이를 알아차림과 동시에 발레리안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겁고도 서늘한 감정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저 마력핵이 바로 이유였다. 로제타가 이렇게까지 다친 이유. 거대한 샹들리에가 자신을 덮치는 그 찰나 같은 순간, 로제타는 검을 변형해둔 반지에 제 기운을 쏟아부은 뒤 그것을 통해 흑마법을 파훼한 것이다. 자신을 방어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16549584265331.jpg‘고작, 저 새끼를 살리려고.’

로제타를 안은 팔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발레리안은 비틀비틀 이쪽으로 다가오는 황태자를 죽일 듯이 응시했다. 시선이 마주칠 법했으나 아르문트의 두 눈에 초점이 없어 그러진 못했다. 돌연, 장난스러운 태도로 말해오던 로제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16549584291847.jpg-“만약에, 내가 전하보다 먼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럴 일 따위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만큼은 자신이 지키리라 자신했는데. 발레리안은 죽어가는 로제타를 품에 안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로제타를 지킬 수 없으며, 언젠가 로제타는 반드시 위험에 처하리라는 것을. 어쩌면,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위험에. 그리고 그는 이를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16549584265331.jpg‘내가, 로즈를 사랑하니까.’

발레리안은 자신이 한참 전부터 그녀에게 친구나 가족 이상의 마음을 품었음을, 그것이 연정이었음을 기어이 인정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녀와의 관계를 잃고 싶지 않기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막아두어도 절로 터져 나온 감정을 어떻게 자제할 수 있을까. 그는 제 품에 안긴 로제타를 내려다보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손을 뻗어 로제타의 왼손을 천천히 맞잡았다. 매끄러운 마력핵이 그의 손바닥 아래 느껴졌다. 부숴버릴까. 일순 파괴적인 욕구가 솟았다. 로제타가 목숨을 걸고 찾아낸 것이니 소중히 보관해두어야 마땅할 테지만, 그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황태자의 안위 따위 더는 신경 쓰지 않고, 원래부터 관심도 없던 권력 다툼에서 아예 벗어나, 편안하고 아늑한 자신의 공간에서 로제타와 단둘이 여생을 보내고 싶다. 감히 로제타를 위험하게 만든 마력핵도 당장 부숴 없애버리고 싶다. 발레리안의 손바닥으로 강력한 기운이 서서히 몰려들었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마력핵은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발레리안은 서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다 이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나 손바닥에 몰려들었던 기운은 이미 흩어진 후였으며, 그는 천천히 마력핵을 가져와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없애버리고 싶은 욕구는 여전했지만, 그 스스로도 그것이 옳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도의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이를 없애고 로제타와 한적한 곳으로 떠나더라도, 황태자가 암살당하면 결국 시간이 돌아가 똑같은 일이 반복될 테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16549584265314.jpg“로제.”

어느새 맞은편으로 다가온 아르문트가 낮은 목소리로 로제타를 불렀다. 그는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한 얼굴이었다. 흐릿한 눈으로 로제타만을 응시하는 모습이 반쯤 실성한 사람 같기도 했다.

16549584265314.jpg“로제타.”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건만 아르문트는 계속해서 그녀를 불렀다. 실성한 것 같다는 추측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발레리안의 품 안에 안겨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죽은 듯했으니까.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 대신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특히 등 쪽에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기다란 칼자국이 그의 심장을 가장 크게 흔들어놓았다. 자신을 위해 자객과 대치했다는 것도, 자객의 검에 등이 베였다는 말도 전부 사실이었다. 로제타는 결국 이 순간까지도 자신을 구했고. 그는 그런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6549584265314.jpg“로제.”

툭. 투둑. 굵은 물방울이 거친 피부 위로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목구멍으로는 쉭쉭거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16549584265314.jpg“내가, 잘못했어.”

투두둑. 새빨간 눈가 아래로 눈물은 점점 더 가쁘게 흘러내렸다. 아르문트는 울음을 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16549584265314.jpg“그대를…… 아프게 해서, 미안해. 울려서 미안해.”

모든 게 다 내 잘못이야. 그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덧붙였다. 정말 모든 것이 다 후회가 되었다. 고작 거짓말, 그게 뭐라고. 로제타는 자신을 몇 번이나 살려주었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주었는데. 감히 그녀에게 화를 내고, 울고 있는 그녀를 두고 떠나버렸나. 크게 화가 난 것도, 실망한 것도 사실은 로제타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런 거였으면서.

16549584265314.jpg“그러니 제발…….”

아르문트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자신의 죄가 너무도 원망스러워 차마 닿지는 못한 채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16549584265314.jpg“제발, 죽지 마.”

제발 살아서 나의 곁에 있어 줘. 제발……. 속삭이는 얼굴에는 괴로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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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문트를 처음으로 살고 싶게 한 것이 로제타였다. 그녀가 자신을 속였음을 안 이후에도 그가 계속해서 밥을 먹고, 회의에 참석하고, 잠을 잔 것도 모두 그녀의 존재 덕분이었다. 로제타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괜찮았다.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대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제 인생에서 사라진다면. 그것도, 자신 때문에 로제타가 죽는다면. 그렇다면 아르문트는 더는 살아남을 이유가 없다.

16549584265321.jpg“전하! 신관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얼른 치유를……!”

리처드와 러크가 신관 여럿을 데리고 뛰어왔다. 리처드는 얼른 아르문트를 신관에게 보이려 하였다. 로제타의 상태가 심각한 것을 알지만, 그에게는 제 주군의 안위가 더 우선이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그런 그의 손을 단호하게 내쳤다.

16549584265314.jpg“로제타를 치유해.”

삐딱하게 서 있던 대신관이 미간을 구겼다. 고작 하녀를 치유하라는 말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6549584265314.jpg“당장.”

16549584265326.jpg“예, 전하!”

그러나 무어라 이의를 제기하기도 전에 테오도르 신관이 달려가 로제타를 살폈다. 명실상부 황태자의 개다운 행동이었다. 대신관은 그의 한심한 꼴에 쯧 혀를 차면서도, 은근슬쩍 아르문트의 상태를 살폈다. 몇 군데 상처가 있기는 하나, 목숨이 위험할 수준은 전혀 아니었다. 신관 몇몇이 대신관의 눈치를 보며 로제타의 치유에 합류했다. 대신관 또한 아르문트를 치유하는 대신 로제타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느닷없는 방해가 들어왔다.

16549584265331.jpg“손대지 마십시오.”

여전히 로제타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던 발레리안이 살벌한 눈빛으로 그에게 경고했다.

16549584265331.jpg“함부로 손대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대신관.”

결국, 대신관은 아르문트도 로제타도 치유하지 못한 채 초라하게 서 있다 사라졌다. 그리고 로제타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무려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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