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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이만 침대로 갈까 (105/145)

105화. 이만 침대로 갈까2022.03.03.

로제타는 눈치가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없는 사람은 또 아니었다. 이는 즉, 그녀가 처음에야 발레리안의 태도를 별생각 없이 넘길 수는 있어도 언젠가는 진실을 깨달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가, 그녀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었다는 진실을. 그리고 이를 알게 된 순간부터 로제타와 발레리안의 관계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제타가 아르문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상, 필연적으로 그 방향은 좋지 않을 테고 말이다. 발레리안은 무려 10년의 세월을 로제타의 곁에서 보냈다. 로제타는 그에게 단순히 소중한 친구 정도쯤으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길거리를 떠돌며 굶어 죽어가던 그의 구원자였고,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였으며,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연모의 감정을 품었다는 이유로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면. 발레리안은 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숨겼다. 절대, 절대로 들킬 수 없다. 적어도 그녀가 황태자 대신 자신을 선택할 때까지는 사랑을 감춰야만 했다.

16549584783542.jpg“……으응. 그렇지.”

로제타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너무 짧은 순간 보았던 표정이라, 어쩌면 자신이 잘못 보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리안은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16549584783548.jpg“사과하신다니 받겠습니다만, 앞으로도 계속 예의 주시할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로즈는 제게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어서요. 다음번에 또 울린다면 찾아가 화를 내는 정도론 그치지 않을 겁니다.”

16549584783542.jpg“……뭐? 너 전하를 찾아갔었어?”

로제타가 또다시 놀라 기겁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발레리안이 아르문트를 찾아갔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했던 거야! 그녀가 그의 옷깃을 붙잡고 탈탈 흔들었다. 방금의 표정에 대해선 완전히 잊은 모습이었다. 발레리안은 능청스럽게 어깨만 으쓱거렸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16549584783548.jpg‘다행이다.’

그가 입술 안쪽을 잘근 깨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녀에게 제 마음을 들키지 않아서. 로제타와 멀어지지 않을 수 있어서. 그러나 안도감과 함께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16549584783548.jpg‘나는 언제까지 내 마음을 억눌러야 할까.’

로제타가 황태자를 버리고 자신을 선택할만한 때. 그럴 때가 오기는 하는 걸까. 그녀는 황태자를 위하여 수십 년을 반복하는 것도 불사하는데. 그 이상의 애정을 자신이 얻을 수는 있는 것인가. 한번 마음을 자각한 이후로는 욕심이 자꾸만 치솟았다. 무슨 짓을 해서든, 그녀의 마음을 자신이 차지하고 싶다는 욕심이. *** 발레리안은 로제타의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한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치유 마법을 걸어준 뒤 자리를 떠났다. 아무래도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 마력핵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려는 모양이었다. 테오도르 신관과 두 기사도 더 휴식을 취하라 말하며 조용히 물러났다. 정확히 말하면, 리처드가 눈치 없이 수다를 떨어대던 러크를 붙잡고 아르문트와 로제타가 밀린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르문트와 단둘이 남게 된 로제타는 묘한 기대감에 괜히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16549584783542.jpg‘이제 아까 하던 거나 마저 하면 되는 걸까.’

아까 하던 것이라 함은 당연하게도 입맞춤을 의미했다. 테오도르 신관이 오기 전에 몸도 대충 씻고 양치도 했겠다, 이제는 거리낄 것도 없었다.

16549584783572.jpg“드디어 다 갔군.”

아르문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라는 표현인즉 그 또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이리라. 기다리는 이유야 당연히 자신과 같을 테고 말이다.

16549584783572.jpg“그럼, 로제.”

두근, 두근. 기대감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로제타는 은근한 욕망이 선명하게 어린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16549584783572.jpg“이만 침대로 갈까.”

로제타가 일순 숨을 멈췄다. 세상에, 입맞춤도 아니고 바로 침대라니. 우리 전하는 대낮부터 왕성하기도 하지. 그녀는 벌게진 얼굴로 콧김을 쉭쉭 내뿜었다. 마음 같아선 온몸으로 긍정 의사를 표출하고 싶었으나, 나름 오랜만에 하는 스킨십인데 분위기를 깰 수야 없기에 애써 자제했다.

16549584783542.jpg“네에. 쉬러 가요, 우리.”

로제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속내는 순수하기는커녕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아르문트는 침대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도 않은데 그녀의 손을 잡아 에스코트를 해주었다. 불면 날아갈까, 건들면 깨질까, 손길이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이런 그가 침대에서는 얼마나 사나워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차이가 매우 만족스럽기도 했다. 땀이 맺힌 몸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던 때의 기억이 돌연 떠오르자 그녀의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렸다.

16549584783542.jpg‘안 돼! 가만히 있어!’

로제타는 제 입꼬리에 호통을 치며 최대한 헤벌쭉 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침대에 다다랐다. 아르문트는 조심조심 그녀가 눕는 걸 도와준 뒤, 천천히 옆자리에 제 몸을 눕혔다. 달콤한 음성이 이어졌다.

16549584783572.jpg“그럼 푹 쉬어, 로제.”

다만 그 내용은 로제타가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아르문트는 얼른 잠을 자라는 듯 그녀의 손등을 토닥여주었다. 흑심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16549584783542.jpg‘……정말 그냥 쉬자고?’

로제타는 어처구니가 없어 두 눈을 껌뻑거렸다. 아니, 이게 얼마나 오랜만에 둘만 있게 된 건데. 아까는 러크 놈 때문에 뽀뽀도 못 했는데! 정말 이대로 자라고? 그녀는 어쩌면 아르문트가 이러다 금세 본색을 드러낼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게 웬걸. 아르문트는 이미 눈을 감고 반쯤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연기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손등을 토닥거리는 움직임도 점차 느릿해졌다. 곧 손이 아예 멈추더니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잠든 것이었다. 사실 그로선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녀가 무사하다는 걸 깨닫고 나니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 번에 밀려들었다. 로제타가 의식이 없던 일주일간 그는 전부 합쳐서 열 시간 정도밖에는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그 열 시간마저도 얕은 잠이었다. 미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인 것이다. 이러한 결과 아르문트는 성욕 따위 느낄 새도 없이 곤히 잠들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자는 모습이 아기 새나 다를 바가 없었다.

16549584783542.jpg“허.”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로제타는 허탈함에 한숨만 푹 내쉬었다. 한때 아르문트를 변태라며 놀렸었는데, 알고 보니 진짜 변태는 자신인 듯했다. 결국,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아르문트의 품에 안겨 잠을 청했다.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니라서인지, 혹은 아르문트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인지, 그녀 또한 오래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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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제타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다음 날부터 많은 사람이 그녀를 찾아왔다. 당연하게도 가장 처음은 멜라니와 엘리아였다.

16549584812927.jpg“로지흐아으앙! 괘차느어어어…….”

멜라니는 눈물을 한가득 쏟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너무 심하게 우느라 말을 제대로 못 하는 탓이었다. 엘리아는 아예 입을 열지도 못했다. 어쨌든 그 마음만큼은 충분히 전달되었기에, 로제타는 둘을 꼭 끌어안으며 함께 눈물을 찔끔 흘렸다.

16549584812933.jpg“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흐윽, 정말, 너무 감사해요.”

아르문트의 유모, 마담 르블랑도 그녀를 찾아와 쉴 새 없이 감사를 전했다. 중년의 여인이 허리를 구십 도로 꺾으며 인사해오는 것이 민망했기에 로제타는 얼른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소 의외의 인물도 그녀를 찾아왔다.

16549584812943.jpg“로제타.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테오도르에게 전해 듣고 많이 걱정했어요.”

16549584783542.jpg“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페이즐리.”

16549584812943.jpg“뭘요. 당연히 와야죠. 우리 나름 친한 사이잖아요.”

페이즐리가 생긋 웃으며 복도를 지나가던 하녀들에게 시선을 한번 주었다. 어쩐지 눈빛이 살벌했다. 어디선가 로제타가 사용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계하는 그녀였다. 다만 이미 그런 사용인들은 아르문트의 손에 다 쫓겨난지라 그럴 필요는 없었다.

16549584783542.jpg‘테오도르랑 계속 연락을 했구나.’

한편 로제타는 자연스럽게 테오도르의 이름을 언급하는 페이즐리의 태도에 제법 놀란 상태였다. 설마 연애라도 하는 걸까. 매우 궁금했으나 예의상 묻지는 않았다. 그 순간, 페이즐리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16549584812943.jpg“저, 사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로제타.”

16549584783542.jpg“네? 부탁이라면 어떤…….”

로제타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랐지만, 손을 떼어내지는 않았다. 부드럽고 말랑할 것만 같던 페이즐리의 손은 예상외로 은근히 거친 데가 있었다.

16549584812943.jpg“제게 검술을 가르쳐주지 않으실래요?”

그리고 예상 밖의 부탁에 로제타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내려앉았다.

16549584783542.jpg‘뭐, 뭘 알고 하는 말이지?’

황궁 하녀에게 검술이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할 얘기가 아니었다.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가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기엔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는데. 로제타는 최선을 다해 당황한 표정을 갈무리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은 발뺌할 심산이었다.

16549584783542.jpg“네? 검술이요? 그런 걸 왜 제게…….”

16549584812943.jpg“그야, 로제타가 적임자니까요. 저 알고 있어요. 당신이 아주 오랫동안 검을 다뤄왔다는 거요.”

쿵, 쿵, 쿵. 심장이 공처럼 위아래로 튀었다. 페이즐리의 적금색 눈동자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 얼굴이었다.

16549584812943.jpg“걱정하지 말아요. 왜 숨기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을 테니.”

16549584783542.jpg“……무슨 이유로 제가 검을 다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16549584812943.jpg“음, 가장 처음 직감한 건 로제타가 파티에서 버틀러 영애를 제압했을 때고. 지금 제일 큰 증거를 만지고 있잖아요. 바로 이 손이요.”

페이즐리가 검지로 로제타의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을 콕콕 건드렸다.

16549584783542.jpg“이건 잡일을 많이 해서 생긴 거…….”

16549584812943.jpg“아닌 거 알아요. 청소나 빨래를 한다고 해서 굳은살이 이런 식으로 생기진 않거든요. 이건 검 때문에 생긴 거예요.”

16549584783542.jpg“네? 영애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16549584812943.jpg“다 해봤거든요. 청소도, 빨래도, 요리도. 사용인들을 다루는 자리에 오르려면 뭐든 직접 한번은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양어깨를 으쓱했다. 로제타는 그런 그녀를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 루니엘라 공녀가, 심지어 원래는 황태자비 자리에까지 오르는 그녀가 직접 청소와 빨래를 했다니.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16549584812943.jpg“저로서는 여태껏 전하나 다른 사람들이 이걸 눈치채지 못한 게 놀랍지만…… 뭐, 여기사가 워낙 드문 세상이니 아예 생각을 못 했겠죠. 그렇지만 사실 전 기사가 되는 게 꿈이라서요.”

16549584783542.jpg“……페이즐리, 당신이요?”

16549584812943.jpg“네. 아버지는 반대하시지만요. 그래도 꼭 이루고 싶어요. 그러니 언젠가 마음이 바뀌면, 제게 가르침을 주셨으면 좋겠어요.”

페이즐리는 몇 차례 더 간절히 부탁하고야 떠났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로제타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깨달은 까닭이었다. 로제타가 기억하는 페이즐리는 그저 우아하고 차분한 황태자비에 불과했다. 무려 루니엘라 공작가의 외동딸인 그녀이니, 로제타는 당연히 황후가 되는 것이 그녀의 목표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페이즐리는 황태자비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이었고, 자신만의 꿈이 있었다. 회귀하기 전 로제타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아르문트의 광증을, 그의 방에 있던 온갖 저주들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16549584783542.jpg‘어쩌면 나는 그때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로제타는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홀로 후원을 산책했다. 한동안 아르문트가 그녀를 과보호한 탓에 오랜만에 느낄 수 있는 고독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반쯤 정신을 놓고 있었던 로제타가 갑자기 멈춰 섰다. 하얀 피부 위로 순식간에 소름이 오소소 솟아올랐다. 어디선가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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