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복수는 이제 시작2022.03.06.
로제타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로선 이런 접근이 달가웠다. 범인이 제 발로 찾아와주다니, 이렇게 기쁜 일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흑마법의 기운은 로제타를 의식한 듯 금세 사그라들었으나 여전히 미세하게나마 살기가 느껴졌다.
‘어디 와보시지.’
로제타는 가볍게 손가락을 뚜두둑 꺾으며 평온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곧 빠른 속도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다갈색의 머리카락을 올려묶은 중년의 여인. 황후의 시녀인 밀리엄 백작 부인이었다.
‘저 여자가 왜 여기에?’
로제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응시했다.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진 다음에 나타난 이가 황후의 시녀라니. 구린내가 나도 아주 진하게 났다. 특히 지금 로제타가 있는 곳은 후원에서도 가장 구석진 장소였다. 즉, 남몰래 못된 짓을 하기 딱 좋은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밀리엄 백작 부인은 당장 무슨 짓을 저지를 것처럼 빠르게 다가왔다. 로제타는 놀란 척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머릿속으로는 그녀의 움직임을 계산했다. 대충 보아하니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다가오는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어쩌면 갑자기 흑마법을 쓸지도 모르는 일이니,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그녀는 온 감각을 끌어올린 채로 밀리엄 백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백작 부인의 손이 로제타를 향했다. 터억! 주름진 손이 로제타의 몸을 강하게 밀어냈다. 제법 힘이 세기는 했지만, 예상과 달리 흑마법이 담겨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로제타는 꿋꿋이 버티는 대신 순순히 밀리엄 백작 부인의 의도에 따라 뒤로 밀려났다. 뭐라도 증거를 더 잡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뒤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로제타의 등이 나무에 닿자 백작 부인은 또다시 성큼 다가오더니 그녀를 향해 크게 손을 휘둘렀다.
‘고작 손찌검이 끝이라고?’
로제타는 제 뺨을 향해 다가오는 손바닥을 바라보며 허탈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뺨을 때리는 건 증거로 쓰기엔 너무 약하다. 최소한 목을 조르던가, 커다란 돌을 휘둘러서 머리를 박살 내던가 해야 살인미수로 집어넣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뺨을 한 번 때린 뒤에 목을 조를지도 몰라. 그녀는 일말의 기대를 놓지 않으며 얌전히 제 볼에서 느껴질 고통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게 웬걸.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짜악!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로제타의 눈앞에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힘없이 나부꼈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로제타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마담 르블랑! 괘, 괜찮으세요?!”
그녀의 앞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마담 르블랑이였다. 로제타가 밀리엄 백작 부인에게만 집중하고 있을 때, 마담 르블랑은 그녀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와 대신 얼굴을 내어준 것이다.
주르륵, 핏방울이 하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커다란 반지에 피부가 긁힌 모양이었다. 마담 르블랑은 괜찮다는 듯 로제타에게 작게 턱짓을 하더니, 이내 강렬한 눈빛으로 백작 부인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밀리엄 백작 부인.”
“……부인이야말로,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죠?”
밀리엄 백작 부인은 우아하게 손을 털어내며 물었다. 마치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양 뻔뻔한 태도였다. 그에 마담 르블랑은 왈칵 인상을 일그러뜨리더니,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감히 전하의 소중한 분을 상처 입히려 하다니……! 진정 미치셨습니까!”
예상외의 목청에 로제타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늘 그녀 앞에서는 나긋하고 부드러운 모습만 보여주던 마담 르블랑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위해 황후의 시녀이자 지체 높은 백작 부인에게 이토록 화를 내주다니. 감격스러우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상처 입히다니요? 저는 단지 얼굴에 붙은 것을 떼어주려던 것뿐이었어요. 억측이 심하군요, 부인.”
“그게 말이 되는……!”
“황태자 전하의 유모라는 이유로 편의를 많이 봐주었더니……. 이제는 아예 제 위에 서려는 모양입니다?”
밀리엄 백작 부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적했다. 비스듬히 웃으며 말하는 그녀에게선 알 수 없는 위압감이 풀풀 풍겼다. 그러자 마담 르블랑은 몸을 움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열심히 애써보았지만 차마 백작 부인의 기세를 상대할 재간이 없었다. 타고난 신분도, 성정도 워낙 다른 탓이었다.
“얼굴에 붙은 걸 떼려고 사람을 밀치다니. 무척 기품 없는 방식이네요. 백작 부인답지 않게.”
로제타는 눈치껏 끼어들어 마담 르블랑을 지원했다. 사실 그녀로선 마담 르블랑이 끼어들지 않는 게 더 좋았을 뻔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위해 뺨까지 얻어맞은 사람을 도와주지 않을 순 없었다.
“거짓말을 뱉은 혀는 뽑아주는 게 마땅하다고, 직접 그러셨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로제타가 생긋 웃으며 백작 부인의 입술을 빤히 응시했다. 당장 네 혀를 뽑아주고 싶다는 의미였다. 밀리엄 백작 부인의 사나운 눈길이 이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제법 험악하기는 하다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녀가 겁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것인 줄 알았더니.”
백작 부인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영악하게도 순진한 척을 했었구나.”
“아시다시피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더니, 성격이 변했나 봐요.”
“이 건방진 것이 감히…….”
로제타가 뻔뻔하게 응수하자 백작 부인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마담 르블랑을 거세게 밀치더니 다른 손으로 로제타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꺅!”
충분히 막을 수 있는 행동이긴 했지만, 로제타는 이번에도 순순히 그녀의 손에 끌려갔다. 마담 르블랑에겐 미안하지만, 뭐라도 더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백작 부인은 그런 그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앞으로는 이렇게 혼자 다니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또 그런 고비를 겪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밀리엄 백작 부인이 서늘하게 덧붙였다.
“백작 부인!”
마담 르블랑의 외침에 백작 부인은 로제타의 멱살을 풀어주었다. 그러곤 오만한 미소와 함께 뒤돌아 떠나갔다. 우아하게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담 르블랑은 숨을 씨근덕거렸다.
“로제타, 괜찮아요? 저 미친 여자가 또 무슨 말을 하던가요! 당장 전하께 모두 알려야 해요!”
“아, 별말은 안 했어요. 그냥 흔한 협박이었어요. 그보다 마담. 마담이야말로 괜찮으세요? 얼굴에 피가……!”
차분하게 대답하던 로제타는 마담 르블랑의 모습을 확인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녀와 달리 몸이 약한 마담은 고작 손찌검 몇 번만으로도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밀쳐질 때 다리를 접질렸는지 잘 걷지도 못했고, 뺨은 벌써 부어 있었다. 이렇게 다쳤을 줄은 몰랐기에 로제타는 화들짝 놀라 얼른 그녀를 업어 들었다. 그러곤 단숨에 신관을 찾아 뛰어갔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닌듯했으나, 이름을 잘 알지 못하는 신관은 마담에게 며칠 요양할 것을 권했다. 이러한 사정을 전해 들은 아르문트는 당연하게도 길길이 날뛰었고, 당장이라도 황후를 찾아가 따지려 했으나 로제타가 강하게 만류했다.
“지금 찾아갔다간 여인들끼리의 사소한 다툼에까지 끼어든다며 오히려 소문만 안 좋게 날 거예요.”
아르문트는 차마 그녀의 말에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이만 으득 갈았다. 로제타의 말대로 흘러갈 것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분명하다고 한들,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속이 너무 들끓었다. 로제타와 마담 르블랑. 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이었다. 감히 그들을 해치려 하다니, 견딜 수 없을 만큼 부아가 치밀었다.
“걱정하지 마요, 아르문트. 아르문트는 따로 해줄 일이 있잖아요? 복수는 그 뒤에 해도 충분해요.”
로제타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쓱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 발레리안의 얼굴이 담겼다. 그녀가 그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자 발레리안은 나른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래. 복수는 이제 시작이지.”
아르문트 또한 한결 진정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갚아줄 시간이었다. *** 다음날 오후, 황궁에서는 샹들리에 추락 사건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연회에 왔던 귀족들 모두가 의무적으로 참석하였고, 연회에 오지 않았던 귀족들도 다양한 이유로 자리를 채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연회 이후로 처음 갖는 정식 회의였다. 로제타가 의식이 없는 동안 아르문트가 회의는커녕 다른 정무를 대부분 내팽개치고 그녀의 곁을 지켰던 탓이었다. 유례없는 대형 사건에 흥분한 귀족들은 너도나도 참석하여 사건의 전후 관계를 파악하고자 했다. 물론 단순히 황태자와 1 황자의 대치를 제 눈으로 보고 싶어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회의가 시작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황태자의 입에서 폭탄 발언이 나왔다.
“흑마법이다.”
그 한마디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샹들리에를 떨어트린 것은 분명 흑마법사의 소행이다. 대마법사 윈저프리드 경이 직접 확인해준 사실이지.”
아르문트는 제대로 듣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염려라도 하듯 재차 주장했다. 황궁 안에서 황태자가 흑마법에 의해 살해당할 뻔하다니. 이는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를 증명하듯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드넓은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글쎄.”
황후의 곁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그레이한의 말에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대마법사가 오해한 건 아닌가?”
그레이한은 여유롭기 짝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미소를 곁들이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이번 사고에서 크게 다쳤던 하녀와 대마법사가 아주 특별한 관계라던데.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눈이 흐려진 것은 아닌가, 이 말이야.”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귀족들 사이로 들려왔다. 회의 시작부터 황태자와 1 황자의 기 싸움이 이토록 팽팽할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
“게다가 다른 마법사들은 딱히 아무 기운도 느끼지 못했다던데. 혼자만 흑마법을 감지했다니, 아무리 대마법사라도 그건 좀 수상한걸.”
“황자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맨 앞에 앉아 있던 루니엘라 공작이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그는 모르트마르 백작과 황후의 서늘한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언성을 높여 말했다.
“샹들리에가 비정상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목격한 귀족이 저를 포함하여 한둘이 아닙니다! 하필 황태자 전하께서 축사를 하실 때, 멀쩡하던 샹들리에가 갑자기 떨어지다니. 이것이 흑마법의 증거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요.”
황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루니엘라 공작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자, 그녀는 여유롭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저 또한 어미로서 황태자의 안위가 몹시 걱정되지만, 괜한 헛소문으로 황실의 명예가 실추되게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명예를 명분으로 범인을 감춰주려는 것은 아닙니까?”
아르문트의 솔직한 지적에 분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얼어붙었다. 황후는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며 그를 응시하는 한편, 그레이한은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엄하다! 어딜 감히 증거도 없이 황후 폐하께 그런 헛소리를-!”
“증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차림새의 발레리안은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환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뭐?”
“제가 어째서 그때 그 ‘특별한 사이의’ 친구를 직접 구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발레리안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턱을 괴고는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귀족들은 서로 눈짓만 주고받기 바빴다.
“고작, 그까짓 흑마법 따위에 밀려서?”
그럴 리가요. 그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
“다른 마법사들도 느꼈을 텐데요.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순간, 거대한 기운이 터져 나오는걸.”
발레리안은 황자의 근처에 서 있는 마법사 한 명을 빤히 응시했다. 마법사는 그의 시선을 모른 척 피하며 입술만 꾹 깨물었다.
“뭐, 흑마법의 기운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니, 그 또한 몰랐을 수도 있겠군요. 그런 사람을 감히 마법사라고 칭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긴 하지만.”
“대마법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가!”
“멍청하면 얌전히 기다리기라도 할 것이지, 쯧.”
마지막 말은 중얼거림에 가까울 정도로 목소리가 작았지만, 들을 사람은 모두 들은 상태였다. 대담함을 넘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발언에 모두 입을 쩍 벌렸다. 당장 황족 모독으로 잡혀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탁! 뒤늦게 의미를 이해한 그레이한이 발레리안을 향해 고함을 치려는 순간, 아르문트가 탁자 위로 동그란 것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