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겨우 참고 있었는데2022.03.10.
“그건…….”
“마력핵이다.”
아르문트가 사나운 눈빛으로 앞을 응시했다. 그레이한과 황후가 있는 쪽이었다.
“샹들리에가 나를 향해 떨어질 때, 대마법사가 재빨리 흑마법을 파훼한 덕에 얻을 수 있던 것이지.”
또다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웅성거리는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그게 가능한 일이었어?”
“말로만 들었지, 진짜 가능할 줄은……. 역시 대마법사는 대마법사군.”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흑마법을 파훼하는 건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소드 마스터나 대마법사만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만 이는 학문적으로만 남아 있는 정보일 뿐, 실제로 이를 실행하여 마력핵을 얻은 이는 전무후무했다. 마력핵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했다. 아르문트 또한 발레리안에게 마력핵을 전해 받았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다만 그가 놀란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어째서, 로제타를 구하지 않고 흑마법을 파훼한 거지?”
아르문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마력핵이 중요한 증거물이 될 수 있다고 한들, 로제타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데. 도대체 왜 로제타를 구하기 위한 마법을 쓰는 대신 흑마법을 파훼한 것인가? 발레리안이 로제타를 얼마나 각별히 여기는지 잘 알기에 더욱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아르문트의 질문에 발레리안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즈가 그러길 원했으니까요.”
이 또한 아르문트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만약 그였다면 아무리 로제타가 그러길 바랐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목숨을 우선했을 테니까.
“마, 말도 안…….”
“왜, 이제는 마력핵의 존재 또한 의심하려 하십니까?”
그레이한이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자, 발레리안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를 지적했다.
“흑마법의 존재도, 제 마법의 기운도 느끼지 못하는 반쪽짜리 마법사의 말을 증거로 들면서요?”
발레리안의 말에 그레이한의 뒤에 서 있던 마법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었으나 차마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마력핵이라는 증거가 나온 이상, 입이 있어도 더 할 말은 없었다.
“필요하다면 루니엘라 공작가의 마법사에게 검증을 맡기겠습니다. 아, 아예 마탑에 부탁해도 괜찮겠군요.”
승기를 잡았음을 확신한 루니엘라 공작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황실 소속 마법사를, 정확히는 황후의 편에 선 마법사들을 명백히 조롱하는 말에도 황후와 그레이한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력핵이 등장한 이후로 황후의 얼굴에서는 여유로움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레이한 또한 발레리안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것조차 잊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기 바빴다. 아르문트는 그런 그들을 우습다는 듯 비웃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 정도면 흑마법사의 소행이라는 건 확실해진 것 같군요, 황후 폐하.”
“…….”
“그런고로, 연회 날 황궁에 있었던 사람은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황후에게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황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황태자!”
황후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노여움이 가득한 얼굴로 까랑까랑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지금 감히 존엄하신 황제 폐하마저 조사하겠다 말하는 겁니까?”
“예, 필요하다면 그리할 생각입니다. 물론 황후 폐하와 1 황자도 예외는 아니고 말입니다.”
“무례에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황후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언성을 높여 아르문트의 무엄함을 비난했다. 그녀는 재차 황제를 언급하며 성을 냈으나, 아르문트는 이것이 진정으로 황제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님을 잘 알았다. 그저 자신도 묻어가기 위해서일 뿐이리라.
‘저 정도로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니 어지간히 궁지에 몰린 모양이군.’
언제나 느긋한 척 웃어대더니 지금은 그럴 여유도 없는 듯했다. 그만큼 마력핵이 예상치 못한 증거라는 뜻이었다.
“어찌 감히 편찮으신 폐하께-!”
아르문트는 제게 손가락질을 하는 황후를 무심하게 응시했다. 저 말까지만 들어준 뒤 그녀가 무어라 하든 조사를 강행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계획했던 그조차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래, 내가 가장 먼저 조사받도록 하지.”
병상에 누워 있을 황제가 느닷없이 회의장에 등장한 것이었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깜짝 놀란 귀족들은 재빨리 일어서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아르문트 또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제 아버지가 친히 이곳까지 찾아오는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폐하? 몸도 성치 않으신데 어찌 이런 곳까지…….”
황후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 허둥지둥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를 부축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황제는 부드럽게 손을 저어 부축을 거부했다.
“괜찮소. 얼마 전부터 몸이 많이 좋아져서.”
그는 느릿하게 걸어가 가장 상석에 앉았다. 고급스러운 지팡이를 짚은 주름진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감히 황실이 주관하는 연회에서, 귀족들이 다 지켜보는 앞에 황태자를 암살하려 한 놈을 가만둘 수야 없지. 황실의 권위와 명예를 위해서라도.”
아르문트의 것과 매우 비슷한 황금색 눈동자에 일순 기묘한 광채가 번쩍였다.
“안 그렇소, 황후?”
“……예, 그럼요.”
“그래. 그러니 황태자의 말대로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 조사하도록 하지.”
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황제가 직접 이렇게 말하니 황후로서는 더는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동의를 표시했다.
“아르문트.”
“……예, 폐하.”
아르문트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여태껏 뒤에서 방관만 하던 아버지가 어째서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바쁘게 머리를 굴려 이유를 추측해보았으나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네가 뜻하는 대로 해라.”
“예, 감사합니다, 폐하.”
어찌 되었든 아르문트로서는 나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황제의 승인을 얻었으니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다. 아르문트는 발레리안을 향해 슬쩍 시선을 던졌다. 행여나 누군가 몰래 황궁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마법을 쓰라는 신호였다. 발레리안은 삐딱하게 선 채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 와중에도 아르문트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누군 제가 마음에 드는 줄 아나.’
아르문트는 속으로 흥, 코웃음을 쳤다. 대놓고 티는 안 내고 있지만, 시시때때로 제 연인에게 스킨십을 해대는 대마법사 놈이 그로서도 못마땅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가 입술을 삐죽거리는 모습을 발견한 황제는 쿡쿡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런 표정은.”
“예?”
“요즘 들어 네 얼굴이 많이 밝아진 것 같다. 이전에는 꼭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았는데. 보기 좋구나.”
아. 아르문트가 짧게 중얼거렸다. 제 낯빛이 달라진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모두 로제타의 덕이다. 그는 무어라 대답을 할까, 고민하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황제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워낙 없어 어색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보면 볼수록 헤일리를 닮았어.”
황제의 중얼거림에 아르문트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듣는 이름. 제 어머니의 것이었다. 황제는 아련한 눈빛으로 아르문트를 바라보며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아르문트는 못내 불쾌해져 시선을 피했다. 불쾌한 것은 아르문트만이 아니었다. 황제의 곁에 서 있던 황후는 그의 중얼거림을 똑똑히 들었다. 전 황후를 그리워하는 것만 같은 눈빛도 확실하게 확인했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분노로 그녀의 얇은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다란 손톱은 여린 피부를 따갑게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살벌한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으나 곧장 시행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그녀에게는 몹시 안타깝게도, 아르문트의 반격은 이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 아르문트가 선언한 대로, 회의가 끝나자마자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발레리안과 테오도르 신관, 그리고 황실 마법사 몇몇이 함께 마력핵에서 나온 기운과 다른 사람들의 기운을 대조하는 방식이었다. 귀족들은 단지 연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 용의자가 된 사실에 몹시 못마땅해했으나, 아무도 이러한 심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황제가 먼저 나서서 조사를 받은 상황에 제 억울함을 주장할 정도로 눈치 없고 멍청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황후와 1 황자 또한 예외 없이 조사를 마쳤다. 확인이 끝난 귀족들은 순차적으로 귀가하였고, 그다음으로는 황궁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한 명씩 조사를 받았다. 워낙 사람이 많아 금방 끝날만 한 일은 아니었다. 도주의 우려가 있기에 아직 확인을 마치지 않은 사람은 연회장에 반쯤 감금된 채 제 차례를 기다렸다. 한편, 아르문트에게 회의 결과를 전해 들은 로제타는 그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행동에 꽤 놀랐다. 이전 회차까지는 단 한 번도 개입하지 않았었는데. 도대체 어떤 바람이 불어서 그의 태도가 변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보다 아르문트.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요.”
“뭐지?”
“마담 르블랑의 상태가 썩 좋지 않으시대요. 어제 일이 충격이 컸는지 열이 많이 올랐다고 하더라고요.”
“……베티가?”
회의가 열리는 동안 전해 들은 바로는, 마담 르블랑은 어제 넘어지며 다리를 삔 것이 문제였는지 현재 제법 열이 오른 상태라 했다. 다른 신관이 처치를 해주어서 크게 위독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정말 적어도 며칠은 휴식이 필요할 듯싶었다.
‘그렇게 약한 몸으로 나를 지켜주려 하다니.’
로제타는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이 맞았더라면 생채기도 남지 않고 넘어갔을 텐데. 괜히 나이도 있는 그녀를 끌어들여 다치게 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동안 무리하지 말고 요양을 취하라 해. 황궁에도 오지 말고.”
지금 같은 상황에 왔다가는 괜히 화를 입을지 모르니까. 아르문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금발 머리의 기사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의 말을 전하러 떠났다. 어쩐지 얼굴이 익숙하다 했더니, 예전에 연무장에서 보았던 알렉이였다. 놓치면 안 되는 인재라고 생각해놓고 한동안 까먹고 있었던, 평민 출신의 기사.
‘알렉 경은 또 언제 나 모르게 챙겼대?’
신경을 더 써주는 게 어떠냐 제안한 적은 있지만, 그가 진짜 그렇게 해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러고 보면 아르문트는 은근히 로제타가 지나가듯 했던 말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편이었다. 이를 깨닫자 죄책감이 더욱 밀려들었다.
“미안해요, 아르문트. 괜히 저 때문에…….”
로제타가 시무룩한 얼굴로 사과했다. 아르문트야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밀리엄 백작 부인을 막지 않았는지 모를 테지만, 증거를 잡겠답시고 그의 어머니나 다름없는 사람인 마담을 다치게 내버려 둔 것이 매우 미안했다.
“그대가 미안할 것이 뭐가 있나. 모두 내가 힘이 없어 생긴 일인데.”
아르문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로제타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넘겼다. 그러곤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우리 같이 여행이나 갈까.”
“와, 정말요?”
로제타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푸른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아르문트와 여행이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 좋았다. 그와 함께 말을 타고 멀리 떠난 적이야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전쟁을 위해서였을 뿐, 여행이 목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제안할 걸 그랬군.”
“지금까진 너무 바빴잖아요.”
로제타가 슬며시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쪽! 부드러운 입술이 장난스럽게 맞닿았다.
“제가 깨어난 뒤로 제대로 된 키스 한번 못 할 정도로요.”
그 이상의 것도요. 로제타가 눈매를 은근하게 휘며 덧붙였다. 그러자 아르문트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그의 피부가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인 채로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잔뜩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대가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 자제해야 할 것 같아서…… 겨우겨우 참고 있었는데.”
“저 완전히 멀쩡한데요.”
로제타는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제 몸을 아르문트에게 밀착시켰다. 고작 뽀뽀 한 번 했을 뿐인데 뭐가 그리 자극적이었는지. 아르문트의 몸은 이미 경직되었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