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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추격 (1) (109/145)

109화. 추격 (1)2022.03.17.

16549585480868.jpg“발레리?”

로제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레리안을 불렀다. 그녀가 한참을 얘기하는 동안 아무런 대꾸가 없는 그의 모습이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눈동자의 초점도 영 희미한 것이, 정말 몸이 안 좋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16549585480868.jpg“너 진짜 괜찮아?”

16549585480879.jpg“괜찮아. 그냥 잠시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이야.”

발레리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화에 집중했다. 그는 멀쩡한 척 빙긋이 웃어 보였으나, 로제타에게는 그다지 먹히지 않았다. 그가 곤란한 상황일수록 저렇게 더 웃는다는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16549585480868.jpg“상태가 이상한 것 같은데…….”

로제타는 다시 그의 이마를 짚어보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방금도 그랬듯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다. 아르문트를 생각해 최대한 스킨십은 삼가고 있긴 하지만, 친구끼리 열을 재주는 것쯤이야 괜찮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정작 거부 반응은 발레리안 쪽에서 튀어나왔다.

16549585480879.jpg“괜찮다니까.”

손가락이 그의 얼굴에 닿기 직전, 발레리안이 단호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 저지했다. 붉은 입술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는 있었지만, 두 눈 위로 드러난 기운은 어쩐지 서늘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로제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닿는 걸 거부하다니. 시도 때도 없이 스킨십을 해대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던 그 발레리안이. 그 또한 사람인 이상 유난히 예민한 날이 있을 수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워낙 생소한 반응이다 보니 로제타는 차마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16549585480868.jpg“으응, 미안.”

그녀는 어색하게 손을 물리며 떠듬떠듬 사과했다. 당황이 역력한 얼굴을 목격한 발레리안은 제 입술을 잘근 깨물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의 스킨십이 싫어서 거부한 것이 아니다. 아니, 실상은 오히려 반대였다. 너무도 닿고 싶어서. 또다시 그 부드러운 손바닥이 제 피부에 닿았다간, 당장 그녀를 끌어안고 더한 것을 취하려 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발레리안은 그녀를 쳐낼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굳건한 관계에 일순 가는 실바람이 흘렀다. 익숙하지 않은 침묵이 이어지자 로제타는 흘끔흘끔 그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16549585480868.jpg‘그냥 걱정해준 건데 왜 저러지.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아니면 정말 몸이 많이 안 좋은가…….’

속상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보다는 걱정이 되는 게 더 컸다. 발레리안은 새벽까지 일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그동안 자신은 아르문트와 희희낙락하기 바빴던 게 양심이 찔리기도 했다. 애초에 발레리안이 이런 고생을 하는 건 모두 제 부탁 때문이었으니까. 미안한 마음에 무어라 먼저 말문을 열려는 찰나,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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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제타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아르문트와 시선이 마주했다.

16549585480868.jpg‘아, 전하!’

눈부시게 황홀한 외모를 발견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금세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린 탓이었다. 흥. 콧방귀를 뀐 로제타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아르문트의 한쪽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16549585480907.jpg‘어딜 갔나 했더니.’

또 대마법사 놈과 있었군. 아르문트가 작게 이를 갈았다. 날카로운 눈매가 짜증으로 가늘어졌다. 그는 긴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로제타의 곁에 다다랐을 때쯤에는 표정 관리를 다 마친 덕에 여상한 얼굴을 가장할 수 있었다.

16549585480907.jpg“윈저프리드 경.”

16549585480879.jpg“……오셨습니까.”

아르문트와 발레리안이 형식상의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르문트의 뒤에 선 리처드는 감히 황태자를 향해 고개만 까닥거리는 발레리안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이를 대놓고 지적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정작 이미 발레리안의 무례에 익숙해진 아르문트는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로제타를 향해 다정한 눈인사를 보냈다. 그러자 로제타의 입꼬리가 그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움찔거렸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던 얼굴이 자신에 한해서만 상냥해지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짜릿했기 때문이었다.

16549585480907.jpg“조사는. 어떻게 돼가나?”

16549585480879.jpg“오전 회의에서 이미 들으셨겠지만…… 황후 폐하와 1 황자 전하의 기운은 마력핵에 담긴 것과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귀족들은 모두 조사를 마쳤고, 사용인들은 삼 분의 이가량 마쳤습니다만, 아직 일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16549585480907.jpg“그렇군.”

나지막이 중얼거린 아르문트가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딱히 안타까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느긋해 보였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16549585480907.jpg“그레이한이 내일 아침 황궁을 떠난다고 했다.”

16549585480879.jpg“예?”

16549585480907.jpg“이번 사고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는군. 요양을 위해 별장으로 떠난다는데…….”

처음 듣는 얘기에 로제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16549585480907.jpg“아무래도 냄새가 나지?”

하필이면 조사가 진행되는 시기에 황궁을 떠나려 한다니. 의심스러워도 이렇게 의심스러울 수가 없었다.

16549585480879.jpg“……황자의 이동인만큼 분명 많은 인원을 대동하겠군요.”

16549585480907.jpg“그래. 조사를 마친 사람들만 데려간다고는 하나, 그 행렬 중 어떤 식으로 흑마법사를 숨겨놓을지 모르는 일이지.”

16549585480879.jpg“수색도 쉽지 않겠습니다. 조사를 마쳤음에도 다시 확인하려 든다니, 감히 황자를 의심하는 거냐며 노발대발할 게 뻔합니다.”

발레리안의 말에 아르문트가 동의를 표시했다. 그레이한 놈의 행동쯤이야 안 보고도 예상할 수 있었다.

16549585480907.jpg“아예 외출을 미루게끔 하고 싶지만…… 폐하께서 허가하신 일이라 내 힘으론 어려워.”

16549585480879.jpg“흠……. 그렇다면 제가 직접 동행하는 하인들과 마차를 조사하는 수밖에는 없겠군요.”

16549585480868.jpg“어쩌면, 그쪽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놓으려는 계략일지도 몰라요.”

로제타가 빠르게 끼어들어 다른 가능성을 주장했다. 아르문트 또한 생각하지 못한 부분은 아니었는지 고개를 주억였다.

16549585480907.jpg“맞아.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니 현재로선 황자와 황후의 움직임 모두 예민하게 주시해야만 해. 어렵겠지만 잘 부탁하네, 윈저프리드 경.”

16549585480879.jpg“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발레리안이 금색의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나긋하게 대답했다. 천재 중의 천재로 이름난 그만이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16549585480879.jpg“그럼, 저는 나머지 조사를 마치러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대답도 더 듣지 않고 돌아섰다. 화려한 로브 자락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따라 우아하게 흔들거렸다. 아르문트의 뒤에 서 있던 기사 중 누군가 침을 꼴딱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사내놈에게 홀리다니 미친 거냐 타박하기에는 발레리안의 용모가 지나치게 아름답기는 했다.

16549585539196.jpg“저자는 전하께 너무 무례합니다.”

여태껏 침묵하던 리처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곧 로제타와 발레리안이 몹시 막역한 사이임을 상기한 듯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16549585539196.jpg“제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 해도 라그나르의 국민이자 황실의 소속으로서 전하께 예를 차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저런 태도라니…….”

16549585480907.jpg“그렇더라도 일 처리는 확실하니까.”

16549585539196.jpg“그건 그렇지만…….”

16549585480907.jpg“명백하게 도움을 받는 처지에 어떻게 예의를 운운하겠나.”

아르문트는 발레리안의 푸른 로브 자락을 무심하게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16549585480907.jpg“뭐. 용납할 수 없는 선을 넘는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그가 천천히 시선을 옮겨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무뚝뚝하던 얼굴 위로 또다시 수줍은 미소가 걸렸다.

16549585480907.jpg“그러지 않는다면 예의를 문제 삼을 생각은 없어. 그러니 경도 괜한 말은 꺼내지 말도록 해.”

16549585539196.jpg“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리처드가 아쉽다는 듯 물러났다. 로제타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휴 내쉬었다. 행여나 아르문트가 또 발레리안에게 화가 났을까 봐 걱정했는데, 샹들리에 사건 이후로는 확실히 그는 한결 유해져 있었다.

16549585480907.jpg“로제. 이리 마주한 것도 우연인데, 같이 점심이나 먹을까.”

아르문트는 고개를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곤 또다시 사르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16549585480868.jpg‘부끄럽지도 않은가.’

방금 기사들 앞에서는 위엄 있게 굴어놓고, 금방 이렇게 달콤한 목소리를 내다니. 가만 보면 아르문트는 은근히 창피함을 못 느끼는 편이었다.

16549585480868.jpg“죄송한데 제가 바빠서요.”

흥. 로제타가 재차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렸다. 벌써 기분이 풀렸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어제의 수치심을 생각하면 아직 한참은 더 내외할 작정이다. 그녀는 발레리안을 흉내 내듯 치마를 펄럭거리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아르문트는 로제타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16549585566894.jpg“전하, 어째 밉보인 것 같네요?”

16549585539196.jpg“조용.”

16549585566894.jpg“악!”

러크가 눈치 없이 킥킥거리며 말하자, 리처드는 아르문트를 대신하여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러크는 제 뒷머리를 문지르며 구시렁거렸다. *** 그날 밤, 로제타는 아르문트와 같은 침대에 눕는 것을 거부하고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아직도 화가 덜 풀린 까닭이었다. 아르문트는 정 그래야 한다면 차라리 자신이 소파에서 자겠다며 주장했으나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16549585480868.jpg“우리 개복치, 소파에서 떨어져서 죽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안 돼요, 안 돼.”

16549585480907.jpg“개복치? 지금 내 얘기하는 건가? 내가 왜 소파에서 떨어진다는-.”

16549585480868.jpg“어서 자요, 아르문트!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죠!”

왜 갑자기 이렇게 애 취급을 하는지. 개복치는 또 무슨 말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아르문트로서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는 힘을 써서라도 로제타를 침대에 옮겨다 놓을까 고민했지만, 조금이라도 그녀가 아플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그녀의 힘이 만만치 않기도 했고 말이다. 결국, 그날 밤 로제타는 굳건히 소파에 자리를 지켰다. 한참을 설득하던 아르문트는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컴컴한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 뜻밖의 인물이 황태자의 침실을 찾아왔다.

16549585539196.jpg“전하!”

쿵! 리처드의 외침과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르문트는 본능적으로 일어나 침대맡의 검을 잡아 쥐었다. 다급히 로제타가 있을 소파 쪽을 살펴보니 이미 그녀는 그보다도 먼저 일어나 있었다.

16549585480907.jpg“무슨 일이야.”

16549585539196.jpg“윈저프리드 경께서……!”

16549585480879.jpg“황자가 방금 궁을 떠났습니다.”

검은 옷차림을 한 발레리안이 리처드와 러크의 옆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각각 다른 곳에서 일어난 아르문트와 로제타를 발견하고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16549585480879.jpg“일부러 새벽 시간을 노린 모양입니다. 어서 쫓아야 합니다.”

16549585480907.jpg“당장 가지.”

아르문트는 자다 깬 사람답지 않게 냉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49585480907.jpg“러크 경. 그대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궁을 지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16549585566894.jpg“예, 전하.”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아르문트가 로제타 쪽으로 잠시 시선을 두었다.

16549585480907.jpg“그대는 기사들 곁에 있어. 위험하니 혼자 있지 말고.”

로제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스름한 달빛 속에서 푸른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16549585480907.jpg“얼른 다녀올 테니 걱정 마.”

이를 염려의 눈빛으로 해석한 아르문트는 그녀의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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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어라 더 안심시켜주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시간은 없었다. 가벼운 입맞춤을 끝으로 아르문트는 궁을 나섰다. 리처드를 포함한 정예 기사 몇몇이 그의 뒤를 따라 말 위에 올랐다. 물론 발레리안도 함께였다. 아마 그레이한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발레리안이 그의 출궁을 빠르게 알아차린 덕이었다. 그러나 그레이한의 말이 워낙 발이 빠른 놈이라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 바쁘게 뒤를 쫓던 도중, 발레리안이 일순 뒤를 돌아 허공을 응시했다.

16549585480907.jpg“무슨 일인가!”

16549585480879.jpg“……아니요. 별것 아닙니다. 계속 가시죠.”

아르문트가 이를 눈치채고 묻자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연인이 나무까지 타며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줄 수야 없으니까. 그저 어차피 올 거라면 조금이나마 편하게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법을 걸어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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