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추격 (2)2022.03.20.
“황자 일행이 두 쪽으로 찢어졌습니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그레이한과의 거리가 대폭 좁혀졌을 즈음 발레리안이 돌연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레이한의 기사들이 아르문트의 추격을 눈치채고 양쪽으로 갈라진 모양이었다.
“하, 이 정도면 제대로 작정한 모양이군. 그레이한은 어느 쪽으로 갔지?”
“오른쪽입니다.”
“우리도 갈라져서 계속 쫓는다. 나는 윈저프리드 경과 오른쪽을 맡을 테니, 리처드 경이 다른 기사들과 함께 왼쪽을 맡아줘.”
“위험합니다, 전하! 전하를 노리고 판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리처드가 목소리를 높여 반대했다. 추격에 이렇게 바로 대응한다는 것은 여기까지 모두 예상했다는 뜻. 그렇다면 함정 또한 준비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 무엇보다 제 주군의 안위를 1순위로 생각하는 리처드로서는 그의 결정이 불안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반론했다.
“적어도 내가 위험할 일은 없다.”
“그건…….”
그렇기는 하지만. 리처드가 말을 삼켰다. 아르문트의 검 실력은 어지간한 기사들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기사단장이 인정하는 실력자인 리처드가 직접 검을 맞댄다 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 대마법사인 발레리안 윈저프리드까지 함께라면, 어지간한 함정쯤이야 모두 박살 낼 것이 분명하다. 괜한 걱정을 했군. 리처드가 민망함을 감추려 고삐를 더욱 강하게 잡았다. 아르문트는 그런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경들이나 몸조심하도록 해. 그대들의 안위도 내겐 무척 중요하니까.”
“……! 전하……!”
제 주군에게 이런 말을 들은 것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심지어 황태자 전하는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로제타에게야 쉴 새 없이 만발하는 미소지만, 리처드에겐 몹시 드문 일이었다.
“예! 명 받들겠습니다!”
리처드의 얼굴이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동시에 아르문트를 위해서 그 어떤 임무든 성공해 보이겠다는 의지도 함께 불탔다. 정작 불씨를 던진 아르문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갈림길이 나왔다. 명령한 대로 리처드는 다른 기사들을 이끌고 좌측으로 향했고, 아르문트는 발레리안과 함께 우측 길로 말을 몰았다.
“그런 말을 할 겨를도 있으시고. 여유가 넘치는군요.”
기사들이 멀어지자 발레리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빈정거리는 것이 분명한 말투인데도 아르문트는 별로 자극받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다지 여유롭지는 않다만. 그래 보인다면 경 덕분이겠지.”
네 실력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칭찬의 말이었지만 발레리안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아르문트가 전과 달리 유들유들하게 나오는 모습이 오히려 불쾌하기만 했다. 그러나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법. 멀지 않은 곳에는 로제타가 따라오고 있기도 하니, 이 이상 시비를 걸 수야 없다. 이제는 제가 할 일을 할 차례였다. 인적이 드문 빈민가로 들어선 순간, 발레리안은 예민한 감각으로 수상한 기운을 잡아챘다.
“멈추세요!”
히히힝! 갑작스레 고삐를 잡아채자 아르문트의 말이 놀라 투레질을 했다. 다행히 말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아르문트는 이유를 묻는 대신 경계하듯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머지않아 발레리안이 소리친 이유가 드러났다. 휘잉! 무언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몇 걸음 앞의 땅에 내리박혔다. 화살이었다. 그것도 황실의 문양이 그려진.
“매복입니다. 말에서 내리는 게 낫겠군요.”
발레리안은 제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리며 손 위로 마나를 모았다. 아르문트도 재빨리 내려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하늘 위로 화살들이 빗발쳤다. 발레리안이 능숙하게 보호 마법을 써 자신과 아르문트를 보호했다. 아르문트는 마법의 틈 사이로 들어온 화살 몇 개를 검으로 쳐냈다.
‘아주 쭉정이는 아니군.’
흥. 발레리안이 코웃음을 치며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틈 사이로 들어온 화살도 막으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던 그였다. 내버려 둔 것은 작은 심술이었을 뿐이다.
“황가의 화살로 황태자를 쏘아 죽이려 하다니.”
빠득. 아르문트가 이를 갈며 검 손잡이를 고쳐잡았다.
“죗값은 고작 목숨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가 앞으로 도약했다. 활잡이 놈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이미 파악했다. 아무리 꼭꼭 숨겨놓는다고 한들 살기만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커억!”
“끄어어……!”
고통에 찬 비명이 거리를 울렸다. 발레리안과 아르문트는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각자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난사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네 구의 시체가 바닥을 뒹굴었다. 아르문트는 그래도 성에 차지 않은 듯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이 모든 것을 계획한 이와 드디어 얼굴을 마주했다.
“좋은 밤이야, 동생?”
능청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금발의 남자. 그레이한이었다.
“형이 아무리 좋아도 이 새벽에 스토킹이라니. 그럼 못 쓰지.”
그레이한은 아르문트와 발레리안을 앞에 놓고도 걱정하는 낌새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여유가 넘쳐 보였다. 이것까지 모두 계획했다는 건가. 아르문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주변의 기운을 훑었다.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을 수도 있다.
“하하하! 겁먹은 꼴 하고는! 이 형님이 그리도 무섭나?”
“더러우니까 계속 형, 형 거리지 좀 말지 그래. 네놈이야말로 겁도 없군. 평소 조금만 두려워도 제 어미 치마폭에 들어가던 놈이 무슨 생각으로 이리 대담한 짓거리를 했을까.”
이제는 숨길 생각도 딱히 없어 보이고 말이야. 아르문트가 기도 안 찬다는 듯 그를 비웃으며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화살을 흔들어 보였다. 말로 상대의 기분을 더럽게 하는 것은 언제나 아르문트가 더 위였다. 그 증거로 그레이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다만 그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숨길 필요가 없지. 이 자리가 네 무덤이 될 테니까. 그리고 아마 빈민가 끝자락에 있는 우물에 네 시체가 버려질 거고. 우습지 않아? 평생을 그놈의 혈통만 내세우던 네가 빈민가에서 죽음을 맞는다니! 하하하!”
“웃는 건 나를 죽인 뒤로 미뤄두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뭐, 마지막으로 웃을 수 있을 때 웃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지하 감옥은 제법 추워서 웃음 따윈 안 나올 테니까 말이야. 아르문트가 쯧 혀를 차며 덧붙였다. 그러곤 다시금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레이한이 저렇게 나온다면야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흑마법사가 숨어 있을 거야. 조심하도록.”
“그쯤은 저도 압니다, 전하.”
“안다면 안심이군.”
아르문트와 발레리안이 동시에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러자 그레이한의 주위에 서 있던 기사들이 빠르게 나와 아르문트를 향해 겸을 겨누었다. 황실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아르문트는 짧게 자조하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예상보다 엄청난 힘에 검을 맞댄 기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걸 한 방에 못 죽이나. 발레리안은 로제타에 비하면 애송이나 다름없는 실력이라며 마음속으로 아르문트를 비난했다. 그러곤 그를 대신하여 기사들의 목을 단숨에 날려주기 위해 손 위로 마나를 모았다. 그러나 곧 방해가 들어왔다. 콰광! 반쯤 무너진 건물 사이에 숨어 있던 놈이 발레리안을 향해 거대한 불덩이를 날렸다. 하인 복장을 한 남자. 로제타를 다치게 한 그 흑마법사 놈이리라. 돌연 크게 다쳐 피를 흘리던 로제타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 겨우 참아왔던 분노도 울컥 솟았다.
‘저 새끼가 감히 로즈를…….’
발레리안의 푸른 눈 위로 섬뜩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위해선 흑마법사를 살려서 데려가는 것이 좋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그에게는 이를 신경 쓸만한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남자를 그 무엇보다 고통스럽게 죽여놓겠다는 다짐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발레리안은 흑마법사가 날린 불덩이를 가볍게 쳐냈다. 불덩어리는 그레이한의 기사 쪽으로 날아가 그의 몸을 불태웠다. 흑마법사는 재차 발레리안과 아르문트를 향해 공격 마법을 날렸다. 그러나 모두 발레리안의 손짓 몇 번에 의해 다른 쪽으로 날아가거나 아예 무효화됐다.
“약하군.”
발레리안이 헛웃음을 뱉었다. 로제타를 그토록 다치게 한 놈이 이렇게까지 약할 줄은 상상치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가 느꼈던 흑마법의 기운은 분명 이것보다는 훨씬 강력했었다. 혹시 실력을 속이고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흑마법사가 더 있기라도 하나? 방심한 그를 노릴 의도라면 한참을 잘못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분노한 상태라고 한들, 갑작스러운 공격 하나 대처하지 못할 그가 아니니까. 발레리안은 잠시 시선을 돌려 아르문트의 상황을 확인했다. 아르문트는 발레리안이 원하는 것처럼 속도가 빠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잘 싸우고 있었다. 수적으로 훨씬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밀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얼른 끝내고 합류해야겠군.’
발레리안은 이렇게 판단하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지척까지 다가와 자신에게 거대한 흑마법을 내리꽂는 흑마법사의 모습을 발견했다. 방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었다.
“경!”
아르문트 또한 이를 목격하고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콰과광!! 굉음과 함께 매캐한 흙먼지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아르문트는 여럿의 기사를 상대하며 흙먼지 속에서 발레리안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곧 먼지가 걷히고 두 마법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뭐 얼마나 대단한 기운을 숨기고 있나 했더니.”
발레리안은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졌을 뿐 조금도 다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팔은 흑마법사의 복부를 관통한 상태였다.
“고작 이거라고?”
“끄억……!”
발레리안이 우습지도 않다며 흑마법사의 몸을 그레이한 쪽으로 내던졌다. 기다란 팔은 이미 붉은 피로 온통 물들어 있었다. 그레이한이 서 있는 곳 앞까지 굴러간 흑마법사는 제 주군을 힘겹게 올려다보았다. 거친 숨결 사이로 절박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 전하……. 끄윽, 부디, 약속을…….”
흑마법사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명이 다한 모양이었다. 그레이한은 흑마법사에게 시선 한 줌 건네지 않으며 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커헉!”
마침 또 다른 기사 한 명이 아르문트의 검에 목이 베였다. 쓰러진 기사의 주위로는 선홍빛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래서.”
아르문트는 제 얼굴에 튄 피를 무심하게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흑마법사는 죽었다. 아직 그레이한의 기사들이 제법 남아 있어 아르문트가 혼자 처리하기에는 까다롭긴 했지만, 흑마법사와의 전투를 마친 발레리안이 합류한다면 결과는 뻔했다. 감히 라그나르의 황태자를 상대로 검을 겨눈 놈들은 모두 처형될 것이고, 그레이한 또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다. 이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그레이한은 여전히 느긋한 얼굴이었다. 그것이 아르문트의 마음속 한구석에 불안감을 피어나게 했다.
“뭐, 피도 제법 흘렸겠다…….”
그레이한은 흙바닥을 뒤덮은 뻘건 액체를 달갑다는 듯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이렇게 하려고.”
그가 해맑은 표정을 하고선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마침내 불안의 근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넓은 흙바닥 위로 핏방울이 요동치더니, 이내 이리저리 그림을 그리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었으나 무언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건……!”
붉은 선들의 정체를 깨달은 발레리안은 재빨리 마법을 써 몸을 피하려 했으나 마나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피로 그려진 마법진이 이미 발동된 탓이었다. 무력화 마법진. 모든 마법사가 가장 꺼리는 대상이었다. 한번 붙잡히면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데다가, 마법마저 쓸 수가 없으니까. 다만 자신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대마법사인 그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어지간한 마법진으로는 불가능하니까. 그러나 제 아래에 그려진 마법진은 어지간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하여 피로 그려진 것. 흑마법 중에서도 가장 극악하다 여겨지는 인신 공양 마법진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