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주인공 등장2022.03.24.
인신 공양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하다. 특히 죽은 사람이 많을수록, 또 죽은 사람의 기운이 거대할수록 마법진의 효과도 더욱 강해졌다. 이미 많은 사람이 이 마법진 위에서 죽음을 맞았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는 계속해서 마법진에 흡수되었고, 그럴수록 발레리안의 몸을 억압하는 힘도 커져만 갔다.
‘왜 그렇게 약한가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군.’
큭. 발레리안이 낮게 신음했다. 그는 흑마법사 놈이 이전보다 훨씬 약해진 이유를 이제야 알아차렸다. 마법진을 설치하는 데 기운을 다 쓴 나머지 힘이 없던 것이리라. 이 정도의 대규모 마법진이라면 마나 소비도 만만치 않았을 테고 말이다. 지금까지 발레리안이 마법진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걸 보면 이에 대한 조치도 미리 취해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를 잡기 위해 흑마법사가 여러모로 단단히 준비해둔 것이다.
“빌어먹을…….”
발레리안은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리며 제 팔다리를 구속한 힘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별 소용은 없었다. 몸은 보이지 않는 끈에 꽁꽁 묶인 것처럼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고, 숨 쉬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던 마나도 흑마법의 힘에 완전히 얼어붙었다.
“윈저프리드 경! 괜찮은가!”
발레리안과 제법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아르문트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다만 발레리안을 걱정하기에는 그의 상황도 썩 좋지 못했다. 기사인 그는 발레리안과 달리 마법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지만, 조금이나마 몸이 둔해지는 느낌은 들었다. 발레리안이 완전히 전투 불능의 상태가 돼버린 이상, 아르문트는 이 상태로 그레이한의 모든 기사를 상대해야만 했다. 실력만 본다면 그가 다른 기사보다 훨씬 우위이기는 하나, 다대일로 맞서 싸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르문트는 발레리안이 있는 쪽으로 최대한 다가가려 했으나 커다란 체구의 기사들이 그를 막아섰다. 여기저기에서 공격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크윽!”
다급히 피했음에도 기어코 검날이 그의 옆구리를 스쳤다.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발레리안을 구하러 갈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얼른 죽이고 가는 게 최선이야.’
아르문트는 어금니를 깨물며 검을 꽉 쥐어 잡았다. 부디 자신이 기사들을 처리하는 동안 대마법사가 버텨주기를 바라며. 한편 발레리안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는 제법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앞을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차갑기 짝이 없었으니, 다름 아닌 그레이한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기 좋군. 반반한 낯짝만 믿고 나대던 놈이 이리 얌전하게 구니 말이야.”
그레이한은 발레리안의 뺨을 툭툭 건드리며 킬킬 웃었다. 눈엣가시나 다름없던 대마법사 놈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니. 지금까지의 짜증이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발레리안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다시 기분이 추락했다.
“못생긴 놈이 앞에서 낄낄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저로선 괴롭습니다만.”
발레리안은 꼼짝달싹 못 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그리고 그레이한은 그런 모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아직도 네 놀이터인 줄 알아?!”
퍼억! 그레이한의 주먹이 주저 없이 발레리안의 얼굴을 강타했다. 붉은 입술이 터지며 피가 배어 나왔다.
“재수 없는 새끼! 재수 없는……!”
그레이한은 욕설을 뱉으며 발레리안을 계속해서 가격했다. 손으로 얼굴을 마구 때리기도 하고, 발로 무릎을 뭉개기도 했다. 제 손이 아파진 뒤에야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그는 씨근덕거리는 숨을 뱉으며 발레리안을 노려봤다. 반항도 못 하고 제게 얻어맞은 모습을 보자 도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들었다.
“평소에 무시하던 놈한테 처맞는 기분이 어때? 어? 어떻냐고, 이 계집애 같은 새끼야.”
그레이한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발레리안을 조롱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고작 이 정도에 빌빌거릴 사람이 아니었다.
“굳이 대답하자면…… 안타깝습니다.”
피식.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음을 흘렸다.
“황자라는 놈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시정잡배보다 못하게 굴고 있으니. 제국민으로서 안타까울 수밖에요. 참고로 주먹질은 제 친구가 장난으로 때리는 것만도 못하군요.”
쯧쯧. 발레리안이 혀를 찼다. 그러자 그레이한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감히…… 감히 계집 따위와 날 비교해?”
“계집 따위라뇨. 당신 따위와 비교당한 것에 제 친구가 기분 더러워야 할 일인데.”
뭔가 착각하고 있군요. 발레리안이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과연 말로써 상대를 깎아내리는 데에는 그만한 인재가 없었다.
“……너, 실수한 거야.”
돌연 그레이한의 눈빛이 변했다. 붉은 눈동자 위로 익숙한 기운이 떠올랐다. 증오가 번뜩이는 저 강렬한 눈빛은 분명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자의 것이었다.
‘이건 좀 위험하겠는데.’
발레리안은 느리게 심호흡을 하며 그를 올려다 봤다. 스르릉. 스산한 소리와 함께 그레이한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검 끝은 발레리안의 얼굴을 향했다. 내 얼굴에 정말 자격지심이라도 느꼈었나. 주제도 모르고. 발레리안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느긋하게 웃고는 있지만 사실 그리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어쩌면 지금 제 얼굴이 크게 다칠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했다. 여전히 자신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데다, 황태자는 다른 기사들을 상대하는 데도 벅차 보이고. 또 만약 로제타가 시간 맞춰 도착한다고 해도…….
‘나보다는 황태자 놈을 먼저 구할 테니까.’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황태자 대신 샹들리에 밑에 깔린 것만 봐도 확실하다. 다만 알고 있더라도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자신을 더 위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 당연한 거니까. 뭐, 난 흉터가 좀 있더라도 분명 아름다울걸. 발레리안은 애써 장난스러운 생각을 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시야 속에 날카로운 검날이 가까워지는 모습이 담겼다. 질끈. 그는 고통을 예상하며 눈을 감았다.
“경!!”
그 와중에도 아르문트가 자신을 걱정하듯 소리치는 게 영 불만스러웠다. 마침내 검날이 발레리안의 얼굴에 가까워진 순간. 채앵-! 두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주인공이 등장했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발레리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흙바람 속에 장밋빛 머리카락이 화려한 깃발처럼 휘날렸고, 푸른 눈동자는 어둠을 가르고 선명하게 빛났다. 로제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기사다운 얼굴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발레리, 괜찮아?”
아르문트가 아닌, 그의 앞에 말이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발레리안은 대답도 못 하고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로제?”
멀리서 아르문트의 당혹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다. 로제타는 제 연인에게 짧게 눈짓한 후 다시 그레이한을 마주 보았다. 대화는 임무가 끝난 뒤에 해도 충분할 테니까.
“하녀 년이 어떻게 이곳까지……!”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등장에 반쯤 얼이 빠져 있던 그레이한은 다급히 품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무슨 요행을 부렸는지 몰라도 하녀가 제 검을 멀리 쳐낸 탓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로제타를 향해 단검을 찔러넣었다. 아르문트가 위험하다 소리칠 새도 없이 로제타는 그레이한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뻐억-! 단검을 든 손을 쳐낸 그녀는 빠르게 허리를 돌려 그레이한을 걷어찼다.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끄……흐억…….”
단숨에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레이한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제대로 신음조차 뱉지 못했다. 로제타는 그런 그를 무시하며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들었다. 그러곤 주저 없이 아르문트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커억!”
단검은 아르문트를 노리던 기사의 가슴에 조금의 오차도 없이 박혔다. 아르문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사들의 목을 갈랐다. 느닷없는 상황에 당황한 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내주었다. 제 연인이 잘 싸우고 있는 것을 확인한 로제타는 이내 제 검을 땅에 박아넣었다. 마법진의 핵심이 있는 곳이었다. 다행히 전투에 집중한 아르문트는 그녀가 무얼 하고 있는지 볼 새가 없었다. 그 틈을 타 로제타는 재빨리 제 검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파직, 파지직! 소드마스터가 되기 직전의 기운과 강력한 흑마법의 기운이 맞부딪치며 전기가 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꽤 강한데.’
마법진에 담긴 기운이 예상한 것보다 짙어 보이자 로제타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왜 발레리안이 이렇게 당했는지 바로 이해가 갈 정도였다. 로제타와 발레리안의 기량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호각이기는 하나, 기사인 그녀는 마법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기에 상황은 달랐다.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전투가 끝나기 전 서둘러 기운을 더욱 불어넣었다. 콰앙! 피로 그려진 마법진이 크게 일렁이더니, 이내 커다란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마법진이 파괴된 것이었다. 흙먼지가 또다시 주위를 뒤덮었다. 뽀얗게 일어난 먼지 사이로 누군가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발레리, 내 손 잡아.”
로제타는 발레리안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그를 부축해주었다. 기운을 통해 먼지 속의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저 제 연인을 믿고 기다릴 뿐이었다. 곧이어 흙바람 사이로 최후의 승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각상 같은 얼굴을 다른 이의 피로 온통 물들인 남자. 아르문트였다.
“아르문트!”
로제타는 밝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제 손에는 아직 검이 들려 있었다. 첫 번째 생에서 아르문트가 하사했던 바로 그 검이었다. 왠지 이를 그에게 보여선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에 그녀는 재빨리 검을 뒤로 숨긴 뒤 반지로 모양을 바꿨다.
“로제! 그대가 왜 여기까지……! 어디 봐! 다친 곳은 없어?”
다행히 아르문트는 로제타의 검에 관심을 보이는 대신 그녀를 걱정하기 바빴다. 아마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보다시피 저는 멀쩡해요. 여기까지는…… 발레리가 마법으로 도와줘서 올 수 있었어요. 그렇지, 발레리?”
로제타는 망설이지 않고 제 친구를 팔았다. 실제로 그가 마법을 써준 덕에 빨리 올 수 있던 건 사실이니까. 발레리안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까닥거렸다. 많이 얻어맞아서 그런지, 정신이 쏙 빠져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위험하니 기사들 곁에 있으라니까.”
“음, 거기엔 대답하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걸요. 그리고 말했잖아요. 저는 언제나 당신을 지킬 거라고.”
로제타가 당당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때 아르문트는 이 말을 허무맹랑하다 여겼으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빠르게 발레리안을 막아선 것. 그레이한의 검을 쳐내고 명치를 걷어찬 것. 단검을 날려 정확히 기사의 가슴을 뚫은 것. 이 모든 행동이 고작 이삼 분 만에 이어졌다. 그레이한의 형편없는 몸놀림을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는 그의 기준일 뿐. 일반인의 기준으로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능숙한 실력이었다. 아르문트는 흔들리는 눈으로 로제타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무 묻고 싶은 것이 많은 탓에 차마 어떤 것부터 뱉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로제타는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을 이었다.
“궁금한 것들이 많겠지만…… 그건 조금 나중으로 미루는 게 어때요? 발레리가 많이 다치기도 했고, 1 황자도 얼른 포박해서 데려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
아르문트가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너무 로제타에게만 집중한 나머지 잠시 발레리안과 그레이한의 존재 모두 잊고 있던 탓이었다.
“그래. 그러는 게 낫겠군. 그레이한은 내가 포박해오지.”
아르문트는 낮은 목소리로 동의한 후 뒤를 돌아 그레이한에게 다가갔다. 그레이한은 로제타에게 한대 얻어맞고 기절했는지 의식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덕분에 포박하기는 아주 편했다.
“발레리, 괜찮은 거야? 힘들면 나한테 더 기대. 부축해줄게.”
“……고마워, 로즈.”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발레리안은 묘한 눈빛으로 로제타를 내려다보며 그녀에게 몸을 기댔다. 그리고 이 모습을 발견한 아르문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나도 다쳤는데.’
발레리안에 비하면 훨씬 작은 상처긴 하나 속상했다. 물론 대마법사가 많이 고생한 것도 알고, 친구로서 부축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와 별개로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아르문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애써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아침 해가 둥실둥실 떠올라 어둠을 밝혔다. 이제 황궁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묵혀왔던 일을 끝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