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승리의 기쁨2022.03.27.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호화로운 금장식과 커다란 그림들로 가득한 방. 황제가 병환을 앓게 된 이후론 자주 쓰지 않았던 이곳, 황제의 집무실로 오랜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최근 얼굴색이 많이 좋아진 황제는 상석에 앉아 침묵을 지켰고, 그에 반해 황후는 파리하게 질린 낯으로 목청을 높였다.
“황자가, 황자가 반란을 모의했다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도 황자의 성품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도 매일 폐하를 찾아가 문안 인사를 드리는 황자입니다. 그런 황자가 어찌…… 어찌 반란을 모의한단 말입니까!”
문안 인사와 반란이 대관절 무슨 상관인가. 아르문트는 황후의 어처구니없는 변명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더욱 우스운 것은 이러한 변명이 황제에게는 나름 먹힌다는 사실이었다. 황제는 고민하듯 주름진 얼굴을 더욱 구겼다. 이에 힘입어 황후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태자가 여색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할 때, 황자는 태자 대신 모든 일을 처리하면서도 이에 대해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태자는 황자를 이리도 욕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대신관, 황자의 상태가 어떻다 했지요?”
“심각하십니다. 갈비뼈가 수십 조각 났습니다. 최대한 치유하긴 했지만, 여전히 앉는 것조차 어려워하십니다.”
“들으셨지요. 그냥 부러진 것도 아니고 수십 조각이 났습니다!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반역을 모의했다며 누명까지 씌우다니,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답니까. 폐하, 부디 황자의 진심을 헤아려주십시오!”
목소리가 어찌나 억울하게 들리는지, 모든 게 거짓말인 걸 알고 있는 아르문트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황후가 아니라 배우를 했어야겠군. 아르문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황후께서는 지금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현장에만 가도 여전히 전투의 흔적과 마법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도?”
피식. 아르문트가 웃음을 흘렸다. 제 아들 하나 살려보겠다고 발악을 하는 황후의 모습이 너무도 우스워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화살이 황태자를 향했습니다. 이것이 반란이 아니라면, 대체 무어가 반란이란 말입니까?”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반항을 한 것이겠죠. 얌전히 죽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반란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애당초 그 마법진을 그린 것이 누구인진 어떻게 확신하나요? 당시 태자가 대마법사와 함께 있었다 들었습니다만.”
“그 말인즉, 내가 대마법사와 함께 황자를 해하려 했다는 뜻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태자의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인륜을 저버렸는지, 저로선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겨우 추론해보건대, 혹 황자가 태자의 자리를 넘볼까 겁이 나셨던 거겠지요.”
“하하하!”
아르문트가 느닷없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황후의 입에서 인륜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친구이자 모시던 아가씨였던 사람을 죽이고, 그 아들의 목숨까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아르문트는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계속해서 웃어댔다. 황제와 황후, 급하게 모인 귀족들까지 모두 당황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겨우 웃음을 갈무리한 그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걸친 채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황후 폐하도 아시다시피 1 황자 그레이한은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는 쭉정이입니다. 지혜도, 인망도 없는 놈이 어떻게 위협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놈이 황제가 되었다간 라그나르가 필연 쇠망의 길을 걸으리란 걸 모두가 잘 알 텐데요.”
“황태자!”
“예. 그리 크게 말하지 않더라도 잘 들립니다, 황후 폐하.”
귀가 다 아프군요. 아르문트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명백한 빈정거림에 황후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한편 귀족들은 대부분 그의 대담한 반응에 놀라 이리저리 시선을 교환하기 바빴다. 모르트마르 백작가와 연이 없는 일부 귀족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씰룩거리기도 했다. 1 황자 그레이한이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문트. 모욕적인 말은 삼가거라.”
여태껏 침묵하던 황제가 아르문트를 저지했다. 황제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시비비를 떠나 제 자식들이 서로 죽고 죽이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심란한 듯했다.
“예, 그러지요.”
아르문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황제가 저번처럼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만약 황제가 정말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면 진작에 그랬을 테니까. 마력핵 관련 조사 때 아르문트의 손을 들어준 것은 그저 오랜만에 아버지 행세를 한 것에 불과하다.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뒷맛이 영 썼다.
‘정말이지 우습기 짝이 없군.’
애초에 아르문트와 그레이한이 서로 죽일 수밖에 없는 판을 깐 것은 황제 본인이다. 그래놓고 이제 와 자상한 아버지인 척 괴로워하는 것은 기만이나 다름없었다. 아르문트는 제 아비의 이중성에 냉소하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사냥제 당시, 제 말이 발작을 일으켰던 것 기억하십니까? 말이 미친 듯이 날뛰는 바람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죠.”
“그래, 그랬었지.”
황제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이 의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말을 해부한 결과, 발작을 일으킨 원인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루나베리의 성분이 검출되었더군요.”
“루나베리? 그게 무엇이냐?”
“무색무취의 신경독입니다. 섭취 시 갑작스럽게 흥분하여 날뛰다, 오 분 안에 뇌가 망가져 사망에 이르는 극독이죠. 워낙 희귀해 구하기 힘들다 하던데…….”
아르문트가 황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허공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마주했다.
“어쩐 일인지 사냥제 직전 황자의 수하가 그 희귀한 것을 입수했더군요. 물론 그 증거는 이미 확보해두었습니다.”
그는 황후를 향해 생긋 웃어주고는 연기하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습니까? 이것 또한 우연입니까?”
황후는 이것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는지 잠시 흠칫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주장했다.
“조작이겠지요. 태자의 말을 어찌 믿습니까?”
“전투 현장에 죽어 있는 흑마법사의 마나 또한 이미 조사를 마쳤습니다. 마력핵에 담긴 마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는 황자의 하인으로 일하던 자로, 황자가 황궁을 나갈 당시 동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문을 지키던 기사가 그러기를, 황자가 거칠게 확인을 거부한 탓에 그자가 조사를 마친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더군요.”
아르문트는 황후의 말을 무시하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리고 그녀가 무어라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부연했다.
“참고로 황후께서 또 믿지 못하실까 봐, 마나 일치 여부는 마탑에도 검사를 부탁해두었습니다. 아마 하루 내로 결과가 도착할 겁니다. 설마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 선언한 마탑까지 제가 조종했다고 말하진 않으시겠죠.”
“그자가 태자가 심어둔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알아본 바로는 황후가 직접 그 흑마법사를 고용했다고 하던데. 저야말로 궁금합니다. 별다른 추천장 하나 없던 이를 무슨 생각으로 고용했습니까?”
몰아치는 추궁에 황후는 제 입술 안쪽의 살을 꾹 깨물었다. 예상보다 황태자가 아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이미 한참 전부터 이런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반쯤 죽은 사람처럼 살던 놈이거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악착같이 변했는가.
‘그 여자.’
그래, 그 여자. 별것도 아닌 하녀 계집이 나타난 뒤로 모든 게 바뀌었다. 황후는 제 앞에서 해맑게 인사하던 그 뻔뻔한 낯짝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저는 그저 형편이 절박해 보여 안타까운 마음에 고용했을 뿐입니다. 애초에 추천장이 없는 자가 지원할 수 있었던 것부터 다른 이의 개입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폐하. 이쯤 되면 대신관의 능력 또한 몹시 의심스럽습니다. 어찌 대신관이라는 자가 황궁에 흑마법사가 숨어든 것 하나 알아차리지 못한단 말입니까? 심지어 그는 황태자의 침실에 저주가 가득하던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마력핵에 담긴 마나 또한 잘 구분하지 못했으며, 그가 아닌 다른 신관에게 치유 받은 후에야 제 몸 상태도 한결 좋아졌습니다.”
아르문트는 또다시 황후의 말을 자르며 화제를 돌렸다. 그는 심란한 얼굴로 황제를 응시했다.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진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떡밥은 충분히 뿌렸으니 이제 물고기를 낚을 순서였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무척 조심스럽지만……. 폐하께서 오랫동안 병환을 앓아온 것도 어쩌면 누군가의 모략일 수 있다 사료됩니다.”
“황태자! 어떻게 그런 위험한 발언을……!”
“저 또한 있어선 안 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폐하의 안녕을 바란다면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말해 보거라.”
황제가 손을 들어 황후를 저지했다. 여태껏 한발 물러서 상황을 관망하던 그였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안타까움만 가득하던 얼굴 위로는 노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사냥제 날까지 폐하의 몸 상태는 매우 좋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이 터진 이후 눈에 띄게 호전되었죠. 신관들조차 당황할 만큼 급작스럽게 말입니다. 이것이 무얼 의미하겠습니까?”
확실히 최근 들어 그는 몸 상태가 유난히 좋아진 걸 느꼈다. 사지에 추가 매달려 있던 것처럼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고, 가래가 들끓어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던 것도 많이 개선되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아르문트의 입지가 강해진 뒤부터라는 것이었다.
“원래는 저를 죽인 뒤 폐하까지 해하려 하였으나, 계획한 것과 달리 제가 죽지 않았기에 작전을 바꾼 겁니다. 그 상태로 폐하께서 승하하신다면, 왕위는 황태자인 제가 잇게 될 테니까요.”
황제의 얼굴이 크게 뒤틀렸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반란 모의보다도, 심증만 존재하는 황제 암살 모의가 그를 훨씬 더 분노하게 했다. 아르문트가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어째서 그레이한이 폐하를 그리도 자주 찾아갔겠습니까? 현명하신 폐하시니, 그가 효심이 지극한 편이 아니라는 건 느끼셨을 텐데요.”
아르문트는 황후가 했던 말을 역이용함으로써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이내 분노에 찬 외침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1 황자 그레이한을 당장 투옥하라!”
황제가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지르자 귀족들도, 기사들도 모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황후는 경악한 얼굴로 일어나 얼른 황제의 곁에 매달렸다.
“폐하!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야기는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습니다!”
눈가에 눈물을 주렁주렁 달고 애원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처량해 보였다. 이에 황제가 움찔거리는 찰나, 아르문트의 서늘한 목소리가 그의 분노를 다시금 일깨웠다.
“모르트마르의 권세가 황궁에도 퍼지지 않은 곳이 없다는 말은 들었지만. 황실의 기사가 감히 황제 폐하의 명령에 불복하는가.”
그의 말대로 기사들은 분명 황제의 명령을 들었음에도 어쩔 줄 모르고 상황만 살피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황제는 기어코 이성의 끈을 놓았다.
“당장 황자를 투옥하라 했다!!”
“예, 폐하!”
목이 터질 것 같은 고성에 기사들은 다급히 집무실을 떠났다. 제 침실에서 회복 중인 그레이한을 체포하러 가는 것이었다.
“아르문트, 이번 일에 대한 조사 권한은 모두 너에게 넘기겠다!”
“폐하!”
“시끄럽소, 황후! 보는 눈이 있어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니 끝을 모르고 기어오르는군!”
황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늘 골골대기 바쁘던 황제가 제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 오라비와 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수치심에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황자에게 정말 죄가 있다면 황후 또한 무고할 수 없을 터. 황자의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당신은 방에만 얌전히 있으시오! 몰래 외출했다거나, 하인을 통해 황자에게 말을 전했다는 소리가 들린다면 내 가만있지 않겠소.”
전례 없는 대우에 귀족들의 사이로 헉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모르트마르 백작의 눈치를 보며 손톱을 뜯어댔고, 또 누군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며 흐뭇하게 웃었다. 정작 아르문트는 크게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황제 앞에서 대놓고 기뻐할 수도 없거니와, 승리했다는 기쁨보다는 얼른 기사단 식당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로제타가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다 함께 축배를 들기 위해서였다. 남자가 득실거리는 곳에서 술이라니. 묻고 싶은 게 많은 걸 떠나,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곁을 지키러 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