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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모든 것이 사랑이었음을 (115/145)


115화. 모든 것이 사랑이었음을
2022.04.07.


기대하듯 제 아들의 반응을 살피던 황제의 표정이 순간 애매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곧장 차를 마시리라는 예상과 달리 아르문트가 느닷없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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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엇이냐?”

황제는 두 눈을 껌뻑거리며 물었다.

자세히 보니 작은 스푼 같기는 한데, 저런 걸 왜 지니고 다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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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끼는 티스푼입니다.”

아르문트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황제에게 굳이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

그가 자신의 편이라는 게 확실하지 않은 한, 가진 패는 최대한 숨기는 게 나을 테니까.

아르문트는 티스푼을 깨끗하게 닦은 뒤, 찻잔 안에 넣고 느긋하게 휘저었다.

잠시 살펴본 결과, 차에는 독이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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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과민했나.’

아르문트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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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냐? 맛이 아주 독특하고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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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독특하군요.”

입안에 미끈거리듯 남는 감각과 특이한 향이 과연 남다르긴 했다.

그러나 다시 찾을 만큼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희소하고 값비싸다 해서 그에게 특별해지는 건 아니니까.

한편, 이러한 진심을 알지 못하는 황제는 그의 대답이 퍽 만족스러운지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못내 불쾌해 아르문트는 빠르게 본론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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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쩐 일로 절 부르셨습니까?”

고작 차나 마시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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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아들을 만나는데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겠느냐. 함께 좋은 차도 마시고, 대화도 나누는 게 부자의 정이거늘.”

아르문트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입을 열었다간 날 선 말이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자신을 따로 챙긴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면서, 이제 와서 아버지 행세라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올 것 같았다.

황제 또한 제 말에 어폐가 있음을 느꼈는지 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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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네가 무사해서 참 다행이다. 대마법사에게는 큰 빚을 졌구나. 듣기론 그 하녀가 전투 현장에 따라가 널 도왔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로제타가 언급되자 아르문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어느새 소문이 여기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따로 제재하지 않은 이상 당연한 일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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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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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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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필드 남작가에서부터 오랫동안 검술을 수련했다고 합니다. 웬만한 기사 못지않은 실력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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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기사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여자치고는 대단하군. 내 메이필드 남작을 불러 따로 치하해야겠어.”

날카로운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어째 대화를 할수록 짜증만 치밀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아르문트는 어금니를 한번 강하게 깨물며 목구멍까지 차오른 지적을 애써 삼켰다.

자신에 대한 지적은 모두 공격으로 치부하는 사람이다.

그런 자에게 괜한 소리를 해봤자 자신만 피곤해질 뿐이라는 걸 아르문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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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아르문트. 너도 슬슬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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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경멸 어린 표정이 나오려는 걸 겨우겨우 참고 있던 아르문트가 느릿하게 되물었다.

로제타에 대한 이야기 후 다음 주제가 결혼이라니. 약간의 기대감과 커다란 불안감으로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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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나이는 차고도 남았거늘, 뭘 그리 놀라느냐? 혹 생각해둔 여자는 있고?”

황제가 허허, 하고 인자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아르문트는 의중을 파악하고자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의도로 묻는 건진 모르겠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입술을 떼기도 전 단호한 목소리가 그를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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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안 된다는 것, 너도 잘 알겠지.”

아르문트의 얼굴이 삽시에 일그러졌다.

황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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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아들아. 안 그래도 네 입지가 그리 견고하지 않은데, 깎아내릴 거리를 굳이 직접 쥐여줄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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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위해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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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깝게 생각하지 말아라. 아예 만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니 말이다. 나라고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느냐.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현재 상황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적응해라. 정부로서 만나는 건 막지 않으마. 그렇지만 결혼은 루니엘라 공녀와 해야 한다. 그게 네 입지에 훨씬 도움 될 거야.”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말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아르문트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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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지를 그토록 신경 쓰고 계신 줄은 몰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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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앓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널 위해서 한다고 했던 일들이 오히려 널 힘들게 했으리란 걸. 그리고, 내 몸이 많이 늙었다는 것도 말이다.”

황제가 씁쓸하게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아르문트를 바라보는 두 눈에는 이유 모를 그리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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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잠시 정원을 산책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숨이 벅차서 주저앉게 되더구나. 분명 병은 거의 나았는데…… 체력은 아닌 게지. 노화라는 게 참 무섭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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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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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급한 성미하고는. 그것도 나를 참 닮았어.”

아르문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추억 속에 젖어 있는 황제의 모습이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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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있다간 괜한 사고나 칠 것 같군.’

아르문트는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며 화를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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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면…….”

얼른 대화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야겠다고 다짐하는 찰나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선언이 황제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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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문트, 이제 슬슬 네게 황위를 물려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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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죽을 때까지 황제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가, 여태껏 제대로 된 확신 한번 주지 않았던 그가. 저런 말을 하다니. 제 귀로 똑똑히 들었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르문트는 차마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황제를 응시했다.

황제는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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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았느냐.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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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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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식은 최대한 빨리하는 게 낫겠구나. 황자 일로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정리할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너도 여자 문제는 그전까지 잘 해결해두거라. 루니엘라 공작에게는 내 직접 얘기해두마.”

아르문트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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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거라. 생각보다 이 아비가 네가 원하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으냐?”

황제가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뱉은 그 말이 아르문트의 마음을 깊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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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

그래, 분명 황위는 자신이 오래도록 바라오던 것이었다.

오로지 그것을 목표로 진흙탕이나 다름없는 황궁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남았다. 황제가 된다면 어머니에 대한 복수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것이 정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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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황태자. 이 알량한 직함 하나가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었기에, 그저 처절하게 매달렸을 뿐이다.

아르문트는 알고 있었다.

살아 있음에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자신을 처음으로 살고 싶게 한 것.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 것.

가슴이 터질 것처럼 설레다가도, 또 행여 놓치게 될까 두려워 눈물을 흘리게 한 것.

이 모든 것은 고작 황위 따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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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선 여전히 제 마음을 전혀 모르십니다.”

사랑이었음을.

동화에나 나올법한 단어라며, 한때는 어쭙잖다 비웃었던 바로 그것이, 이제는 그의 전부가 되었다는 걸.

이제는 모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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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랑하는 여인을 정부라는 수치스러운 자리에 둘 수 있습니까. 진정으로 사랑해 마지않는다면 그럴 순 없습니다. 그저 이기심을 사랑으로 포장하는 것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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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여태껏 미소가 만연하던 황제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자신만만하던 눈동자에도 노기가 깃들었다. 한때 현 황후를 정부로 두었던 것을 신랄하게 지적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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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행복을 진정으로 위하신다면, 메이필드 영애와의 결혼을 허락해주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제게는 황위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황제는 입을 쩍 벌린 채 턱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르문트가 황위조차 포기하겠다는 말을 꺼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고작, 여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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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구나! 이 라그나르의 황태자인 네가 어찌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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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제가 몇 차례 죽을 위기를 넘기다 보니 정신이 조금 나갔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이미 이렇게 된 것,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적응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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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탁!

아르문트가 테이블 위로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상체를 앞쪽으로 숙였다.

일순 그의 주위로 진득한 위압감이 번졌다.

황금빛 눈동자가 먹잇감을 바라보듯 기이하게 번들거리자 황제는 본능적으로 움찔 몸을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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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기대치는 모두 맞춰드리겠습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어쩐지 살이 바르르 떨려왔다.

꿀꺽. 황제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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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으로서의 대접도 모자람 없이 챙길 겁니다. 그러니 부디, 결혼 만큼은 폐하께서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십시오.”

살벌한 기세와는 달리 말투는 제법 공손했다.

황제는 반쯤은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으나 다시 역정을 내지는 못했다. 그에게는 이제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타협할 수 없다면 배려해주듯 넘어가는 것이 차라리 모양새가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태도를 바꾸기에는 제 자존심이 걸렸다.

그때, 아르문트가 먼저 고개를 숙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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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황자의 계략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몇 번이고 절 구해준 사람입니다. 어진 황제가 되기 위해서라도 그 마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습니다. 재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제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마음껏 선심 쓰듯 굴 수 있도록 약간의 미끼를 던져주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냉큼 미끼를 문 황제는 쯧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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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은인을 정부로 삼았다는 말이 도는 것도 이미지엔 좋지 않겠지. 알았다. 네 말대로 조금 더 생각해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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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폐하. 피곤하실 텐데 저는 먼저 일어서보겠습니다.”

아르문트는 옅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는 굳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 다만 뒤돌아 가는 아르문트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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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많이 남았구나.”

그의 말대로 아르문트의 찻잔에는 여전히 차가 반 이상 남아 있었다.

아르문트는 잠시 멈춰 서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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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귀한 것이라 그런지 제 입에는 영 맞지 않더군요.”

다시금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한 그는 미련 없이 황제의 집무실을 떠났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홀로 남은 황제는 차를 몇 모금 더 마시다 이내 내려놓았다.

향이 너무 독특해서 더 마시고 싶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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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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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근처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금발의 하인이 다가와 분주하게 테이블을 정리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황제의 뒷모습으로 묘한 시선이 닿았다.

***

한 하인이 황후궁의 복도를 소리 없이 걸어갔다.

금발에 어리숙한 인상을 지닌 하인. 방금까지만 해도 황제를 모시던 이였다.

커다란 방문 앞을 지키던 경비는 분명 그를 보았음에도 모른 척 자리를 비켜주었다.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하인은 허리를 숙여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두 낱낱이 고했다.

창문 앞에 서 있던 한 여인은 시체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이 모든 것을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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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기나긴 곱슬머리가 바람에 서서히 흔들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일순 가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얼굴이 드러났을 때.

여인, 황후의 입가에는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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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년이 문제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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