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황후가 되는 것
(116/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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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황후가 되는 것
2022.04.10.
광인.
황후를 본 사람들은 모두 같은 단어를 떠올렸다.
자신의 방에 갇혀 처분만을 기다리는 상황에도 시간에 맞춰 화려한 드레스를 챙겨입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빛의 곱슬머리를 몇 시간이고 끊임없이 빗질하는 모습은 도무지 미쳤다고밖에는 설명이 되질 않았다.
특히, 지금처럼 미소를 짓고 있을 때면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광기가 느껴졌다.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적안도, 너무 자주 짓씹어 피인지 립스틱인지 알아볼 수 없는 붉은 입술도. 하나같이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뭐, 이 상황에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배기겠냐마는.’
금발의 하인은 황후의 인형 같은 얼굴을 흘끔거리며 생각했다.
황제가 병환을 앓는 동안 황후는 자타가 공인하는 황궁의 실세였다. 황태자는 힘없는 허울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의 사용인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1 황자 그레이한이 황위에 오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상태를 보라.
그렇게 고고하던 사람이 방 한 칸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꼴이라니. 심지어 그리도 아끼던 아들은 반역죄로 수감되었고, 황제는 황태자에게 황위를 넘기겠다 선언했다.
모르트마르 백작의 권세가 여전한 이상 황자가 사형될 일은 없을 테지만, 고작 그것에 만족하기에는 황후의 추락이 너무도 컸다.
“오브리.”
“예, 폐하.”
황후의 부름에 밀리엄 백작 부인이 나긋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차림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에는 푸른 멍 자국이 가득했다.
“그대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밀리엄 백작 부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우선-.”
황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할 일을 읊어주었다. 밀리엄 백작 부인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모든 내용을 경청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이내 황후의 시선이 그녀의 팔 쪽을 향했다. 가장 멍이 많은 곳이었다.
황후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뻗었다.
이내 하얀 손이 밀리엄 백작 부인의 팔을 사납게 움켜잡았다.
“저번처럼 실수하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두 번 봐주는 건 없어.
황후가 장난을 치는 것 같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밀리엄 백작 부인은 입술 안쪽을 강하게 깨물어 고통을 참아냈다. 그러곤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신음 한번 흘리지 않는 모습이 지독하군.
아직도 허리를 숙이고 있던 하인이 기겁하여 작게 몸서리를 쳤다.
그때, 황후의 시선이 돌연 하인을 향했다.
고작 시선만으로도 숨이 막혀오는 기분에 하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더욱 숙였다.
“오브리.”
“……알겠습니다.”
뭘 알겠다는 거지? 하인이 의아해 했다.
궁금했지만 이를 물어볼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백작 부인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아, 수고비를 주시려는 거구나.’
평소에는 황후 폐하가 없으실 때 따로 줬었는데. 뭐, 일찍 받는다면 그야 나쁠 게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느닷없이 밀리엄 백작 부인이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아 왔다. 돈을 건네주려는 모양이었다.
하인은 오늘 비싼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밀리엄 백작 부인의 손에서 빛나는 날카로운 단검을.
푸욱!
“컥-!”
발버둥 칠 여유도 없이 칼날이 하인의 목을 파고들었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방금까지만 해도 맛있는 저녁을 기대하던 남자는 이내 한 구의 시체가 되었다.
“치워.”
“예.”
기다리고 있던 경비들이 익숙하게 다가와 시체를 정리했다.
“오브리, 그대는 이만 가봐.”
“예, 폐하.”
황후는 지루하다는 듯 다시 뒤를 돌아 창문을 바라보았다.
슥, 스윽. 빗질하는 소리만이 적막 속에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
아르문트가 떠난 뒤, 로제타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옷을 갈아입었다.
황실에서 준 하녀복이나 아르문트가 사준 원피스만 주야장천 돌려 입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다른 옷을 입을 작정이었으니.
바로 기사들이 훈련할 때 입을 법한 상의와 바지였다.
머리까지 질끈 묶어 올리자 과거 기사이던 시절과 비슷한 모습이 나왔다. 다만 확실히 얼굴은 훨씬 어려 보였다.
‘어리긴 어리구나. 아직 젖살도 다 안 빠졌네.’
로제타는 새삼 자신이 시간을 돌아왔다는 걸 실감했다. 지금까지는 아르문트를 지키는 데만 집중하느라 거울을 길게 들여다볼 시간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이 얼굴로 소드마스터라니. 나라도 안 믿겠다.’
엄밀히 따지면 아직 소드마스터는 아니긴 하지만.
로제타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슬슬 페이즐리를 만나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곧 훈련장에 도착했다.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제타!”
“아, 페이즐리. 안녕-.”
로제타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느닷없이 페이즐리가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몹시 당황스러웠으나 로제타는 빠르게 페이즐리를 받아냈다.
페이즐리는 그럴 줄 알았다며 배시시 웃었다.
“저 다 들었어요. 이번에 로제타가 전하와 대마법사의 목숨을 구했다면서요?”
어쩐지 눈이 과하게 반짝거리더니.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저번에는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제가 검술을 배웠다는 건 비밀이었어서…….”
“사과할 필요 없어요! 그런 말보다 중요한 건, 로제타가 절 이곳 훈련장으로 불렀다는 거죠!”
로제타의 품에서 폴짝 내려온 페이즐리가 뜬금없이 빙그르르 돌았다. 자신의 차림새를 보라는 의미였다.
페이즐리는 로제타처럼 훈련복을 입고 있었다. 물론 훈련을 위한 옷이라는 것만 비슷할 뿐, 로제타가 입은 것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깔끔하긴 했다.
“제게 가르침을 주시겠다는 뜻, 맞죠? 얼른 맞다고 해주세요!”
페이즐리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장난감을 기대하는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세상에. 황태자비 전하의 이런 모습을 볼 줄이야.’
오랜만에 이전 생의 페이즐리를 떠올린 로제타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것은 황태자비가 아닌 페이즐리였다. 자신의 새로운 친구이자, 기사라는 꿈을 지닌, 똑똑하고 매력적인 페이즐리.
그렇기에 로제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주는 힘들더라도, 시간이 될 때마다 가르쳐드릴게요.”
“와! 너무 고마워요, 로제타! 아니, 이제 스승님이라고 부를게요!”
페이즐리가 방방 뛰기까지 하며 기뻐했다.
로제타는 그런 그녀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지금은 기뻐하게 두지 뭐.’
앞으로는 미소 지을 일 따위 없을 테니까.
로제타가 해맑은 얼굴로 살벌한 생각을 하며 수련용 검을 뽑아 들었다.
기사단장이던 시절, 수련 방식이 워낙 혹독해 부하들에게 악마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그녀였다.
물론 제 실력을 숨겨야 하니 이전과 똑같이 굴 수야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살살할 생각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 우선 실력부터 확인해볼까요?”
“네!”
페이즐리는 곧 있을 수난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밝게 대답했다.
그리고 로제타가 장담한 대로, 그것이 그날 그녀가 보여준 마지막 미소였다.
조금 뒤, 페이즐리는 반쯤 실신한 꼴로 황궁을 떠났다.
테오도르 신관이 기겁하여 치유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한 걸음도 걸을 수가 없어 집에 돌아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로제타는 테오도르 신관의 원망 어린 시선을 가뿐하게 무시하곤 방으로 향했다.
‘휴우, 개운하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무척 신선하고 재밌었다. 페이즐리가 유독 열정이 있는 편이라 더욱 그랬다.
덕분에 어제 밤새 아르문트에게 괴롭힘당하며 바닥났던 정신력이 다시 차오른 기분이었다.
‘그 정도면 꽤 재능도 있는 편이고. 앞으로도 가르치는 맛이 나겠어.’
로제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한 시간 뒤에는 마담 르블랑과의 약속이 있다.
그 전에 얼른 대충이나마 준비를 마쳐야 했다. 아무래도 나름 아르문트의 어머니 같은 사람과의 만남이니까.
그렇게 한창 머리를 정돈하고 차를 준비하던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아르문트였다.
“아르문트? 벌써 왔어요?”
원래는 조금 더 늦게 온다고 했었는데, 무슨 일인지 일찍 끝난 모양이었다.
“로제.”
아르문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리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척 보기에도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아침까지만 해도 얼굴이 화사하기 그지없었는데. 지금은 짙은 어둠이 눈가에 드리워져 있었다.
놀란 로제타가 재빨리 그를 향해 다가갔다.
“전하. 무슨 일이라도…….”
그녀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아르문트가 갑작스럽게 그녀를 와락 껴안은 까닭이었다.
황제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걱정이 밀려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로제타는 그를 마주 안으며 가만히 침묵했다.
“……오늘 너무 힘들었어.”
아침까지만 해도 참 좋았는데.
아르문트의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로제타는 그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요, 아르문트. 힘들었을 텐데 잘 견뎠어요. 장하다, 우리 전하.”
아르문트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 나이에 장하다는 소리를 들을 줄이야. 민망할 법한 표현인데도 기분은 좋기만 했다.
“……고마워. 힘이 나는군.”
고작 말 몇 마디 들은 것뿐인데 신기하게도 훨씬 상태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르문트는 로제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천천히 시선을 마주했다.
“정말 내 정신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걸까. 그대가 말하는 ‘전하’는 어쩐지 다르게 들려.”
“그야 사랑이 담겼으니까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군.”
농담으로 한 소리건만 아르문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가 귀여워 로제타는 쿡쿡 소리 내 웃었다.
“그럼 앞으로는 그것도 애칭으로 쳐줘요.”
“그럴 수야 없지. 내가 아무리 상태가 별로더라도 그런 수작에는 안 넘어가, 로제.”
“이런, 아까워라.”
로제타는 그의 품에 쏙 안긴 상태로 그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아르문트는 홀린 듯 가만히 그녀의 미소를 응시했다.
잠시의 정적 뒤 그가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로제. 나는…… 이렇게 그대와 함께 있는 게 정말, 너무 행복한데. 그대도 그런가?”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요?”
“……무서워서. 혹시나 나만 이리 행복한 걸까 봐. 그래서 언젠가…….”
언젠가 그대가 나를 떠나갈까 봐.
아르문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도 두려운 가정이기 때문이었다.
“아르문트, 저는요.”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 또한 항상 비슷한 걱정을 해왔으니까.
“저는, 몇십 년을 통틀어서 요즘이 제일 행복해요. 정말로요.”
로제타는 정말 그녀의 모든 회귀를 합쳐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느꼈다.
아르문트가 죽지 않고 살아 제 곁에서 사랑을 말하는데. 그 무엇이 이보다 행복할 수 있겠는가.
“……몇십 년이라니. 누가 들으면 그대 나이가 오십은 넘은 줄 알겠군.”
“하하, 그럴 리가요.”
물론 회귀한 시간을 다 합치면 그 가까이 되지만. 로제타가 웃으며 말을 삼켰다.
아르문트는 입가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로 로제타를 응시했다.
그녀와 장난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것은 몹시 즐거웠지만, 이제는 진지한 얘기를 꺼내야 할 때였다.
“로제.”
“네?”
“폐하께서 내게 황위를 물려주겠다 하셨어.”
흠칫. 로제타의 몸이 빠르게 굳었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래진 눈으로 아르문트를 바라보았다.
“곧, 계승식이 있을 거야.”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렸다.
아르문트가 황제가 된다. 드디어 그 모습을 내 눈으로 볼 수가 있다.
수년간 그녀가 바라오던 것인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니.”
다만 동시에 약간의 불안감도 샘솟았다.
황제와 하녀. 연인 이상이 되기엔 신분 차가 너무도 심하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대도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해.”
“……마음의 준비라면, 어떤 것에 대한…….”
로제타가 더듬거리며 질문하자, 아르문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내가 황제가 된다면, 그대는 황후가 되는 것이 당연하잖아.”
황태자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려면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그가 그녀의 볼을 약하게 꼬집으며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