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나는 너처럼 착하지 않아서
(118/145)
118화. 나는 너처럼 착하지 않아서
(118/145)
118화. 나는 너처럼 착하지 않아서
2022.04.17.
발레리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엄청난 소식인 만큼 고개를 돌려 로제타를 바라볼 법하건만, 여전히 시선은 앞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로제타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그의 옆에 앉았다.
흘끗 눈치를 보자 얼음처럼 투명하고도 푸른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너무 놀라서 굳은 모양이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로제타도 아르문트에게 처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니까.
그녀는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부연했다.
“나더러, 황후가 될 준비를 하라고 하더라고.”
황후. 이 단어를 제 입에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에겐 여전히 너무 과분한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황후라니. 너무 안 어울리긴 한다. 안 그래?”
로제타가 머쓱하게 웃으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고개를 살짝 기울여 발레리안을 응시하자 그제야 시선이 마주했다.
발레리안은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가 파르르 떨렸고, 입매는 딱딱하게 굳었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이내 단단하게 맞물려 있던 입술이 벌어지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어떨 것 같은데.”
느닷없는 질문에 로제타는 두 눈만 껌뻑거렸다.
발레리안은 어금니를 꽉 문 채로 말을 이었다.
“황후가 되면.”
황후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힘든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아마 그녀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에 푸른 핏대가 불거졌다.
거칠게 숨을 들이켠 그는 겨우 다음 말을 꺼냈다.
“행복할 것 같아?”
핵심을 꿰뚫는 질문이었다.
행복이라.
로제타가 반들반들한 돌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황후가 된 제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수월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과거 황태자비였던 페이즐리의 모습에 제 얼굴을 덧씌우는 정도가 한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낯설기만 했다.
그녀는 황가를 위해 몸 바쳐 일했으나, 이는 제국의 부흥 따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아르문트에게 충성을 다했을 뿐이다.
“잘…… 모르겠어.”
황후는 라그나르의 국모로서 제국민의 안녕을 위해 평생을 몸 바쳐야 한다.
황제를 도와 재정을 관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귀족들을 원만히 다스려야 하며, 아이도 여럿 낳아 후계에 대한 의무를 수행해야 할 테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자유는 결코 누리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사실, 자신이 없는 것 같아.”
정말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황후로서 살며 행복할 수 있을까.
로제타는 차마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불안이 깃든 순간, 발레리안의 얼굴에는 화색이 묻어났다.
불구덩이에 떨어졌다 다시 올라온 기분이 이러할까.
꽉 막혀 있던 가슴에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제야 겨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하.
회생의 숨을 길게 몰아쉰 발레리안이 제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너무 기뻐 하마터면 미소를 지을 뻔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고작 결혼을 망설였다고 이렇게까지 희열에 차다니.
제 꼴이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걸 알았다.
로제타가 별생각 없이 던져준 상념 하나를 부여잡고 목숨을 연명하는 제 모습이 거지새끼만도 못하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누군가 꼴사납다 욕하더라도 그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그렇지만.”
그러나 로제타는 그 유일한 길마저 끊어버리려는 모양이었다. 아무런 걱정도, 의심도 하지 않은 채.
“평생 전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응. 그것만으로 행복할 거야.”
이건 확신할 수 있어.
로제타가 햇살 같은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덧붙였다.
차마 애원할 새도 없었다.
가슴께가 절로 간지러워질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가, 한때는 그를 깊은 구덩이 속에서 꺼내놓았던 미소가. 지금은 발레리안의 가슴을 처참히도 찢어놓았다.
쏴아아…….
창을 넘어 빗소리가 들려왔다.
빗방울이 쉴 새 없이 쏟아지며 흙바닥에 내려앉은 잎사귀를 적시는 소리가 만추의 끝을 알리는 듯했다.
로제타는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괜스레 시선을 창 쪽으로 옮겼다.
발레리안과 아무런 허물이 없는 사이라곤 하나, 이렇게 깊은 얘기를 나눈 적은 많지 않았기에 민망한 마음이 솟았다.
“땀도 식었겠다, 슬슬 갈까?”
곧 있으면 아르문트가 깨어날 시간이었다. 일어나 자신이 곁에 없는 걸 알게 되면 분명 난리가 날 테다.
읏차, 로제타가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땀이 식은 자리에 한기가 느껴졌다.
날이 많이 추워지긴 한 모양이야.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겉옷을 걸쳤다.
“다음번 대련에서는 봐주는 거 없기야.”
로제타가 장난스럽게 경고했다. 그러곤 머릿속으로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집중한 탓에 그녀는 발레리안이 이상하리만큼 말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작은 힘이 그녀의 발걸음을 저지했다.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발레리안이 보였다.
그는 고운 손을 뻗어 로제타의 옷자락을 쥐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이, 서러운 얼굴을 하고선.
“……발레리?”
당혹하여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옷자락을 쥔 손에 절박하리만큼 힘줄이 불거졌을 뿐이다.
“왜 그래? 괜찮아?”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또다시 침묵을 택했다.
그 또한 자신이 왜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어가 있다고.
혹 그녀가 자신을 멀리할까 두려워 좋아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면서.
애인이 생겼으니 스킨십은 자제해달라는 말에, 고작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다니. 추잡스럽기가 어디에 비할 데가 없었다.
“비가.”
발레리안이 눈가를 벌겋게 물들인 채 말문을 열었다.
“비가 와서.”
할 수 있는 변명이라곤 이게 고작이었다.
스스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한심했다.
그는 기다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제 입술을 사정없이 짓씹었다.
어차피 결과가 같을 거라면 차라리.
차라리 그녀가 자신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가기를 바랐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어떠한 여지조차 주지 않고.
모든 몸짓과 손짓, 표정으로써 ‘너는 아무리 해봤자 친구 이상은 아니야’라고 말하며, 그저 그렇게 가버리기를.
그렇게 한다면 제 가슴은 사무치도록 아프더라도, 이 괴로운 마음을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옷자락을 말아쥔 손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사경에 이른 자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지듯, 그렇게 모든 힘이 풀릴 찰나였다.
“괜찮아.”
무엇에 대한 것인지도 모를 대답과 함께, 따스한 무언가가 그의 손을 감쌌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감촉.
로제타의 손이었다.
“내가 옆에 있어 줄게.”
그녀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발레리안의 곁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라리 떠나주기를 바랐던 로제타는, 서러울 정도로 다정한 친절을 베풂으로써 그를 또다시 저버렸다.
“왜?”
발레리안이 새빨개진 눈으로 물었다.
도대체 왜 자신을 이 지경까지 몰아세우냐는 질문이었다.
그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하는 로제타는 망설임 없이 확답했다.
“말했잖아. 언제든 무서우면 부르라고.”
내 친절에는 아무 대가도 필요 없다니까.
그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쏴아아아…….
깊은 침묵 속에 다시금 빗소리만이 들려왔다.
믿었던 이에게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로제타를 응시하던 발레리안은 이내 그녀의 손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미안해, 로즈.’
그가 마음속으로 사과를 전했다.
동시에 푸른 눈동자 위로 조금씩 격한 감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나는 너처럼 착하지 않아서-.’
발레리안이 겨우겨우 묻어두려 노력했던 것.
너무 오래 참아온 탓에 이제는 집착과 다를 바가 없어진.
사랑이었다.
‘굳이 대가를 치러야겠어.’
포기하려는 사람을 붙잡은 건 그녀다.
이전에 난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제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더니, 너무 아파서 놓으려는 손을 냉큼 붙든 것은 그녀다.
그에 반쯤 돌아버린 자신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하든, 로제타는 마땅히 감당해야 한다.
발레리안은 새파란 눈동자를 기이하게 빛내며 생각했다.
자신의 논리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말이다.
***
그레이한이 수감된 지 벌써 일주일 째.
황후가 최후의 한방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과 달리,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황후는 아직도 제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했는데, 그런 상황치고는 제법 얌전하게 굴었다.
기사를 시켜 확인해본바, 가끔 밀리엄 백작 부인이 드나드는 것 빼고는 따로 만나는 사람도 없었고, 별달리 수상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며칠을 악악거리며 날뛰던 그레이한 또한 슬슬 기력이 떨어졌는지 한결 조용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날뛰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고, 그 횟수가 훨씬 줄었다는 의미였다.
이틀 전에는 그레이한의 첫 번째 재판이 열렸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모르트마르 백작의 주장으로 인해 흐지부지 끝나고 만 것이었다.
재판이 끝나고 피식 비웃음을 지어 보이는 모르트마르 백작이 어찌나 얄밉던지, 하마터면 로제타는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뻔했다.
-“저 털보 자식이-!”
-“로제! 진정해라! 진정해!”
아마 아르문트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악마 같은 얼굴로 콧김을 씩씩 내뿜는 그녀를 본 모르트마르 백작은 기세에 눌려 허둥지둥 도망을 갔다.
덕분에 로제타의 소문이 하나 더 추가됐다.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아 보이더라.”
소문을 들은 로제타는 그제야 자신이 한 짓을 후회했으나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어쨌든, 재판이 이렇게 끝났다고 해서 얌전히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아르문트는 잠을 줄여가며 철저하게 수사한 끝에 그레이한의 방에 숨겨진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전신거울 앞에 서서 특정한 마법을 쓰면 다른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는 구조로, 어찌나 흔적을 잘 지워놨는지 발레리안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거울 넘어 숨겨진 공간에는 아니나 다를까 흑마법과 저주의 흔적이 잔뜩 남아 있었다. 저번에 사용하고 남은 루나베리도 함께였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나오자 모르트마르 백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황후와 자신까지 얽힐 수 있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그레이한의 처분은 다음 재판에서 결정될 예정이었다. 황태자 시해죄이기에 극형을 피하지 못할 건 확실했다.
안타깝게도 황후가 연관돼 있다는 증거까지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레이한이 없는 한, 황후는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할 것이다.
모든 일이 잘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레이한을 잡아들인 이후 아르문트를 암살하려는 위협도 사라졌고, 계승식 준비도 차근차근 잘 진행되었다.
덕분에 로제타는 정말 꿀만 같은 시간을 보냈다.
회귀한 시간을 포함하여 약 십여 년간, 이렇게까지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자신을 둘러싼 소문이나 시선이 다소 귀찮기는 했지만 그 정도쯤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다만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었으니.
“로지, 있잖아. 요즘 뭐 가지고 싶은 것 없어? 뭔가 특별하고 비싼 거.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느닷없이 로제타의 방으로 찾아와 티타임을 제안한 멜라니가 방긋방긋 웃으며 물었다.
과하게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모습이 몹시 어색했으나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딱히 없는데.”
“으음, 아니면. 아! 혹시 로지는 나중에 어떤 식으로 청혼받고 싶다, 하는 로망 같은 거 있어?”
멜라니가 갑자기 생각났다며 손뼉을 쳤다.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에 옆에 앉은 엘리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딱히. 근데 궁금한 건 하나 있어.”
“응? 뭔데? 말해봐!”
로제타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그 목걸이. 전하가 준거지?”
척 보기에도 값깨나 나갈 것 같은 목걸이가 멜라니의 목에서 달랑거렸다. 한참 전부터 멜라니가 갖고 싶은데 너무 비싸다며 투덜거리던 바로 그 목걸이였다.
“저, 저, 전하가 나한테 왜 목걸이를 줘어…….”
“방금 네가 질문한 것들을 알아오는 대가로. 아니야?”
맞을 텐데.
로제타가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차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