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법률상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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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법률상 남편
2022.04.24.
“허리! 허리 더 펴요!”
로제타의 고함이 발레리안의 개인 수련실을 가득 채웠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험악한 데가 있는 목소리였다.
“쓰읍, 손에 힘 풀렸어요! 빈틈 만들지 말라 했죠!”
“허억, 헉…….”
매서운 지적이 이어지자 페이즐리는 연신 거친 숨결만 토해냈다.
로제타의 훈련 방식이 어찌나 혹독한지, 마음만 같아선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마지막 열 번만 더!”
“조금 전에도, 흐억, 마지막이라면서요!”
“틀린 자세로 한 건 카운트 안 해요. 자, 내려치기 열 번 시작!”
“으아아!”
그냥 진작에 도망갈걸!
페이즐리가 후회 속에 괴성을 질렀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팔을 겨우겨우 휘둘렀다. 인고의 시간 끝에야 열 번을 채울 수 있었다.
“잘했어요. 이제 좀 앉아서 쉬어요.”
로제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땀에 흠뻑 젖은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공녀로서의 기품이고 뭐고, 당장은 그냥 바닥과 한 몸이 되고 싶었다.
“앉아서 쉬라고 했는데요.”
눕는 게 아니라. 로제타가 눈을 호랑이처럼 뜨고 말했다.
페이즐리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더듬더듬 땅을 짚어 상체를 일으켰다.
‘흠, 역시 말을 잘 듣는다니까.’
로제타는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응시했다.
기사단장으로 있는 동안 제법 많은 기사를 가르쳐왔지만, 페이즐리는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제자였다.
물론 수년간 수련해온 이들보다야 실력은 떨어졌지만, 그 재능과 열정만큼은 그녀가 인정할 정도였다. 힘든 수련에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공녀라는 신분상 다른 이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법도 한데, 페이즐리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로지 수련에만 전념했다. 오히려 가르치는 입장인 로제타가 더 신경이 쓰이곤 했다.
다행히 이번 교습부터는 발레리안의 배려로 개인 수련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된 덕에, 로제타도 시선에서 벗어나 페이즐리를 더욱 확실하게 교육할 수 있었다.
물론, 페이즐리에게는 그다지 좋은 일만은 아니었을 테다. 그만큼 훈련 강도가 늘어났으니까.
“스승님.”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씨근덕거리던 페이즐리가 불쑥 그녀를 불러왔다. 스승님이라는 호칭도 이제 제법 익숙해지고 있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일순 로제타가 몸을 흠칫 떨었다. 최근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설마 아르문트가 페이즐리까지 매수를……?’
그녀는 습관적으로 페이즐리를 훑어보았다. 훈련용으로 쓰기에는 옷 재질이 몹시 좋아 보이긴 했으나, 이건 루니엘라 공작가 재력의 산물일 뿐, 딱히 평소와 달라진 점은 없었다.
“대마법사님과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고 했죠?”
예상과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하긴, 아무리 아르문트라 하더라도 루니엘라 공작가의 외동딸을 매수할 수는 없었을 테다.
‘다행이야. 페이즐리랑 아르문트가 따로 만난 게 아니라서.’
로제타가 짧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동시에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페이즐리를 내심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무슨 생각을 한 거람.’
그녀는 부끄러운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비록 페이즐리가 이전 생에는 아르문트의 결혼 상대였다곤 하나, 지금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약혼 얘기도 쏙 들어갔고, 심지어 그녀는 다른 남자와 교제 중이다.
이 모든 걸 알면서도 종종 질투심이 샘솟는 걸 막을 방도가 없었다.
‘네 번째 생과 다섯 번째 생은 엄연히 다른 삶이야. 쓸데없이 착각하지 말자.’
로제타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호되게 채찍질했다. 그러곤 이런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괜스레 헛기침을 뱉었다.
“큼, 큼. 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어요.”
“흐음……. 그렇단 말이죠.”
페이즐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딱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손바닥을 제 입가에 가져다 대고 소곤거렸다.
“실례지만, 혹시 대마법사님이 로제타에게 다른 마음을 가진 건 아닌가- 해서요.”
난 또 뭐라고.
로제타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무슨 대단한 얘기를 하려고 목소리까지 줄이나, 했더니만. 단단히 헛다리를 짚은 모양이다.
“전혀 아니에요. 예전부터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워낙 친해서 자주 붙어 있다 보니까, 아무래도 오해를 받는 것 같아요.”
그녀는 손사래까지 치며 부인했다. 그러나 페이즐리는 거기서 물러나지 않았다.
“아뇨, 전 여자 남자가 친하다고 무조건 엮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에요. 제가 이런 의심을 한 건…… 눈빛 때문이었어요.”
“눈빛이요?”
“네. 저번 술자리에서, 윈저프리드 경이 로제타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고요.”
저 그런 거 잘 보거든요. 페이즐리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눈빛이라.
로제타가 발레리안의 예쁜 눈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발레리안의 눈빛은 한결같이 다정했으니까.
‘역시, 말도 안 돼.’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이 네 번을 회귀하는 동안, 발레리안은 단 한 번도 그런 식의 호감을 표시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믿음직한 친구이자 가족으로서 곁을 지켰을 뿐이다.
만약 그가 정말 그런 마음이 있다면, 지난 네 번의 인생 중 적어도 한번은 이상기류를 보였을 테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즐리의 추측은 완전히 빗나갔다고 할 수 있다.
로제타는 이렇게 확신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전 생과 지금의 생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던 것은 모두 잊은 채 말이다.
“에이, 아니에요. 발레리랑 전 그냥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인걸요.”
“뭐, 로제타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제가 착각했나 봐요. 그나저나, 내일 있을 파티에는 참석하시나요?”
“네, 아르문트랑 함께 가려고요.”
“그럼 나도 가야겠다! 스승님 가시는 곳에는 마땅히 제자도 가야 하는 법이니까요.”
몇 번의 부정이 이어지자 페이즐리는 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장난스럽게 눈웃음까지 치는 걸로 보아 이제 제법 살만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내려치기를 백 번만 더 시켜볼까.
로제타는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선 사악하기 짝이 없는 계획을 짰다.
그러나 페이즐리의 몸을 더 혹사시켜야겠다고 마음먹은 찰나, 테오도르 신관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했다.
“테오!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바쁘다면서!”
페이즐리의 낯빛 전에 없이 환해졌다. 그녀는 연인의 등장에 몸이 무거운 것도 잊었는지 벌떡 일어나 단걸음에 달려갔다.
“오늘 훈련이라면서요. 항상 근육통으로 고생했으니까, 미리 풀어주려고 왔죠.”
테오도르 신관은 로제타를 향해 짧게 목례하고는 금방 페이즐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찌나 다정한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네. 저번 술자리에서, 윈저프리드 경이 로제타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고요.”
테오도르를 보자 어쩐지 페이즐리와 나눴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발레리안의 눈빛. 애정이 가득 배어 있는 그 눈동자가, 왠지 정말 테오도르의 것과 사뭇 비슷한 것도 같았다.
‘……에이. 설마.’
로제타는 재고할 가치도 없는 생각이라며 다시금 헛웃음을 뱉었다.
***
두 번째 재판을 이틀 앞둔 날.
이럴 때야말로 황실이 건재함을 드러내야 한다는 황제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정확히 무엇을 기념하는지도 모를 파티가 열렸다.
신년 연회나 생일 축하 연회와 달리 별다른 의미가 없는 파티임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는 유례없이 큰 편이었다.
수도의 귀족들은 물론, 지방에서 온 소수의 귀족도 엄격한 확인 끝에 참가해 연회장을 빼곡히 채웠다.
조금이라도 지각하면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까, 시작과 동시에 손님들이 쉴 새 없이 들이닥쳤다.
그 이유야 묻지 않아도 뻔했다.
두 명의 황자가 서로의 가슴에 칼을 꽂으려 십여 년간 아등바등하던 정치극이 마침내 결말이 났다.
그 마지막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심리였다. 물론, 대결의 승리자에게 냉큼 줄을 대려는 마음도 있을 테고 말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문트가 로제타와 함께 등장하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재빨리 다리를 움직였다.
남들보다 먼저 황태자에게 말을 붙이거나, 신분상 그게 어렵다면 어떻게든 얼굴이라도 비추기 위해 모두 안달이 난 모양새였다.
앞서 황제가 등장했을 때보다 그 정도가 배는 심했다. 지는 별보다는 뜨는 해에 집중하겠다는 그 의도가 훤히 보였다.
아르문트는 인파 사이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굳이 뚫으려는 노력 없이도 그의 움직임에 따라 사람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다만 시선만큼은 끊어지지 않고 그의 뒤로 달라붙었다.
‘윽. 이럴 줄은 알았지만 좀 심하네.’
아르문트를 이어 자신에게까지 향하는 수많은 시선에 로제타가 진저리를 쳤다.
당연하게도 그녀를 향한 시선은 썩 곱지만은 않았다.
굳이 그 의미를 파악하자면 ‘정부 년이 대단도 하군’쯤에 가까우리라. 혹은 ‘저 자리를 어떻게 꿰차지?’라거나.
“폐하를 뵙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황제의 앞에 다다랐다.
로제타는 아르문트의 인사에 맞춰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늦었구나. 얼른 곁에 앉거라.”
황제는 아르문트를 향해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옆자리를 손으로 톡톡 두들겼다. 로제타에게는 한 줌의 시선조차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태도에도 로제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별다른 대접을 받으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아르문트의 경우는 얘기가 달랐다.
단정한 눈썹이 비뚤게 휘어지며 관자놀이 위로 핏대가 섰다.
그렇게까지 말했거늘, 이따위로 나오시겠다.
자존심상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할 걸 알았지만, 그에게는 이 이상을 받아들여 줄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힘들 것 같군요. 보시다시피, 혼자가 아니라서. 제 파트너를 위한 자리가 따로 준비되면 그때 앉겠습니다.”
아르문트는 매서운 눈으로 황제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말투는 공손한 듯했으나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로제타를 이끌고 차갑게 돌아섰다. 황제의 표정이 민망함으로 일그러졌으나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미안, 로제.”
“저는 정말 괜찮아요! 전하야말로 그냥 옆에 가서 앉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내가 안 괜찮아.”
아르문트는 로제타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애초에 그녀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알려두고자 나온 자리다. 한때 황궁 곳곳에 나돌았던 로제타와 대마법사의 추문을 잠재우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아르문트는 파티에 참석하는 동안 웬만해서는 로제타의 곁을 떠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만 로제타는 이러한 의도를 알지 못한 채 다른 곳을 바라보기 바빴다.
‘방금 이상한 얼굴을 본 것 같은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연회장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조금 전 보여선 안 될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눈을 데구루루 굴렸으나 사람이 너무 많은 탓에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로제타는 불안한 표정으로 아르문트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자신이 본 게 환상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아르문트와 마주하는 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때마침 여러 귀족들이 아르문트를 둘러싸고 그녀와 관계없는 질문을 해댔다. 동시에 멀리서는 페이즐리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르문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문, 저는 잠시 페이즐리 좀 보고 올게요. 얘기 나누고 계세요.”
적절한 핑계였기에 아르문트는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그녀를 놓아주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아기 새처럼 귀여웠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걸 즐길 새가 없었다.
로제타는 방금 문제의 인물을 보았던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까 아르문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인파가 훤히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저 시선만 여전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전 기사단장답게 요리조리 사람들 사이를 피해 발을 내디뎠다. 마음속으로는 제발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만 이런 종류의 바람은 꼭 실현되지 않고는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로제타!”
왜소한 몸집의 중년 남성이 환한 미소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옆에는 셀레나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우리 딸!”
마음만 같아선 ‘어머니의 법률상 남편’ 정도로 부르고 싶은 그, 메이필드 남작은 전에 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로제타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