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황후로 살고 싶지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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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황후로 살고 싶지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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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황후로 살고 싶지 않다면
2022.05.01.
“꺅! 아파요! 아프다고요!”
셀레나가 리처드의 손아귀 아래서 마구 발버둥을 쳤다.
가볍게 제압만 하고 있을 뿐인데 뭐가 그리 아프다고. 리처드는 이해가 가지 않아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 얼굴에 상처라도 남으면 책임질 거예요?!”
“조용히 하십시오.”
“아악!”
리처드가 손에 힘을 더 주자 셀레나는 뼈라도 부러진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로, 로제타! 얼른 말리지 않고 뭘 하는 거야!”
이번에는 남작이 차례를 넘겨받았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로제타를 올려다보며 얼른 상황을 해결하라고 역정을 냈다.
로제타는 그런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며 정적을 지켰다. 아르문트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 했음에도 여전히 바짝 굳은 모습이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가 흐르는 물살처럼 흔들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르문트가 왜 남작과 셀레나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까.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어떻게 알고?
설마, 자신이 모르는 사이 이들이 그에게 접근한 적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르문트에게 혹 이상한 요구를 한 건 아니겠지.
쿵, 쿵, 쿵. 심장이 마구 뛰어댔다.
하얗게 질렸던 피부에 빠르게 열이 올랐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무엇이 정답인진 알 수 없었으나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아르문트는 이미 알고 있었구나.’
방금까지만 해도 제 사정을 솔직히 밝히고자 마음먹었던 그녀였으나, 그럼에도 수치심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로제타는 민망함을 참을 수 없어 질끈 눈을 감았다.
그냥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로질렀다.
“로제타!”
“그 입 다물어.”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 거친 목소리가 목구멍을 긁고 흘러나왔다.
그러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로제타를 부르던 메이필드 남작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문트의 눈빛이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잡을 것처럼 살벌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노장보다 서슬이 시퍼렜다.
남작은 조금만 잘못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느끼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예 틀린 추측은 아니었다. 만약 이 자리에 로제타가 없었더라면, 아르문트는 지금과는 다른 방법으로 그의 입을 다물게 했을 테니까. 아마 썩 신사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남작의 얼굴을 걷어차고 싶어 몸이 다 쑤실 지경이었다. 다만 아직 로제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솟아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
“저, 전하! 제 딸아이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진 모르겠지만, 다 오해입니다! 부디 늙은 아비의 억울함을 살펴주십시오!”
상황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남작은 서둘러 다른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바로 동정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는 로제타가 아르문트에게 고자질을 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녀가 이렇게 조용한 거라고 말이다.
‘알아서 효도해도 모자랄 판에, 가문 망신을 시키다니!’
메이필드 남작은 반드시 로제타를 혼쭐내주리라 다짐하며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로제타는 그 표독스러운 눈빛을 마주하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너무 익숙한 행태인지라 억울하거나 속상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 입. 다물라 했을 텐데.”
정작 분노한 것은 아르문트였다.
로제타의 어깨를 감싸 쥔 팔이 잘게 떨렸다. 동시에 그의 주위로 사나운 위압감이 퍼졌다.
“로제는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래, 로제타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애정이 어린 눈으로 그녀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팔다리는 제대로 못 먹고 자란 사람처럼 마른 데다, 옷장에는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이 가득하다.
하녀로 일하는 내내 단 한 번도 본가에서 소포가 온 적이 없었고,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변변찮은 간식 하나 제대로 사 먹지 못하더라.
그녀의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에서 지금까지 로제타가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아왔는지가 묻어났다.
지금까지는 행여나 속상할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아르문트는 이런 그녀가 늘 신경이 쓰였고 못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눈앞의 메이필드 남작은 뻔뻔하게도 로제타를 탓했다. 그것도 아주 화려한 복장을 걸친 모습으로.
이러니 어떻게 분노를 억누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더 화가 나.”
로제타는 이런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향기 좋고 부드러운 것들에 둘러싸여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다정한 목소리를 들어야 마땅하다.
그녀가 가시밭길을 걷길 원한다면야 기꺼이 옆을 따르겠지만, 적어도 그녀를 찌른 가시들은 제 손으로 모두 꺾고 말 것이다.
“허억.”
남작이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사나운 기운이 그의 목을 조여온 탓에 호흡이 어려웠다.
주름진 얼굴이 점점 새파래졌다.
이를 본 로제타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뗐다.
“아문.”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방안을 가득 채우던 살기가 잦아들었다.
잔뜩 비틀려 있던 아르문트의 눈썹도 그제야 제 자리를 찾아갔다.
“전 괜찮아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로제타는 그냥 익숙한 말을 뱉었다.
제 가족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저런 가치 없는 사람들 때문에 아르문트가 쓸데없이 감정 소모를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미안해, 로제.”
“아뇨, 전하가 미안하실 건…….”
“그대의 애인은 썩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라.”
아르문트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안 괜찮아.”
전혀. 그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살기를 억누르느라 힘이 잔뜩 들어간 탓에 턱에 각이 졌다.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옮겨 다시 남작을 응시했다.
헉헉 숨을 내쉬던 남작은 재빨리 고개를 더 조아렸다.
“메이필드 남작.”
“예, 예, 전하.”
“경고하건대, 앞으로 황궁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보이는 즉시 그 목을 벨 테니.”
남작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황궁 근처에도 오지 말라니. 이는 그가 기대해 마지않던 출세 기회가 깡그리 날아갔음을 의미했다.
어쩌면, 나중에는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자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애지중지 아끼는 딸이 일을 키우고 말았다.
“네?! 도대체 무슨 권리로요?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도 그럴 수는 없어요!”
셀레나가 고개를 번쩍 들고 항변했다.
지금까지는 눈치를 보며 침묵했으나, 제 수도 사교계 데뷔 기회가 사라지자 참지 못하고 입을 뗀 것이었다.
그 목적이 어찌나 훤히 보이는지 로제타는 자신이 더 민망해지는 기분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럴 순 없다, 라.”
하, 아르문트가 헛웃음을 뱉었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직접 보여주길 원하나?”
“자, 잘못했습니다, 전하! 제 딸이 아직 너무 어리고 철이 없어서……! 부디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메이필드 남작은 다급히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용서를 구했다. 쾅, 쾅, 이마를 내리찍는 모습이 처절하기 짝이 없었다.
“글쎄, 어떻게 할까. 황실 모욕죄로 집어 넣어줄까, 아니면 간단하게 작위를 몰수해줄까.”
둘 중 무엇도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메이필드 남작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나는 전자가 더 끌리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해. 아르문트가 로제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짓으로 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로제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애초에 그녀의 인생에 큰 의미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별달리 복수하고 싶지도, 사과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특히, 아르문트의 손을 빌려서는.
남작의 눈 위로 일순 기대감이 빛을 냈다. 그녀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로제타는 딱히 편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냥, 다시는 수도에 들어오지 못하게끔 조처를 해주면 좋겠어요.”
“로, 로제타!”
“평생 얼굴 볼일이 없도록요.”
“그래, 그대 뜻대로 하지.”
남작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로제타를 불러댔으나 그녀의 태도는 강경했다.
“리처드. 데려가.”
“예, 전하.”
리처드가 메이필드 남작과 셀레나를 강제로 데려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제 이름을 부르짖는 가족에게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모르는 이가 보면 매정하다 욕할 정도로 냉정했다.
다만 아르문트의 눈에는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겨진 슬픔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젖어 들 듯 발갛게 물든 눈가가 그의 마음을 쓰리게 했다.
“로제.”
아르문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지나치게 독단적이었나.”
참아야 한다는 건 알았다. 로제타가 가만히 있는데 자신이 멋대로 결정할만한 사안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로제타를 너무도 사랑한 탓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의 얼굴만 봐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최대한 참고 참은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뇨,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해요. 곤란한 상황이었거든요.”
로제타가 천천히 도리질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그의 판단은 적절했다.
귀족들 앞에서는 그들에게 친절히 대함으로써 로제타와의 관계를 확실히 드러내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깔끔하게 처리했으니. 이상한 소문이 날 일은 없을 것이다.
“혹, 후회가 되는 건…….”
“전혀요. 애초에 가족이라 칭할만한 사이도 아니어서, 후회할만한 것도 없어요. 다만…… 그냥, 조금 민망하네요.”
저런 사람들을 가족이랍시고 둔 것도, 가족에게 사랑이란 걸 받지 못하고 자라온 것도 모두 부끄러웠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당당하게 살아왔지만,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여러모로 책 잡힐 게 많아진 것 같아서.”
로제타가 붉은 속눈썹을 처연하게 깔고 말했다.
아르문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혹시 화가 난 걸까.
그렇게 염려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들자 붉은빛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내 스스로가 싫어지려 하는군.”
비스듬히 고개를 떨군 그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아래를 응시하는 황금빛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일렁였다.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그대가, 그런 말을 하게 만들다니.”
로제타는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당혹스러워 입만 뻐끔거렸다.
속상해하는 그를 달래주고 싶은데 어떤 말을 꺼내야 좋을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로제.”
“…….”
“우리 계승식 따위 그만두고, 같이 수도를 떠나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살까.”
“네?!”
그러나 너무 놀라운 소리를 들으니 절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대가 황후로 살고 싶지 않다면, 내가 계승권을 포기하지.”
장난이라기에는 그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애초에 이런 걸로 장난을 칠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내 목표는 영원히 그대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거지, 황제가 되는 게 아니야. 황위 따위야 언제라도 버릴 수 있어. 그러니 제발 그런 생각으로 괴로워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