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솔깃한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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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솔깃한 제안
2022.05.05.
아르문트가 조심스럽게 로제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맞닿은 피부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나 다정해 로제타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방금까지 그녀의 가슴속을 헤집어놓던 우울감이 단숨에 날아갔다.
그 대신 몽글몽글하고 따스한 행복감이 가슴에서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했으면 좀 어떤가.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해주는 사람이 여기 있는데.
“고마워요, 전하.”
로제타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렇지만 저는 정말 괜찮아요.”
괜찮아. 많은 것에 체념한 나머지 습관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의미가 사뭇 달랐다.
“그렇게까지 괴롭지는 않거든요. 당신이 옆에 있으니까요. 그러니 아문, 계승권을 포기하지는 말아요. 원하던 거잖아요.”
“그대의 행복만큼 중요하지는 않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저도 진심이에요.”
아르문트는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눈에 힘을 빡 주고 그를 직시함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그러자 아르문트도 지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줬다.
“푸핫!”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느닷없이 그와 눈싸움을 벌이는 상황이 웃겼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지자 아르문트 또한 한결 낯빛이 밝아졌다. 안심한 모양새였다.
“아르문트. 이런 민망한 모습을 보고도 제가 계속 좋아요?”
“또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왜, 싫어질 수도 있잖아요.”
“내가 더 그대에게 민망한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짐승처럼 방을 쏘다니고, 허락도 받지 않고 입술을 탐하고. 그래서 내가 싫어지던가?”
로제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광증 상태의 그를 마주할 때 당황스러운 상황이 종종 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싫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더 좋아져서 문제였지.
고양이처럼 굴던 게 나름 귀여웠는데.
로제타는 흔들리는 먼지떨이를 집중해서 바라보던 아르문트를 떠올리곤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그의 광증이 거의 다 사라져 더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다행인 일이지만 아주 약간은 아쉽기도 했다.
“나도 같아. 그대가 내게 어떤 모습을 보이더라도, 내 마음이 식을 일은 없을 거야.”
“제가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다고 해도요?”
“그래.”
큰마음 먹고 한 질문이거늘 대답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로제타는 입술을 비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거짓말. 그냥 막 대답하는 거죠?”
“아니, 진심이야. 정말 그렇게 돼버렸어.”
쪽. 아르문트는 앞으로 나와 있는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설사 그대가 나 몰래 대마법사와 만나고 있었다고 해도, 이제는 사랑을 멈출 수가 없어.”
굳이 설명하자면, 어떠한 선을 넘어버린 느낌이었다.
사고 후 의식이 없던 로제타가 깨어난 뒤, 아르문트는 그저 본능처럼 그녀에게 모든 감정을 다 내어주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가 원하는 것이 되었고, 그녀를 괴롭히는 건 곧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로제타가 그 무엇을 한다 해도 아르문트는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이는 이제 변하지 않는 진리와도 같았다.
바람을 피운다면 제발 자신을 봐달라 애원할 것이고, 살인을 한다면 시체 처리를 도울 것이다. 대신 죽어달라 말한다면 기쁘게 생을 끝내리라.
누군가는 이를 건강하지 않은 관계라며 지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르문트에게는 쓸모없는 조언이었다. 그로서는 건강한 관계라는 타이틀보다, 로제타가 훨씬 절실했기에.
“뭐예요, 그 말도 안 되는 가정은.”
“그냥, 그렇다는 거야. 그렇다고 진짜 바람피우면 안 돼.”
“절대 안 피워요! 별 이상한 걱정을 다 하고 있어.”
걱정한다 해도 내가 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
로제타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모상 바람날 가능성이 큰 건 아르문트 쪽이 아닌가 싶었다.
“귀엽기는.”
아르문트가 헤실헤실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얼굴에 입술로 도장을 찍었다.
도대체 뭘 했다고 귀엽다 난리를 부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참나, 자기가 백배는 더 귀여우면서.”
로제타는 손을 뻗어 그의 뽀뽀 세례를 막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곤 냉큼 그의 다리 위로 올라가 제대로 입을 맞췄다.
마음만 같아선 온 힘을 다해 그를 껴안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그의 뼈가 산산조각이 날 테니 겨우겨우 자제했다.
“……저, 방금 왔는데…… 그냥 다시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가 커플의 염장질을 목격하고 만 리처드는 쓸쓸하게 자리를 떠났다.
로제타와 아르문트는 자연스럽게 그를 무시하며 둘만의 시간을 즐겼다.
“아르문트, 혹시 테오도르 신관님이 심장 관련해서 무슨 말 안 해요?”
한참 만에 입술을 뗀 로제타가 동그란 눈으로 물었다.
“내 심장? 글쎄. 딱히 별다른 말은 없던데. 그건 왜 묻지?”
아르문트는 얌전히 대답하면서도 그녀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고작 키스만 했을 뿐인데 벌써 몸이 단단하게 굳어 있는 그였다.
“으음, 그냥 물어봤어요. 너무 빨리 뛰길래요.”
“그야, 그대가 날 자극하고 있으니까.”
아르문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느릿하게 허릿짓을 했다.
로제타는 제 드레스 아래로 느껴지는 딱딱한 촉감에 몸을 움찔 떨었다.
‘언젠가, 회귀 사실을 밝혀도 괜찮을까.’
고민이 되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육체적 쾌락이 금세 그녀의 이성을 잡아먹은 탓이었다.
***
온 황궁이 연회장에서 흘러나온 흥겨운 노래와 웃음소리로 소란한 시간.
대마법사의 연구실은 같은 본궁에 있음에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한참을 불을 때지 않은 듯 방 안의 공기는 야외나 다를 바 없이 서늘했고, 초라한 촛불 몇 개만이 간신히 어둠을 걷어냈다.
발레리안은 그 차갑고도 외로운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언가를 연구하는 듯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으나, 아래를 바라보는 눈에는 조금의 기대감이나 흥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죽은 생선의 것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방이 이렇게 어둡다면 조금 더 붉을 밝혀놓을 법도 하거늘, 그는 그 대신 어둠에 적응하는 편을 선택했다.
어차피 한동안은 찾아올 사람도 없다.
발레리안은 이렇게 생각했으나 자신이 착각한 모양이었다.
일순 어둠 속에서 푸른 눈동자가 매섭게 빛을 냈다.
동시에 방금까지만 해도 발레리안의 손에 들려 있던 시약이 문 쪽을 향해 날아갔다.
쨍그랑!
플라스크가 깨지며 유리 조각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와 함께 시약이 닿은 벽과 문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무서운 약품이군요. 명중력이 다소 아쉬운 것만 뺀다면요.”
새카만 어둠 속에서 고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설지 않은 음성이었다.
“명중을 못 한 것 같습니까?”
발레리안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러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까지 내려온 곱슬머리는 볕이 들지 않는 곳에서도 화려하게 빛났고, 혈관이 비칠 정도로 하얀 피부는 붉은 입술과 대비되어 더 창백해 보였다.
별것 아닌 자세에도 기품이 묻어나는 여인, 황후 아르티나 모르티마르는 해사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연구실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어머. 그럼 일부러 봐주셨나 보군요. 상냥하기도 하지.”
“헛소리 말고 꺼지는 게 좋을 겁니다, 황후 폐하. 제가 지금 기분이 썩 좋지 않아서.”
괜한 화풀이를 할 것 같거든.
발레리안이 기이하게 빛나는 눈으로 읊조렸다.
어둠을 배경으로 서서 소름 끼칠 정도로 무표정하게 경고하는 그의 모습은 어지간한 사람조차 줄행랑을 칠 정도로 살벌했다. 척 보기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느낌이었다.
그러나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황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 일생을 바쳐 이뤄온 것이 모두 무너져 내렸는데 어찌 정상일 수가 있을까.
황후는 정말 기쁘다는 듯 입을 쭉 찢으며 웃었다.
“저도 지금 기분이 굉장히 안 좋은데. 비슷한 점이 많네요, 우리.”
귀찮은데 그냥 죽일까.
발레리안이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함부로 황후를 죽였다간 뒤탈이 생길 테지만 지금은 그걸 걱정할 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황후가 황제의 명을 어기고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여기저기 설명하는 것보다야 그냥 죽이고 뒤처리를 하는 게 더 간편할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발레리안은 주저하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 작은 마법 하나만 써도 목숨을 앗아가는 건 금방이리라.
그렇게 마나를 끌어 올린 순간이었다.
“이틀 뒤, 재판이 열리는 날. 황태자를 죽일 거예요.”
손가락 끝까지 차올랐던 마나가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이틀 뒤에는 우리 아들이 황제가 되겠죠.”
“……그런 계획을 내게 설명하는 이유는?”
발레리안이 한쪽 눈썹을 휘며 물었다.
사실 묻지 않아도 뻔했다. 이렇게 비밀리에 자신을 찾아온 것만 해도 의도가 선명했으니까.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그가 예상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우릴 도와줄 필요는 없어요. 단지, 방해하지는 말아줘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득 될 게 전혀 없는데.”
“로제타. 그 여자를 원하죠?”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황후의 입에서 로제타가 언급됐다. 어떤 식으로도 좋게는 해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딜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로제타를 언급해.
발레리안에게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황후를 죽일 듯 마나가 온 피부에서 튀어댔다.
이러한 반응은 황후의 추측이 사실이라는 증명과도 같았다.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황후는 깔깔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도 사람이긴 사람이구나. 신기해라. 걱정 마세요. 그 여자를 해할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한 가지 제안을 하려는 것뿐이랍니다. 제 처분은 그 뒤에 생각하지 그래요? 당신에게도 좋은 제안일 텐데.”
짙은 살기에도 멀쩡하게 말하는 모습으로 보아 그녀는 흑마법의 보호를 받는 듯했다.
아직도 흑마법사가 궁에 남아 있었나. 발레리안은 거칠게 미간을 찌푸리며 침묵했다.
딱히 황후의 제안이 기대되진 않았다. 다만 로제타까지 언급된 이상, 얘기를 들어볼 필요성은 느껴졌다.
“잘 생각했어요. 제 제안은 이거예요. 당신에게 그 여자를 무사히 건네줄 테니, 황궁에서 일어나는 이벤트에 철저하게 개입하지 말아 달라는 거. 듣자 하니 그 여자도 제법 실력자라던데, 제압하는 걸 도와주면 더 좋고.”
“네가 뭔데 로제타를 준다, 만다지?”
“그야, 황태자가 죽어야 당신에게 일말의 기회라도 생길 테니까? 들었잖아, 결혼한다는 거.”
그대로 둘 거야?
황후가 뱀처럼 속살거렸다.
발레리안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그는 황후를 사납게 노려보면서도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못했다. 그녀의 지적이 사지를 날카롭게 찔러왔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당신, 황실 내 정치에 큰 관심 없는 거 알아요. 그러니 그저 황궁은 내버려 두고, 그 여자와 함께 단둘이 떠나세요. 원하는 만큼의 돈도, 새로운 신분도 지원해줄 테니.”
황후는 마치 그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발레리안이 가장 원하는 것을 속삭였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황후는 생긋 웃으며 그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치열한 고민 끝에 발레리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