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최고의 날 (124/145)

124화. 최고의 날 2022.05.08.

16549588879297.jpg “조건이 있어.”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49588879302.jpg “조건이라…….”

황후는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며 기나긴 속눈썹을 위아래로 팔랑거렸다. 그게 무엇인지 말해보라는 의미였다.

16549588879297.jpg “황태자는 살려둬.”

여유만만하던 얼굴이 빠르게 뒤틀렸다. 황후는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간교한 눈빛으로 발레리안을 훑어보았다. 그가 자신을 우롱하려 하는 말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발레리안의 얼굴은 조롱기를 찾아볼 수 없이 차분했다. 그에 황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16549588879302.jpg “그럴 수는 없지요. 그자가 죽는 것이 계획의 핵심인데.”

아르문트가 죽어야만 그레이한이 정통한 계승자로서 황위에 오를 수 있다. 끈질긴 놈을 굳이 살려뒀다간 분명 뒤탈이 있을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였다. 재고할 여지가 전혀 없는. 그러나 이대로 대마법사를 놓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가 거절할 상황을 생각해 대비는 해두었으나, 여러모로 위험도가 높다. 이틀 뒤의 거사를 마음 편히 치르기 위해서라도 지금 그를 설득해두는 것이 나으리라. 황후는 화려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잠시 결정을 보류했다. 그때, 발레리안의 입술 위로 예상하지 못한 미소가 번졌다.

16549588879297.jpg “황후께선 상상력이 영 부족하시군. 아니면 생각보다 마음이 여리다고 해야 할까.”

그는 느긋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황후를 마주 보았다. 푸른 눈동자에는 더는 고민의 기색이 없었다.

16549588879302.jpg ‘분위기가 달라졌다.’

황후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조금 전까지 발레리안은 벼랑 끝까지 몰린 사람처럼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스스로 벼랑에서 떨어지겠다 각오한 사람 같았다.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같았으나 기세는 훨씬 사나워졌다.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그녀에게는 나쁘지 않은 변화일 테다.

16549588879297.jpg “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는 얘기야.”

발레리안이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로 속삭였다.

16549588879297.jpg “백치가 되든, 불구가 되든, 상관없이.”

어떤 놈이 백치인 놈을 데려다가 모반을 일으키려 하겠어? 그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늘 속에서 해사하게 웃으며 잔혹한 얘기를 하는 그의 모습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괴기스러웠다. 그러나 그 결이 황후의 것과 아주 다르지는 않았기에, 그녀는 놀라거나 혐오를 내비치는 대신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49588879302.jpg “그렇게 해서라도 굳이 그를 살려두려는 이유는?”

순수하게 궁금했다. 사지가 잘려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황태자를 싫어하면서, 굳이 그를 살려두려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딱히 정치적인 이점을 챙길 만한 것도 없을 텐데. 황후는 얼른 말해보라는 듯 다시금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대답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16549588879297.jpg “내가 거기까지 말해야 하나?”

반쯤 장난스럽던 목소리가 다시금 흉흉해졌다. 이에 황후는 자연스럽게 알아차렸다.

16549588879302.jpg ‘무언가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다. 그것도 그 여자와 관계된.’

갑작스럽게 험악해진 기세만 봐도 확실했다. 그 여자를 언급하기만 해도 살기를 풀풀 풍겨대던 그였으니, 이것 또한 비슷한 맥락일 테다. 황후는 더 질문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그 사정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단순한 호기심일 뿐 제안이 틀어질 것을 각오하고 질문할 정도는 아니었다.

16549588879302.jpg “좋아요.”

그녀는 우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49588879302.jpg “조건을 받아들이죠. 무엇을 하든 간에, 숨통만 끊어놓지 않으면 된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16549588879297.jpg “…….”

16549588879302.jpg “그렇게 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네요. 부족한 상상력으로나마 이것저것 해보지요.”

떠보듯 잔인한 말을 던져보았으나 발레리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정말 황태자에겐 어떤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 태도가 만족스러워 황후는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16549588879302.jpg “그럼 이제 조금 더 본격적으로 얘기해볼까요?”

그녀는 몸을 돌려 발레리안을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안내했다. 화려한 드레스 자락이 이리저리 나풀거리는 모습이 꼭 그를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더 깊이 오라고, 모든 괴로움을 잊고 편안한 선택을 하라고 말이다.

16549588903165.jpg -“발레리.”

  돌연 로제타의 경쾌한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유영했다. 발레리안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제 마음이 너무 지독한 탓에 만들어진 환청이라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고. 그러나 익숙함과는 별개로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쇠사슬처럼 제 몸을 꽁꽁 감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며칠 뒤 그녀가 보일 반응이 두려웠다. 자신이 가담했다는 사실은 조금만 공을 들이면 숨길 수 있을 테다. 흔적을 지우는 것쯤이야 쉬운 일일뿐더러, 로제타는 그를 믿으니까. 다만 그녀는 분명 슬퍼할 것이다. 아주 많이, 그리고 아주 오래. 발레리안의 손톱이 매끈한 손바닥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메이필드 남작 부인이 작고한 날,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던 로제타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16549588879297.jpg ‘다시는 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절대 그녀의 눈가가 젖어 들 일은 없게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자신이 다 떠안아도 좋으니 슬픔이라곤 모르고 살게 하겠노라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직접 로제타의 행복을 망쳐놓으려 하고 있었다. 자괴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어느새 손바닥에서는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16549588879302.jpg “대마법사.”

발레리안이 걸음을 떼지 않자 황후가 꿈결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왔다.

16549588879302.jpg “이제 다시 행복해질 일만 남았어요.”

정말 내 머릿속이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말은 유혹적이었다. 일순, 한때 그가 남몰래 떠올렸던 상상이 다시금 눈앞에 그려졌다. 작지만 아름다운 집에서 로제타와 모든 생활을 함께하는 삶. 가족 같은 친구가 아닌, 진짜 가족으로서 그녀와 여생을 보내는 상상이었다.

16549588879297.jpg ‘어쩌면.’

로제타는 짧게 슬퍼한 후 다시 행복해질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황태자가 아닌, 자신의 곁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사랑을 속삭일지도 모른다. 발레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푸른색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을 냈다. 그는 황후의 뒤를 따라 발을 내디뎠다. 걸음은 여전히 무거웠으나 이제는 그 무게를 기꺼이 감수할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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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번째 재판이 열리는 날의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잠든 아르문트의 잘생긴 얼굴을 구경하던 로제타는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직감했다.

16549588903165.jpg ‘왠지 오늘은 긴 하루가 될 것 같네.’

재판이 있는 날이니 당연히 여러모로 바쁘긴 하겠지만, 어쩐지 그것 말고도 다른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왕이면 즐거운 일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촉. 가벼운 입맞춤이 이마를 간지럽혔다.

16549588922255.jpg “좋은 아침.”

아르문트가 나른한 눈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잠이 덜 깬 목소리가 어찌나 매혹적인지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16549588922255.jpg “왜, 너무 잘생겨서 그래?”

몹시 자만하는 어투였으나 이유는 있었다. 실제로 로제타는 종종 아르문트의 외모에 홀려 말을 잃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를 멍하니 쳐다만 볼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르문트는 로제타의 몸을 더욱 끌어당겼다. 안 그래도 바짝 붙어 있던 다리가 얽혀들었다.

16549588922255.jpg “아니면…… 아침부터 유혹하는 건가?”

16549588903165.jpg “끼악! 하지 마요!”

배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촉감에 로제타가 비명을 내질렀다. 여기에 넘어갔다간 적어도 한 시간은 꼼짝없이 사라질 테다. 그녀가 질색하며 침대에서 도망치자 아르문트는 큭큭 웃음을 흘렸다.

16549588922255.jpg “농담이야.”

16549588903165.jpg “진심인 거 알거든요. 지금 이불 위로도 다 보여요.”

16549588922255.jpg “이건 그대가 곁에 있으면 원래 이래. 알잖아.”

아침이라 더 심하기도 하고. 짧게 덧붙인 그가 로제타를 따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반쯤 헐벗었음에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태도였다. 로제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옷을 건네주었다. 어떻게든 저걸 가려야 제 마음이 좀 편안해질 것 같았다.

16549588922255.jpg “어쨌든 정말 아침부터 그대를 괴롭힐 생각은 없었어.”

16549588903165.jpg “꼭 지금까지는 그런 적 없는 것처럼 말하네요. 이번 주만 해도 여러 번 그랬으면서.”

아르문트가 셔츠에 팔을 끼워 넣자 로제타는 가까이 다가가 단추를 잠가주었다. 샹들리에 추락 사고 이후 하녀 직무에서 벗어난 그녀는 이제 그의 환복을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없었고, 아르문트 또한 괜히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으나, 의무와 필요를 떠나 직접 해주고 싶었다. 제 손가락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아르문트가 움찔거리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또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유독 다정해 더욱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장난을 친답시고 지나치게 몸을 지분거렸다가는 그에게 잡혀 하루의 시작이 몇 시간은 늦어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16549588922255.jpg “오늘은 그때와 다른 날이니까.”

16549588903165.jpg “뭐가 다른데요?”

16549588922255.jpg “재판이 끝난 뒤에 제법 바빠질 것 같거든. 그러니 아침부터 힘을 빼둘 수야 없지.”

로제타는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 있을 재판에서는 많은 것들이 바뀔 것이다. 그레이한은 황자의 자격을 박탈당한 뒤 멀고도 험한 곳으로 추방될 것이며, 모르트마르 백작과 황후 또한 무사하지만은 못할 테다. 아르문트는 황후의 이빨과 발톱을 뽑아낼 준비를 단단히 마쳤다. 다만 아무리 많은 준비를 했다고 해도 재판 뒤에는 더 많은 일감이 그에게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16549588903165.jpg ‘앞으로 한참은 더 바쁘겠네.’

로제타는 며칠째 하루 서너 시간밖에는 자지 못한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녀야 숱한 호위 업무 탓에 선잠을 자는 것이 익숙하지만, 아르문트는 갑자기 바빠진 삶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을 테다. 그럼에도 힘든 티를 전혀 내지 않는 그가 대견하면서도 안타까웠다.

16549588922255.jpg “로제.”

16549588903165.jpg “네?”

16549588922255.jpg “그대도 오늘 너무 무리하지 마.”

느닷없는 말에 로제타는 눈을 껌뻑거렸다.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49588922255.jpg “오후에는 함께 여행을 가야 하니까.”

로제타의 눈이 순식간에 커다래졌다.

16549588903165.jpg “여행…… 이요? 갑자기?”

16549588922255.jpg “응. 말했잖아.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가자고.”

생각해보니 그런 약속을 했던 것도 같았다. 다만 요즈음 너무 바빴던 탓에 마음 놓고 여행을 떠나려면 적어도 몇 개월은 지나야 할 줄 알았다.

16549588903165.jpg “저, 저야 너무 좋지만…….”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여행이라. 로제타에게는 정말 꿈만 같은 말이었다. 회귀하기 전에도 호위 업무로 바빠 여행은 꿈도 못 꿨으니까. 특히나 연인과 함께 가는 여행은 차마 상상하지도 못했다.

16549588903165.jpg “……괜찮겠어요? 일도 바쁜데.”

로제타는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야 너무 가고 싶지만, 괜히 아르문트에게 짐이 될까 걱정이 됐다.

16549588922255.jpg “이러려고 바쁘게 일했던 거야.”

16549588903165.jpg “그렇지만…….”

16549588922255.jpg “기대해, 로제.”

아르문트가 허리를 숙여 그녀와 시선 높이를 맞췄다. 그러곤 이마를 꽁 맞대며 말을 이었다.

16549588922255.jpg “오늘은 분명 최고의 날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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