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잔디에 스며든 핏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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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잔디에 스며든 핏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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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잔디에 스며든 핏방울
2022.05.12.
로제타는 눈치가 아주 빠른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나 연애 쪽과 관련해서는 경험이 전혀 없는 만큼 눈치도 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빠른 학습가였고, 연애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결과, 로제타는 방금의 대사만으로 오늘 아르문트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여행 가서 청혼하려고 하는구나!’
사실 그가 청혼을 준비하겠다고 대놓고 알려준 바가 있는 한,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일 것이다.
최고의 날이 될 거라며 확신하는 것만 봐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파악했다고 한들 굳이 그 사실을 떠벌릴 필요는 없다.
아르문트의 만족감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아무것도 모르는 시늉을 하다 청혼의 순간 깜짝 놀라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음.”
로제타는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막기 위해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자 아르문트가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방금만 해도 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으면서, 그녀가 대답을 망설이자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눈썹을 시무룩하게 늘어뜨린 모습이 풀 죽은 고양이 같았다.
진짜 귀엽다니까.
입꼬리가 또다시 씰룩거렸다. 다행히 흉한 미소가 튀어나오는 것만큼은 참을 수 있었다.
“좋아요. 어디로 갈 건데요?”
저도 준비는 해야 하니까요. 로제타가 빙긋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자 아르문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안도의 한숨을 삼킨 그는 상기된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비밀이야. 걱정 마, 아무 준비도 안 해도 돼. 이미 그대 친구들이 가방도 다 싸놨다더군.”
멜라니와 엘리아가 호들갑을 떨며 가방을 챙기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동시에 불길한 마음도 샘솟았다.
‘엘리아, 그 배운 변태가 또 이상한 물건을 넣어놓은 건 아니겠지?’
종종 셋이서 티파티를 할 때, 해맑은 얼굴로 어른들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를 소상하게도 떠들던 그녀였다. 심지어 이미 로제타에게 새빨간 끈을 선물했던 전적도 있다.
로제타는 아르문트 모르게 가방을 뒤져봐야겠다고 다짐했다. 행여 그에게 들켰다간 또 저번처럼 호된 꼴을 당할지도 모르니까.
“재판이 끝나고 급한 일처리만 끝내면 바로 출발할 테니, 그전까지 그대는 푹 쉬고 있도록 해. 마차를 오래 타야 해서 제법 힘이 들 거야.”
고작 마차를 오래 탄다고 힘들 리가 없는 로제타였으나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문트는 로제타가 제법 실력 있는 기사라는 사실을 안 뒤에도 이렇게 전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과할 정도의 걱정도 여전했다.
로제타로서는 그녀가 고이고이 보호해온 개복치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이 귀엽고도 고마울 뿐이었다.
“재판에는 꼭 와야겠나?”
그리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닐 텐데.
아르문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 로제타가 괜히 험한 소리를 들을까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그런 그를 안심시키듯 손을 꼭 붙잡아주었다.
“네. 저 전하랑 계속 붙어 다닐 건데요.”
“이런. 나만 미친 줄 알았더니 그대도 제법 중증이군.”
“그래서 싫어요?”
“그럴 리가. 부디 평생 나만 쫓아다녀줘, 이렇게 부탁하지.”
아르문트가 로제타의 손을 가운데에 두고 제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치며 기도하는 시늉을 하는 그였다.
별것 아닌 농담에도 로제타는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재밌게만 들렸다.
‘어휴, 또 저 난리네.’
한편, 문 너머에 서 있던 리처드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염장질에 그러려니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마음 같아서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서 제발 한 시간만 내외할 순 없는 거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제 직업이 너무 소중한 탓에 차마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저 러크에게 괜한 시비를 걸며 스트레스를 풀 뿐이었다.
다행히 로제타와 아르문트의 정다운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 재판 때 보지. 사랑해, 로제.”
서둘러 준비를 마친 아르문트는 상냥하기 짝이 없는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오늘은 가장 스케줄이 빽빽한 날이었다. 재판이 열리기 직전까지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고, 또 여행을 떠나기 전 처리해둬야 할 서류도 쌓여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로제타는 재판 전까지 아르문트를 코빼기도 보지 못할 예정이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재판만 끝나면 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기대감이 들었다.
‘호위는 발레리가 맡아서 해주기로 했고.’
다행히 웬만한 자리에 발레리안이 모두 동석하는 덕에 크게 걱정할만한 건 없었다.
흑마법사도 잡았겠다, 모르트마르 쪽에도 사람을 심어놨겠다.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아도 될 상황이었다.
‘엘리아가 싸둔 가방이나 확인하러 갈까.’
마차로 가기 위해 뒤를 돌았을 때였다.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준수한 외모의 기사. 알렉이었다.
“메이필드 영애. 좋은 아침입니다.”
“아. 알렉 경, 안녕하세요. 경이 오늘 제 호위를 맡아주셨나요?”
“예. 그렇습니다.”
알렉은 쭈뼛쭈뼛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술자리도 가졌건만 아직도 그녀를 몹시 어색해하는 모양새였다.
‘하긴, 주군의 아내가 될 사람이니 부담스러운 것도 무리는 아니지.’
로제타는 이렇게 생각하다 말고 얼굴을 붉혔다.
아내.
내가 누군가의 아내가 되는 거구나.
새삼 믿기지가 않아 심장이 쿵쾅거렸다.
로제타는 고개를 돌려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곱게 물든 단풍이 겨울을 예고하듯 반쯤 사라져 있었으나 그래도 아직은 가을이었다.
어디서 듣기론 가을에 떠나는 여행이 그렇게 아름답다던데. 오늘 아르문트와 그 모습을 감상할 수 있겠다.
로제타는 천천히 눈을 감고 제 가슴속을 맴도는 기대감을 기꺼이 즐겼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소망했다.
최대한 빨리 재판이 지나가버리길. 그리하여 얼른 아르문트와 다시 마주하기를 말이다.
***
안타깝게도 로제타는 시간과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시간은 그녀의 바람을 읽은 듯 얄밉게도 느리게만 흘렀다.
느릿느릿 아침을 먹은 후, 멜라니의 도움을 받아 치장하고, 여행 가방 속에 들어있던 열두 개의 은밀한 물품을 치워버린 뒤, 황성의 경비 상황까지 확인했음에도 재판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다.
“알렉 경…… 뭐 시간 잘 갈만한 거 없을까요?”
“글쎄요. 저는 잘…….”
“아…… 그럼 혹시 배는 안 고프세요? 다과라도 같이.”
“저는 괜찮습니다.”
“아, 네…….”
하필이면 오늘 그녀의 호위를 맡은 알렉은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조용한 편이었다.
로제타가 무어라 말을 걸면 어색한 단답으로 대꾸하기 일쑤였는지라, 그녀는 결국 그와의 대화를 포기했다.
왜 멜라니가 ‘그 자식은 얼굴만 재밌고 다 재미없어!’라며 열변을 토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때 로제타는 그럼 재미있는 러크랑 사귀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다가 살벌한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인생에 재미는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재미에 인생을 걸 수는 없다’라는 명언도 함께였다.
‘차라리 지금 러크가 옆에 있다면 좋을 텐데!’
귀찮긴 하겠지만 적어도 러크가 있으면 시간은 빨리 갈 것이 분명했다.
‘한 시간. 딱 한 시간 남았어.’
한 시간만 지나면 이 지루함도 해방이었다.
물론 재판 내용도 썩 흥미롭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아르문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질 테다.
다만 문제는 한 시간을 무얼 하며 보내느냐였다.
이미 할만한 건 전부 했기에 소파에 앉아 휴식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워낙 활동적인 성향인지라 가만히 있는 게 영 익숙하지가 않아 좀이 쑤셨다.
다행히 그런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다가온 사람이 있었으니.
“로제타 양!”
다정한 인상의 여인, 마담 르블랑이었다.
“마담!”
로제타가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마담을 반겼다. 지금 그녀에게는 마담 르블랑이 그 누구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마담은 예상치 못한 환대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어머나, 기운도 좋으시네요. 좋은 날이라서 그런가요?”
“아, 아뇨. 반가워서 그만…….”
“저도 반가워요, 로제타 양. 오늘도 너무 아름다우시네요. 키가 크셔서 그런지 어떤 옷이든 참 잘 어울리세요.”
마담 르블랑이 입을 가리고 호호 웃음을 흘렸다. 다정한 눈길이 로제타를 향했다.
귀여운 아기를 보는 듯한 시선이 민망해 로제타는 입술을 움찔거렸다.
“마담도 녹색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리세요.”
“아, 고마워요. 제법 비싼 돈 주고 산 거랍니다. 황궁에 올 때만 입으려고요.”
말을 듣고 보니 꽤 비싸 보이긴 했다. 작고 동그란 장식들이 여기저기 달려 반짝거리는데도 촌스럽지 않고 우아한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시간이 너무 안 가네요. 담소도 나눌 겸 차라도 함께 하지 않으실래요?”
“저야 좋죠. 어디로 갈까요?”
“음…… 날도 좋으니 바깥으로 가요.”
로제타는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이라는 재미없는 인간과 어색해 죽을 것 같은 시간을 보내던 그녀에게 마담 르블랑은 그야말로 구세주나 다름이 없었다. 아마 알렉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테다.
마담 르블랑은 과거 자신이 궁에 살던 당시 알아놓은 장소라며 로제타를 후원으로 안내했다.
장미 정원과 연못을 지나 도착한 곳은 그야말로 연인들의 비밀 장소 같은 곳이었다.
가을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는 잔디밭의 모습은 잘 관리된 느낌은 아니었으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와, 멋진 곳이네요. 왠지 황궁 같지 않은 느낌이에요.”
로제타가 쟁반을 잔디밭 한가운데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감탄했다.
“예쁘죠? 남편과 몰래 연애할 때 종종 왔던 곳이랍니다.”
“세상에. 그런 추억이 있는 곳이었군요. 초대해 주셔서 영광이에요.”
“로제타 양한테만 특별히 알려주는 거예요.”
마담 르블랑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러곤 말릴 새도 없이 능숙한 자세로 차를 따랐다.
“드셔보세요. 우리 로제타 양께 드리려고 특별히 공수해온 차랍니다.”
“아, 감사합니다.”
로제타는 주저하지 않고 차를 들이켰다.
한 모금 삼킨 후에야 미약한 의심이 솟았으나 역시나 별다른 중독 반응이 나타나진 않았다. 확인차 몇 모금 더 마셔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담까지 의심하게 되네.’
그녀는 부드러운 맛을 음미하며 속으로 씁쓸한 마음을 삼켰다.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마담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르문트를 살리기 위해선 마지막까지 그 누구에게도 의심을 늦춰서는 안되니까. 물론, 그 대상에 발레리안은 없었다.
의심한 것이 민망하게도 즐거운 티타임이 죽 이어졌다.
로제타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마담 르블랑이 들려주는 아르문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경청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사십 분이 훌쩍 지나간 후였다.
‘이제 슬슬 가야…….’
그녀는 뒤를 돌아 본궁이 있는 쪽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스릉. 익숙한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동시에 믿기지 않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
서슬 퍼런 검날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마담!”
비명과 같은 외침이 후원을 울렸다. 그리고 이내 붉은 핏방울이 잔디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