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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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배신
2022.05.15.
툭, 투둑.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러나 로제타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충격적인 장면이 그녀의 시선을 잡아챈 탓이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저 자객이 나타난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지금 같은 기분은 느끼지 않았을 텐데.’
로제타는 참담한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주르륵, 하얀 손등에서 피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한심하게도 틈을 보이고 만 것의 결과였다. 변명하건대, 너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인지라 한 박자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로, 로, 로제타 양……!”
그녀의 뒤에는 어느새 마담 르블랑이 있었다. 그것도 몹시 놀라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방금 죽을 뻔했으니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로제타가 조금이라도 더 느리게 움직였다면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테다.
그리고 로제타의 앞에는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화사한 금발에 훈훈한 외모를 지닌 청년. 그녀가 직접 아르문트를 설득하여 호위 직책을 맡긴 기사, 알렉이었다.
“경. 무슨 짓이에요.”
로제타는 테이블 위에 있던 버터나이프를 쥔 채로 물었다.
제 사람들에겐 언제나 부드러웠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서늘했다.
“왜 마담을 공격했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지한 얼굴로 호위에 임하던 알렉은 느닷없이 마담에게 달려들어 목을 노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 데다가, 알렉의 실력도 좋은 편인지라 로제타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으리라.
혹시 자신이 모르는 사이 마담이 무슨 짓이라도 한 걸까. 그러나 그렇다기엔 말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마담 르블랑을 눈여겨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무리 수상쩍은 행동을 했다고 해도 황태자의 유모인 그녀를 단숨에 죽이려 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제압하고 아르문트의 처사를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바로, 그가 첩자라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는 괴롭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사과의 말을 뱉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그와 동시에 검을 다시 고쳐 쥐었다.
부웅!
날카로운 검날이 허공을 갈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로제타가 있던 곳이었다.
“꺄아악!”
알렉이 검을 휘두르는 장면을 목격한 마담 르블랑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내질렀다.
로제타는 그런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끌며 빠르게 티 테이블을 걷어찼다.
쨍그랑! 째앵!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찻잔과 주전자가 사방으로 날아가 조각났다.
엎어진 테이블은 제법 나쁘지 않은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리 튼튼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마담 르블랑을 보호해줄 정도는 되었다.
“마담, 여기 계세요.”
“로, 로제타 양! 위험……! 꺄악!”
마담은 다급히 로제타를 말리려 했으나, 알렉과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다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바짝 엎드렸다. 작은 몸이 안쓰럽게도 벌벌 떨렸다.
걱정보다 공포가 앞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나 마담처럼 전혀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이라면 더더욱.
다만 로제타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알렉을 찬찬히 훑어보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후원 중에서도 가장 동떨어진 장소였다.
본궁에서는 아주 멀진 않았지만, 빽빽한 수풀이 시야를 가려놓았고 소리도 차단했다. 그 탓에 크게 소리를 지른다 해도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즉, 다른 사람 몰래 누구 한 명 암살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 아마 알렉도 이를 노린 것이리라.
‘여기서 죽는 건 내가 아닐 텐데.’
로제타는 그를 사납게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실력 차가 명백한 상황이니 걱정할 것은 없다. 마담 르블랑을 보호하면서 알렉을 무릎 꿇리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선택했던 사람이, 함께 술자리에서 웃고 떠들던 그가 아르문트를 배신했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
“왜 아르문트를 죽이려 해요?”
그가 뭘 잘못했다고.
그녀가 버터나이프를 강하게 움켜잡으며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알렉은 우울한 목소리로 제안해왔다.
“얌전히 계시면 아프지 않게 끝내드리겠습니다.”
“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저딴 걸 배려랍시고 말한 걸까. 알렉의 눈빛이 진지한 게 느껴져 더욱 분노가 끓어올랐다.
더는 대화할 가치가 없다. 이렇게 판단한 로제타는 쥐고 있던 버터나이프를 빠르게 내던졌다. 정확히 알렉의 머리를 노리고.
“큭!”
그러나 그녀가 인정했던 것처럼, 알렉은 제법 재능있는 기사였다. 그 찰나에 나이프를 가까스로 피한 것만 해도 그랬다.
완벽하게 피하진 못한 까닭에 그의 얼굴에 빨간 빗금이 그어졌다.
알렉은 눈살을 찌푸리며 로제타를 차갑게 응시했다.
다만 그 눈동자에는 분노보다는 씁쓸함이 더 많이 묻어났다.
“……실력이 대단하신 건 저도 압니다만. 이제는 무기도 없으시잖습니까.”
작게 한숨을 내쉰 알렉이 검을 치켜든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제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제발, 제가 당신을 더 괴롭게 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꺄아악! 아악!”
알렉이 가까워질 때마다 마담 르블랑은 목 따가울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반면 로제타의 얼굴은 침착하기만 했다.
“누가 없대요?”
그녀는 자조의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손을 뻗어 보였다. 당연하게도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얇은 은반지만이 반짝거렸을 뿐이었다.
“있어요, 무기.”
극도의 공포에 미치기라도 한 건가.
알렉이 이렇게 추측한 순간이었다.
번쩍!
그녀의 손에서, 정확히는 반지가 있던 곳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알렉은 반사적으로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로제타의 뒤에 숨어 있던 마담은 또다시 괴성을 질렀다.
오래 지나지 않아 빛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로제타의 손에는 어느새 화려한 보검이 들려 있었다. 회귀 전 아르문트가 준 검이었다.
‘마법 물품……!’
정체를 파악한 알렉이 재빨리 검을 휘둘렀으나 이미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시야가 잡아챈 순간 날카로운 검격이 그의 목을 노려왔다.
“크읍……!”
용케도 막아냈으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그녀의 힘이 자신의 것을 압도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게 원인이었다.
손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며 팔에 힘이 빠졌다. 알렉은 재능 있는 기사답게 서둘러 반대 손으로 검을 잡았으나 이미 승기는 놓치고 말았다.
터억!
작은 손이 순식간에 그의 목을 붙잡았다. 발버둥 칠 새도 없이 엄청난 괴력이 그의 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녀가 검을 소환한 지 단 10초도 지나지 않아 승부가 갈린 것이었다.
“커억!”
알렉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몸을 꿈틀거렸다. 얼른 일어서려 했으나 이미 그녀의 발이 배를 누르고 있었다.
“더 움직이면 부러트릴 거예요.”
농담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발에 힘이 들어갔다. 터질 것 같은 압박감에 알렉이 힘겹게 컥컥댔다.
“편하게 보내줄 생각은 없으니, 괜한 기대는 말고.”
당장이라도 그를 죽이고 싶은 듯 눈초리가 몹시 살벌했다.
착각은 아니었다. 지금 바로 눈앞의 배신자를 처단하고 싶어 목구멍이 다 뜨거울 지경이었으니까. 변명 따위는 이제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배후를 알아내고 증거를 더 모으기 위해선 참아야만 했다.
까득.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누가-.”
누가 시켰어.
너무나도 뻔한 질문을 입에 담으려던 때였다.
쿵!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마담이 있는 쪽이었다.
얼른 고개를 돌렸으나 방패처럼 세워진 테이블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도르륵, 눈동자를 굴리자 테이블 옆으로 비죽 삐져나온 팔이 시야에 담겼다.
하얀 팔이 힘없이 바닥에 늘어진 모습에 덜컥 두려움이 샘솟았다.
“마담?”
로제타가 다급히 마담을 불렀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도 움찔거리지 않는 모습으로 보아,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게 확실했다.
‘뭐지? 왜 갑자기……!’
다른 자객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혹 너무 놀라 기절이라도 한 걸까.
정답이 무엇이든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얼른 알렉을 기절시키고 그녀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수가 없었다.
느닷없이 몸이 무거워졌다. 눈꺼풀이 의도와 상관없이 감기더니, 시야도 조금씩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제야 마담이 쓰러진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차에 무언가 들어 있었어.’
의식이 순식간에 희미해지는 것으로 보아, 수면제 계통일 것이다. 약효는 천천히 드러나지만, 아주 강력한.
어지간한 독과 수면향에는 면역이 있는 그녀였다. 그런데도 제 상태가 이렇다는 것은, 차에 들었던 수면제가 무척 희귀한 것임을 뜻했다.
황후.
로제타가 화려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강하게 짓씹었다.
어떻게든 참아내야만 했다. 이대로 잠들었다간 아르문트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망스럽게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피가 줄줄 흐를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는데도 의식은 점점 흐려져만 갔다.
로제타의 다리가 크게 비틀거렸다. 검을 잡은 손에도 힘이 약해졌다.
“너, 이 새끼……!”
그녀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알렉을 응시했다.
알렉은 숨을 거칠게 씨근덕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지, 크게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쿠당탕!
기어코 로제타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정신 차려야 해. 정신을 차려야……!’
기다란 손가락이 절박하게 잔디를 잡아 뜯었다.
로제타는 어떻게든 눈을 뜨고자 발악하며 머릿속으로 아르문트의 이름을 되뇌었다.
이내 알렉이 죄송하다며 다시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금세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렇게 로제타는 진득한 어둠에 의식을 빼앗기고 말았다.
***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
일찍부터 도착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아르문트는 연신 불안한 얼굴로 문 쪽을 흘끔거렸다.
“왜 그러세요? 이렇게 좋은 날에 인상을 쓰시고.”
그의 뒤를 지키던 러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로제타가 아직 안 왔다.”
그의 대답에 리처드와 러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재판이야 그녀가 없어도 별 무리 없이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아직 로제타가 오지 않은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웬만해서는 시간 약속을 칼같이 지키던 그녀다. 특히나 아르문트와의 약속은 절대 늦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날 갑자기 지각이라니.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찾으러 가봐야겠어.”
아르문트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파리해졌다.
그는 재판이 곧이라는 것도 잊고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하필이면 지금 재판이 시작되고 만 것이었다.
아르문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저 멀리 포박된 그레이한을 한 번, 황후의 뻔뻔한 얼굴을 한 번 바라본 그는 고민하듯 주먹을 강하게 말아쥐었다.
이대로 나간다면 재판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지금까지 노력해온 것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뭐.’
그러나 그에겐 역시 그 무엇보다도 로제타가 중요했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 결국은 로제타를 위한 것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렇기에 아르문트는 주저하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