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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로제를 어떻게 했어 (127/145)


127화. 로제를 어떻게 했어
2022.05.19.


그러나 한 발자국도 채 나아가기 전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러크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리처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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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을 겁니다.”

아르문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고작 괜찮으리라는 말로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그의 걸음을 붙잡기에는 역부족한 표현이었다.

이를 짐작한 듯 리처드가 재빨리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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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마담 르블랑과 함께 티 타임을 가지러 간다 하셨습니다. 마담께서 워낙 살가운 분이시니, 그저 대화가 길어진 것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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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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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알렉 경이 호위하고 있는 한 별일은 없을 겁니다. 단장님이 인정할 정도로 재능있는 친구니까요.”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아르문트는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처드의 말이 합리적이라는 건 알았지만,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이곳에 있어야 할 대마법사 또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더욱 그를 불안하게 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를 찾으러 갈 이유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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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

아르문트가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사나운 기세에 리처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오늘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으면 상황이 어떻게 악화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아르문트를 설득할만한 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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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흐지부지 끝나면 로제타 양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역시나 가장 좋은 선택지는 로제타를 언급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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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모든 사람이 전하와 로제타 양의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로제타 양을 얼마나 아끼는지. 황후 쪽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절대 놓쳐선 안 되는 기회라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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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맞아요! 전하, 지금 나가면 로제타 님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이리저리 눈치만 보던 러크가 재빨리 리처드를 지원했다.

그의 눈에는 그저 아르문트가 사랑에 눈이 먼 나머지 과민반응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흑마법사의 잔당까지 모두 잡은 마당에 걱정할 것이 무어가 있겠는가 이 말이다.

아르문트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꾸만 마음 한구석에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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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앉으시죠. 보는 시선이 많습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시선이 아르문트에게 쏠려 있었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황제까지 의아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결국, 그는 리처드의 설득에 못 이겨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금 제 머리를 떠도는 걱정들이 모두 쓸데없는 것이었기를 간절히 바라며.

재판은 황자를 벌하기 위한 자리인 것치고 제법 평범하고 조용하게 흘러갔다.

밧줄에 꽁꽁 묶인 채 경비의 손에 끌려온 그레이한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더 이상의 발버둥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듯했다.

얌전한 것은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황제의 옆에 고상하게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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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자를 왜 여기까지…….’

아르문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황제를 응시했다.

감히 자신의 자리를 노린 것이 화는 나지만, 그렇다고 황후까지 쳐내고 싶지는 않다는 건가.

하긴, 드넓은 궁에서 황제를 살뜰히 챙기는 것은 황후가 유일했다. 그 속에 담긴 진심이 무엇이건 말이다.

황자를 멀리 보내놓고 나면 황후도 다른 마음은 못 먹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제 아내를 귀한 수집품 정도로만 여기는 자이니 무리도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 방에 감금되어 있던 사람치고, 황후는 제법 혈색이 좋아 보였다.

금빛 머리칼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얇은 입술은 언제나처럼 붉은 칠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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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치장이라니, 대단도 하군.”

루니엘라 공작의 곁에 앉아 있던 귀족이 수군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으나 워낙 주변이 조용했던 데다, 나이가 지긋한 재판장의 목소리가 더욱 나직했던 탓에 웬만한 사람은 다 듣고 말았다.

몇몇 귀족들이 그쪽을 쳐다보자 발언자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쯧, 루니엘라 공작이 질책하듯 혀를 찼다. 발언자의 고개는 더욱 아래를 파고들었다.

이 정도라면 황후에게도 들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정작 황후는 전혀 기분 나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란 듯 우아하게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한때 이름 높았던 미인답게 무척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아무도 이에 감탄하지 않았다. 루비 같은 눈동자에 가득 담긴 광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한 까닭이었다.

귀족들은 소름이 오소소 돋은 피부를 문지르며 애써 황후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모르트마르 백작이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이었다. 다혈질인 그가 들었다간 분명 어떻게 감히 황후를 우롱하냐며 소란을 피워 재판을 방해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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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 큼…….”

재판장이 좌중을 둘러보며 헛기침했다. 덕분에 산만했던 분위기가 다시 조용해졌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레이한의 죄를 하나하나 읊어주었다.

비밀의 방으로 통하는 거울에 남아 있던 그레이한의 마나, 그 속에서 발견한 저주의 흔적 등 수많은 증거가 열거되었다. 대부분 몹시 명료하여 달리 빠져나갈 구석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을 터였다.

여태까지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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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 그레이한 이샤벳 폰 라그나르는 이러한 공소사실을 인정합니까?”

그레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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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하세요!”

재판장이 드물게 큰 목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침묵을 지키는 그레이한의 모습에 아르문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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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멍청한 새끼는 끝까지 도움이 되질 않는군.’

얼른 끝내고 로제타를 찾으러 가야 하는데.

그가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린 채 관자놀이를 짜증스럽게 툭툭 두드렸다.

그 순간, 전혀 다른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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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곱게 화장한 눈이 곱게 휘어졌다.

기껏 떼어냈던 시선이 다시금 황후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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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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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내 분명 조용히 있으라고 했잖소!”

황제가 참다못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가 따가울 정도의 노성이 벽력같이 뻗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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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히만 있으면 어떻게든 유배형으로 맞춰 보겠다고 그렇게 설명을 해두었거늘, 어떻게 이리도 멍청할 수가 있어!”

귀족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아르문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썹만 꿈틀거렸다.

황제가 뒤에서 그런 약속을 했으리라곤 충분히 짐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화가 났대도 저렇게 대놓고 말할 줄이야. 제 아비가 얼마 있지도 않던 총명함마저 잃었음이 더욱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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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

황제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황후에게 침을 튀겨댔다.

격한 언사가 이어졌지만, 황후는 마치 황제가 보이지 않는 양 행동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눈도 잘 깜빡이지 않고 한곳을 응시하는 모습이 매우 기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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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보는 거지?’

아르문트는 고개를 돌려 황후의 시선이 향하는 쪽을 살폈다. 곧 홀의 정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끼익-.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알렉이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알렉의 얼굴에 실금처럼 그어진 상처가 그의 시선을 잡아챘다.

순간 아르문트의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졌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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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내 말 듣고 있소? 도대체 지금 무얼 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홀을 울렸다. 덕분에 알렉은 아르문트를 제외한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그러나 느리진 않게 걸음을 옮겼다.

아르문트는 자신을 향해 온다고 확신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어쩐지 방향이 미묘하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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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굴면 황후도-!”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외침이 끝을 맺었다.

동시에 그의 목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알렉이 황제의 목을 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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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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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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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

황제의 몸이 힘없이 떨어짐과 동시에 비명이 난무했다.

아르문트는 황제를 무참히 살해한 기사를 멍하니 응시했다.

제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에 대한 복수심은 없었다. 그저, 한 가지 의문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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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이 배신자라면, 로제타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극도의 충격에 다리가 일순 비틀거렸다.

리처드는 그런 그를 재빨리 뒤로 이끌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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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얼른 이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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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기사가 폐하를 살해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아르문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무거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황제의 자리에 서서 아르문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황후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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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이다! 당장 황태자를 잡아라!”

모든 사람의 시선이 아르문트에게로 일제히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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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황후가 짠 덫에 제대로 걸려들고 말았다는 사실을.

쾅!

이를 증명하듯 홀의 정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그와 동시에 낯선 행색의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들어섰다.

어깨에 걸친 망토 위 문양이 낯설지 않았다. 붉은 바탕에 뱀이 그려진 것. 모르트마르 백작가의 문양이었다.

아르문트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저렇게 많은 인원이 황궁의 문을 통과하는 동안 그 누구도 제게 보고하지 않다니.

그만큼 황궁이 황후와 모르트마르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다는 뜻이었다. 알렉을 제외하고도 수없이 많은 배신자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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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라!”

황후와 그레이한을 보호하듯 둘러싼 기사들이 아르문트를 향해 돌진했다.

리처드가 다급히 검집을 잡으며 아르문트의 앞을 막아섰다.

황실 소속의 기사들도 서둘러 모르트마르 백작가의 사병을 향해 검을 뽑았다. 그러나 그중 일부는 모르트마르가 아닌 제 동료들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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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어떻게 해야……!”

어린 나이의 기사 한 명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아르문트를 불렀다.

아르문트는 서늘한 표정으로 검을 고쳐 잡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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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트마르가 방만하게 구는 꼴을 더 볼 순 없지.”

새카만 검날이 가장 가까이 있던 적의 목을 갈랐다.

투둑, 붉은 핏방울이 아르문트의 속눈썹 위로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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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빠짐없이 죽여라.”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진짜 반역자들을 모두 처단하고, 황후와 그레이한, 그리고 모르트마르 백작을 효수하는 것.

무릇 역사란 승자에게 맞춰 쓰이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아르문트는 자신을 공격해오는 이들을 베고 또 베었다.

그중에는 한때 자신의 편이라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으나, 검을 휘두르는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피가 잔뜩 튀어 온 얼굴이 붉게 물들어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제 길을 가로막는 이들을 모두 죽이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곧 목적지에 다다랐다. 황후와 모르트마르 백작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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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붉게 젖은 입술 사이로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찢어 죽이고 싶은 듯 살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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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를 어떻게 했어.”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검 끝이 알렉의 목젖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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