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전 대륙을 뒤져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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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전 대륙을 뒤져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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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전 대륙을 뒤져서라도
2022.05.22.
목에 검이 드리워진 상황에도 알렉의 표정은 침착하기만 했다.
그는 마치 이런 결과를 진작부터 예측했다는 듯, 차분하게 아르문트를 올려다보았다. 컴컴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 위로 체념이 묻어났다.
“죄송합니다.”
알렉이 시선을 떨구며 답했다.
쿵.
또다시 아르문트의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뜨거운 숨결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뱉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불덩이가 가슴속에서 이글거리는 기분이었다.
검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탓에 알렉의 목에 상처가 나 피가 맺혔다.
제법 따가울 텐데도 그의 얼굴에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어딘가 슬픈 얼굴 그대로였다.
“그녀를,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아르문트가 한 단어 한 단어 짓씹어 뱉어내듯 말했다.
어느새 그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눈가 옆으로 불거진 핏대가 그의 심정을 짐작하게 했다.
“당장 대답해.”
검이 알렉의 목을 더 파고들었다.
알렉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으나 단지 그뿐. 피하려 하거나 목숨을 구걸하진 않았다.
입을 꾹 닫은 그의 모습에 기어이 아르문트의 눈이 돌았다.
“어떻게 했어!!”
뻐억!
아르문트는 핏줄이 흉흉하게 돋은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알렉의 몸이 뒤로 나뒹굴었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그에게 잠시의 쉴 틈도 주지 않았다.
아르문트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알렉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있는 힘껏 날린 주먹에 코뼈가 볼썽사납게 비틀려 있었다.
알렉은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아르문트가 원하는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겨우겨우 끄집어낸 답변도 아까와 다를 바 없는 사과가 끝이었다.
당장 저 새끼의 목을 자르자.
아니, 그렇게 쉽게 죽일 수야 없다. 혀를 뽑고 사지를 잘라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하자.
잔혹한 욕구가 아르문트의 온몸을 지배했다.
견딜 수 없는 살의로 팔다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알렉을 죽이지 않았다. 혀를 뽑지도, 사지를 자르지도 않았다.
닳을 대로 닳아 바닥이 훤히 보이는 인내심을 어떻게든 끌어내 미친 듯이 솟아오르는 살의를 참아냈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로제타를 찾기 위해선 알렉이 가진 정보가 필요하니까.
그렇기에 그는 부릅뜬 눈으로 알렉을 마주 보며 멱살을 쥔 손에 힘을 풀어냈다.
그러나 알렉은 마지막까지 그의 뒤통수를 쳤다.
콰직!
힘없이 아르문트를 응시하던 푸른 눈에 초점이 흐릿해졌다.
그와 함께 얇은 입술 사이로 피가 콸콸 흘러내렸다.
쿵!
어린 기사의 몸이 바닥으로 늘어졌다.
아르문트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좇아갔다. 벌어진 입술 속에서 붉은 혈액이 계속해서 분출되었다. 혀가 잘린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참았는데.
네 아가리를 찢어버리고 싶은 것을 어떻게 참아냈는데.
이딴 식으로 죽어버리면, 로제타의 행방은 어디서 알 수 있단 말인가.
허망함이 뼛속까지 사무쳤다. 힘이 가득 들어가 있던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전하!”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르트마르의 사병 무리를 상대하던 리처드가 빠르게 곁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그도 온몸이 피로 물든 모습이었다.
“그러고 있을 새가 없습니다! 얼른 움직이세요!”
“크윽! 새끼들, 더럽게 끈질기네! 6 대 2라니 양심도 없냐 미친놈들아!”
러크 또한 쉴 틈 없이 검을 휘두르며 아르문트를 호위했다. 이 상황에도 입이 산 걸 보아 아직은 할만한 모양이었다.
“로제타 양을 찾으러 가셔야죠!”
아르문트가 다시 검을 움켜잡았다.
그래, 리처드의 말이 옳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로제타는 분명 무사히 살아 있을 것이다.
‘대마법사. 그가 있으니까.’
대마법사가 재판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어쩌면 로제타를 지키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끔찍이도 아끼는 그이니 확실했다.
적어도 그가 있는 이상, 로제타가 죽거나 다칠 일은 없을 테다.
아르문트는 발레리안이 전능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자위했다. 그러지 않고선 도무지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어떻게든 알아내면 그만이야.’
전 대륙을 다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움직여야 했다.
가장 첫 단계는 이 계획의 주동자, 황후를 잡는 것이었다.
“가지.”
“예, 전하!”
또다시 살육이 시작되었다.
아르문트의 편에 선 기사들은 모르트마르를 상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도중 많은 이가 깊은 상처를 입었고 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적은 수로 시작한 것치고는 매우 잘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홀 전체를 뒤덮던 모르트마르의 사병들이 이제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조금 전 아르문트가 알렉에게로 향하던 때, 러크와 리처드가 크게 활약한 것이 컸다.
그리하여 아르문트는 제법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중간중간 작은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홀을 지나 복도에 다다르자 낯설지 않은 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커다란 덩치에 험악한 얼굴을 한 노장.
황실의 현 기사단장인 다이크였다.
“황태자 전하!”
다이크는 아르문트가 어렸을 때부터 검술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나, 그의 편이라고 확신할 순 없는 자였다.
대마법사인 발레리안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정치적 중립을 지켜왔기 때문이었다.
모르트마르의 유혹과 아르문트의 포섭에도 그는 늘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저는 그저 황실을 지키는 기사일 뿐입니다.”
그에게 황실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그것이 자신일 것이라 확신할 수 없어 아르문트는 경계하듯 다이크를 살펴보았다.
그 답은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알 수 있었다.
“무사하셨군요……!”
다이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환희했다. 물론 말하는 중에도 근육이 가득한 팔을 휘두르는 건 잊지 않았다.
은퇴를 앞둔 나이의 기사가 거대한 도끼를 내지르자 병사 여럿의 목이 잘 익은 감처럼 후두두 떨어졌다.
이미 그의 곁에 붉은 망토 차림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르문트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적을 무찌르고 이곳까지 온 모양이었다.
“……다이크 경.”
“다행입니다,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리처드, 러크. 둘 다 수고했네. 큰일을 해주었어.”
아르문트는 자신을 위해 눈물짓는 다이크를 보며 짧게 침묵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심 기사단장이 자신의 손을 들어줄 리 없다고 생각해왔던 탓이었다.
유난히 무뚝뚝한 태도도, 엄격한 수업 방침도 모두 자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는 이 황궁에 진정 자신을 위하는 이는 없다고 믿었다. 로제타만이 유일하게 변함없는 진심으로 자신을 품어주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이크는 아르문트의 무사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리처드도, 러크도, 다른 황궁 기사들도.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를 지켜주었다.
그의 곁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알렉이 그런 것처럼 언젠가는 다시 돌아설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목숨을 걸고 함께하는 마음만큼은 분명 의심할 수 없는 진심이었다.
아르문트는 이를 꽉 깨물었다.
제 기분을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으나, 한 가지만큼은 선명했다.
‘로제. 그대에게 얘기하고 싶어.’
가슴이 벅차오르는 이 기분도. 로제타에 대한 걱정으로 매초 가슴이 찢어지는 이 고통도.
모두 그녀를 만나 털어놓고 싶었다. 지나고 나니 별것 아니었다며 너스레를 떨면서.
“경. 황후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가.”
“예. 백작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들었습니다. 황제 폐하의 방으로 향하는 모양입니다.”
그곳엔 왜?
아르문트가 미간을 구기며 이유를 추측했다.
자신을 확실하게 처리하지도 않고 걸음을 서두를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의문을 읽은 듯 다이크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마, ‘라그나르의 심장’을 가지러 간 것 같습니다.”
“그건 전설에나 나오는 보석이지 않나.”
“그렇게 알려져 있기는 하나, 분명 실존합니다. 비록 몇십여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지만요.”
라그나르의 심장.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그에 대해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다.
초대 황제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그것은 천금보다 귀하며 그 어떤 무기보다 강한 보석으로, 가히 신이 내린 것이라 말할만한 힘을 지녔다고 했다.
생김새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속에 담긴 힘을 사용하면 이 세상을 떡 주무르듯 다스릴 수 있다더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게 정말 실존한다면 제 아버지가 가만두었을 리가 없다. 욕심에 눈이 먼 인간이니 분명 어떻게든 찾아 헛짓거리를 했으리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혹시라도 정말 폐하의 금고에 라그나르의 심장이 숨겨져 있고, 그것이 황후의 손에 들어간다면…….”
“…….”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아르문트는 대답 대신 제게 돌진해오는 병사에게 검을 찔러넣었다.
이자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건만 저 멀리서 적들이 한 무더기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곳은 경에게 맡기지.”
“예!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다이크와 그의 부하들이 절도 있게 인사를 올렸다.
아르문트는 그런 그들을 지나쳐 계단으로 빠르게 달렸다.
나선형의 계단과 2층 복도에도 모르트마르의 수하가 쫙 깔려 있었다.
그들은 아르문트를 발견하자마자 떼거리로 달려들었다. 다행히 길이 넓지 않아 효율적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할 수 있었다.
“헉, 허억…….”
“러크, 괜찮나?”
“그럼, 헉, 괜찮고말고!”
그러나 계속되는 전투에 피로가 누적되는 것만큼은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2층에 올라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러크가 부상을 입고 말았다.
쉴 새 없이 싸우다 보니 움직임이 둔탁해진 것도 있고, 잠시 한눈을 판 탓도 있었다.
전투 중 한눈을 팔다니, 바보 같은 짓인 걸 알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복도 곳곳에 차마 피하지 못하고 변을 당한 사용인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멜라니.’
하필이면 멜라니는 오늘 본궁에 볼일이 있다 했다.
그의 오랜 친구. 이제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그녀가 저 시체 속에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두려움 탓에 자꾸만 자세가 흐트러졌다.
“러크 경.”
보다 못한 아르문트가 입을 열었다.
호된 질책이 이어지리란 예상에 러크는 미리부터 고개를 숙였다.
“괜찮을 거다.”
그러나 아르문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전에 없이 상냥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러크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질책 의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내지.”
사실 이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로제타는 무사할 거다. 그러니까 힘을 내서 싸워야 한다.
아르문트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되뇌며 앞을 막아서는 이들을 모두 죽여 없앤 끝에 황제의 방이 가까워졌다.
마침내 방 안으로 발을 들이려는 순간이었다.
화르륵!
거대한 불덩어리가 아르문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차마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전하!”
리처드가 다급히 부르짖으며 아르문트를 향해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