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질투가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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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질투가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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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질투가 나서
2022.05.29.
콰앙!
고막이 터질 듯한 소리와 함께 작은 방이 거세게 흔들거렸다.
이 정도 충격이라면 문이 부서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니, 아예 벽 한편이 무너져내리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게 웬걸.
먼지 사이로 드러난 철문은 멀쩡하기만 했다. 표면 위로 미세한 흠이 생긴 것 말고는 조금 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로제타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말도 안 돼.’
분명 있는 힘껏 찼는데, 저렇게나 멀쩡하다니.
그녀의 괴물 같은 근력을 생각했을 때,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무언가 조치를 해둔 건가? 아니면 설마 힘이 부족했나?
로제타는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고는 다시 한번 문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어깨로 찍어볼 생각이었다.
쾅!!
또다시 천둥 같은 소리가 방을 흔들어놓았다.
그리고 철문은 여전히 흠집이 조금 더 생긴 것 말고는 멀쩡했다.
이쯤 되니 확실해졌다. 제 능력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문과 벽에 단단히 조처를 해둔 모양이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드러났다.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로제타는 제 검지에 끼워진 은반지를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자 휘황찬란한 빛이 터져 나오며 그녀의 손바닥 위로 검이 생성되었다.
마법 물품을 가지고 있다는 걸 봤으면서도 이렇게 내버려 두다니.
자신을 이곳에 가둔 이의 오만함에 치가 떨림과 동시에 그 여자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겠다는 의지가 솟았다.
그녀는 철문과 벽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어쩌면 벽이 너무 심하게 부서져 천장이 무너져내릴지도 모르지만, 그쯤이야 탈출하면 그만일 테다.
카가강!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방 전체에 걸려 있는 마법이 단번에 파괴되리라는 추측과 달리, 그녀의 검에서 흘러나온 기운과 마법의 힘이 치열하게 대치했다.
파직! 전기가 튀는 듯한 모습에 로제타의 눈이 커졌다.
결국 패배한 것은 그녀였다.
마법의 힘은 그녀의 기운을 잡아먹은 것으로도 모자라, 철문에 생긴 흠집마저 모두 사라지게 했다.
몇 분 전으로 회귀하기라도 한 것처럼, 새것이나 진배없는 모습이 드러났다.
두 번째 깨달음을 얻은 그녀도 파괴하지 못하는 마법이라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한, 이 정도 수준까지 다다른 마법사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발레리.’
푸른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어. 발레리가 그럴 리가…….
허망한 목소리가 까칠하게 마른 입술 위를 머물렀다.
회귀할 때마다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도와주었던 그다.
제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자, 가족이라고 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 발레리안이다.
그런 그가 자신을 이곳에 가둬두는 데 일조했다니.
로제타는 절대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대마법사일 거야. 황후가 마탑의 대마법사를 협박해 데려온 거겠지.’
그녀는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퍼석퍼석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 생각이 합리화나 다를 바 없다는 걸 알았으나 애써 모르는 척했다. 정말 발레리안이 자신을 배신한 거라면, 질척한 늪으로 빠져드는 듯한 허망함과 괴로움을 떨쳐낼 수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까앙! 쾅! 콰강!
로제타는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이대로 포기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한 번으로 안 된다면 수십, 수백 번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정말 수십 번을 휘두르고, 계속되는 충격에 손바닥이 짓물러 진물이 나도, 도무지 마법을 파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마법을 파훼하려면 적어도 소드마스터 급은 되어야 한다.
“헉, 허억…….”
거친 숨결이 목구멍을 긁고 흘러나왔다.
어느새 땀범벅이 된 머리카락이 하얀 피부 위로 달라붙었다.
“빌어먹을, 제발 좀!”
누구인지 모를 상대를 향해 욕설을 뱉고 또 빌어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깨달음.
세 번째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은 필요하다고 아무 때나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몇 번의 경험 덕에 요령이 있는 그녀임에도 저번 생에서 모든 깨달음을 얻기까지 약 5년이 걸렸다.
이번 생의 경우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두 개의 깨달음을 얻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마지막 진리를 깨우치는 건 불가능했다.
‘불가능해도 해야 해.’
로제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전 생의 경험을 차례로 복기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론, 마지막 깨달음을 얻었던 계기는 다양했다.
때로는 강한 의지나 절박함이 발단이 되었고, 언젠가는 단순히 큰 노력과 셀 수 없이 많은 훈련이 쌓여 이루어냈다.
지금 당장 훈련을 할 순 없는 노릇이니, 의지를 더 다져야 하나.
그러나 그렇다기엔 이미 충분히 절박했다. 어떻게 이보다 더 큰 의지를 가질 수 있는지, 가늠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집중하자.’
흔들리는 마음은 진리에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로제타는 크게 심호흡한 뒤 매서운 눈으로 문 쪽을 응시했다.
그녀가 허리를 크게 돌려 검을 휘둘렀다.
콰앙!
조금 전보다 검 위에 둘린 기운이 더 선명했다. 그러나 아직 소드마스터 수준을 따라잡기엔 부족하다.
쾅!
제발, 제발! 로제타가 이를 악물고 다시금 칼자루를 잡아 쥐었다.
검기가 이리저리 일렁거리며 빛을 냈다. 다만 여전히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그때였다.
다시 세차게 검을 내지르려는 찰나, 느닷없이 손에서 진동이 일었다.
우우웅-!
아르문트가 하사한 검이 기이한 빛을 내뿜으며 공명했다.
처음 보는 현상이었으나, 그녀는 금세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 주군에게 드려.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네가 바로 근처로 이동할 수 있게 마법을 걸어놨어.”
아르문트에게 주었던 커프 링크스. 그 마법 물품이 반응을 보내온 것이었다.
‘아르문트가 위험해.’
심장이 아래로 쿵 내려앉았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구명줄을 붙잡듯 검을 강하게 말아쥐었다. 최대한 빨리 마법이 발동되어 그의 곁으로 이동되기를 소망하며.
그러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나도 마법은 발동되지 않았고, 그녀는 여전히 이 빌어먹을 방에 갇혀 있었다.
발레리안이 걸어준 마법보다 이 방에 걸려 있는 마법이 더 강하다는 뜻이었다.
아르문트는 위험한데 자신은 이곳에서 한 걸음도 나갈 수가 없다.
이대로라면 분명, 또다시…….
‘죽고 말 거야.’
그는 그녀가 없는 곳에서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시간은 또다시 그녀를 스무 살의 초여름으로 돌려놓을 테고, 아르문트와 나눈 모든 추억과 약속은 오로지 그녀의 가슴에만 남으리라.
그리하여 사랑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안 돼.’
하얗게 부르튼 손이 칼자루를 절박하게 잡아쥐었다.
화려한 검 위로 짙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뜨거운 것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로제타는 그 열기에 몸을 맡긴 채 느릿하게 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눈 부신 빛이 작은 방을 가득 채우다 못해 벽을 가르고 사방으로 뻗어져 나갔다.
단단한 철문이 종이처럼 구겨지고 하얀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마침내 마법을 파훼한 것이었다.
“쿨럭! 커헉…….”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 안에서 솟아올랐다. 뱉어내고 보니 뻘건 핏덩이였다.
갑작스럽게 무리하여 깨달음을 얻은 대가였다. 원래라면 최소한 하루 이틀은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쉬어야 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은 없었다.
로제타는 입가에 묻은 피를 무심하게 닦아내며 무너진 건물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올려다본 하늘은 아직 맑았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은 것이거나, 아니면 하루 이상 지났다는 뜻이었다.
“헉, 어떻게……!”
“자, 잡아라! 여자가 나왔어!”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무장한 기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건물 앞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나운 시선이 그들이 걸친 망토 위로 옮겨졌다.
붉은 바탕, 똬리를 튼 뱀 문양.
예상했던 대로 황후의 짓이었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검을 고쳐잡았다.
“콜록!”
다시금 피가 흘러나왔다.
어찌어찌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는 했으나, 급하게 얻은 깨달음은 무척 불안정했다.
온전한 힘을 다 발휘할 수 없을뿐더러, 무섭도록 밀려드는 피로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녀를 괴롭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건드리지 마.”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솨아아-. 바람이 불어오며 앙상한 겨울나무를 흔들었다. 그와 함께 금빛 머리카락이 힘없이 살랑거렸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예, 대마법사님.”
믿고 싶지 않았다.
모르트마르의 기사들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주고받는 저 사람이 그녀의 든든한 받침목이자,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 발레리안이라는 것을.
사실 갇혀 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했음에도, 정말이지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칼바람 같은 현실은 따갑게 그녀의 피부를 할퀴어댔다.
“……왜?”
로제타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도대체, 왜……?”
떨리는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흐느낌으로 변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그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도대체 왜. 어떻게 네가. 이런 짓을 벌였느냐고 말이다.
발레리안은 침묵했다.
검은 로브를 입고,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무척 낯설어 보였다. 갑자기 오랜 친구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대답해, 왜 그랬냐고……!”
“네 회귀를 막으려고.”
무미건조한 대답에 로제타의 눈이 일렁거렸다.
“그래서 그랬어.”
발레리안은 허술한 거짓말을 답변으로 내놓았다.
계속되는 회귀를 막기 위해선 황태자를 지키는 것보다, 그를 가두어 감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이다.
“거짓말하지 마, 아니잖아!”
그러나 이에 속아 넘어가기에는 둘은 너무 오랜 세월을 함께 지냈다.
로제타는 그가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일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가 지금껏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갔을, 다른 이유가.
“도대체 왜 그랬냔 말이야!”
로제타는 뛰어들듯 그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타악!
커다란 손이 순식간에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정말.”
지독하리만큼 낮은 목소리가 차가운 바람처럼 흘러나왔다.
“진실을 원해?”
발레리안은 비스듬히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미소라 칭하기에는 발갛게 물든 눈매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너무나도 생경한 모습에 로제타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미처 대답을 뱉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질투가 나서.”
나지막한 목소리에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이 묻어났다.
고해와도 같은 얘기가 이어졌다.
“황태자 따위에게, 로즈, 너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랬어.
발레리안이 희미한 눈웃음과 함께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