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네 행복을 위해
(131/145)
131화. 네 행복을 위해
(131/145)
131화. 네 행복을 위해
2022.06.02.
두근, 두근.
발레리안과 피부가 맞닿은 곳에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대는 듯했다.
가슴 부근이 조여오는 아릿한 고통에 로제타는 파르르 속눈썹을 떨었다.
순간 목구멍이 턱 막혀왔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이 또한 생소한 일이었다. 한때는 그의 볼에 입을 맞추어도 전혀 아무렇지 않기도 했었으니까.
“그게…….”
로제타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삼키고 애써 말문을 열었다.
“무슨 말이야.”
“글쎄, 무슨 말일까…….”
발레리안은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정말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제 감정을 너무도 잘 알아버린 탓에 결국 이런 짓까지 저질러버렸으니.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제 본심을 다 드러내지 않는 이유만큼은 정말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사랑해.
아주 오래전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네가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어 나를 구원해주었을 때부터.
오로지 너만이, 너의 행복만이 나의 유일한 이유였고 목적이었어.
몇 번을 회귀한다 하더라도 그 마음만큼은 달라지지 않을 거야.
그녀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가슴속에 너무도 많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이 지경이 되어서도 무엇 하나 쉽사리 꺼내 들지를 못했다.
“무서울 때면 언제든 부르라며.”
다만 길바닥에서 굴러먹던 시절에 그랬듯, 작은 온정을 베풀어 달라며 비굴하게 애원할 뿐이었다.
“로즈, 난 네가 떠나가는 게 제일 무서워.”
로제타의 눈매가 흔들렸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복잡한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교차했다. 당황스러웠고, 미안했으며, 비참하고도 허망했다.
둘의 관계는 무 자르듯 잘라낼 수 있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정리를 위해선 많은 시간과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로제타는 입술을 꾹 깨물며 눈에 힘을 줬다. 그러곤 손을 뻗어 발레리안을 밀어냈다.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그녀를 발레리안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지켜보았다.
“날 궁으로 보내줘. 전하가 위험해.”
“……이미 늦었어. 지금 당장 출발한다 해도 모든 게 끝났을 거야. 걱정 마. 죽이진 않겠다 했으니까.”
“보내 달라고 했어.”
로제타의 검 끝이 기어이 그를 향했다.
예상했던 장면인데도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날카로운 검날이 심장을 푹푹 찔러대는 기분이었다.
발레리안은 이를 악물고 표정을 관리하려 애썼다. 자신이 일을 벌인 주제에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이라며.”
“…….”
“황태자는 주군일 뿐이고, 나는 가족이라 했잖아, 로즈.”
이제 네게는 내가, 방해물이자 적일 뿐인가?
그가 뜨거운 숨결을 내쉬며 덧붙였다.
습관처럼 걸치고 있던 미소도 이제는 차마 지어지지를 않았다.
로제타는 여전히 그에게 검을 겨눈 채로 대답했다.
“발레리, 너는 내 가족이야. 네가 무슨 짓을 해도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아.”
예상 밖의 말이었다.
“잘못된 길을 가려는 너를 바로잡아주는 게 가족으로서 내가 져야 할 책임이고.”
“하, 하하…….”
놀랍게도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어떻게 너는 이런 순간까지 그렇게 사랑스러우면서도 잔인할까.
발레리안은 비스듬히 말려 올라간 입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이내 흘러내린 피로 붉게 물든 그녀의 입술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 몸으로 어떻게 나를 상대하려고.”
그녀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쯤은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수차례 각혈하고, 팔다리에도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모습으로 보아 그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만신창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다.
제 마법을 파괴하기 위해 무리한 깨달음을 얻은 결과이리라.
애초에 그걸 성공시킨 것부터가 몹시 비현실적이었다.
얼마나 절박했기에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지막 진리까지 깨달았을까.
경악스러운 성과였으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존중해 줄 여유는 없었다. 그 또한 절박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심지어 나 말고 다른 기사들도 다 죽여야 할 텐데.”
모르트마르 백작가의 기사들이 그의 말을 듣곤 다급히 전투태세를 갖췄다.
모두 로제타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수준이긴 했지만, 그래도 저런 몸 상태로 다수와 싸워 이기는 것은 버거울 것이다.
“알잖아, 저번 대련에서 내가 계속 봐줬던 거. 로즈, 너 이 싸움 못 이겨.”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다른 기사들의 도움 없이도, 그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와 수없이 대련했던 로제타 또한 이를 모를 리가 없다.
“그야, 해봐야 알겠지.”
그런데도 그녀는 단호했다.
“발레리.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겨. 정말,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겨서, 아르문트를 구하러 갈 거야.”
로제타가 짧게 심호흡을 하며 검을 고쳐잡았다.
대련을 시작하기 전 항상 취하는 자세가 나왔다.
“……왜? 도대체, 무얼 위해 목숨까지 걸어.”
“그거야 당연히-.”
그녀는 빠르게 앞으로 도약하며 말을 이었다.
“행복을 위해서지.”
쿵.
그녀의 대답에 심장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겨우 제자리를 유지하던 푸른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콰과광!
“으, 으아악!”
“말도,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녀의 검에서 뻗어져 나온 검기가 발레리안 주변의 나무들을 반으로 갈라냈다.
모르트마르의 기사들은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움직임을 확인하고는 경악하여 비명을 질러댔다.
한편, 발레리안은 어느새 그녀의 뒤로 몸을 옮긴 상태였다.
로제타의 공격은 매서웠으나 피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를 죽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기에 더욱이 그랬다.
그럼에도 그는 얕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짧게나마 한눈을 판 탓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그녀가 말했던 것이 자꾸만 귀에 맴돌아 싸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행복.’
분명, 행복이라고 했다.
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사랑을 예측했던 그는 두 단어의 사이의 틈에 빠져 계속해서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로제타는 다른 생각할 여유를 조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어왔다.
검을 한번 내지를 때마다 그의 피부 위에 붉은 빗금이 그어졌다.
점차 목을 조여오는 압박에 발레리안은 본능적으로 마나를 끌어 올렸다.
“크윽!”
순식간에 로제타의 몸이 땅으로 처박혔다.
머리가 어지럽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금방 잡히진 않았을 텐데. 그녀가 바닥을 긁으며 후회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의 반열에 올랐다 한들, 성치 않은 몸으로 대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역시 불가능했다.
“우와아!”
“역시 대마법사님……!”
기사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레리안은 그들을 냉랭하게 지나치고 로제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로즈.”
로제타는 대답 대신 몸부림을 쳤다. 자신을 내리누르는 압력이 심해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올려다본 시야에 그가 천천히 손을 움직이는 모습이 담겼다. 거대한 양의 마나가 손바닥 위에서 휘몰아쳤다.
‘나를 다시 기절시키려고……!’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대로 기절했다간 정말 모든 상황이 끝난 뒤에야 깨어나고 말 테다.
아르문트를 그렇게 오래 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지금도 이미 충분히 늦었다.
“큽, 크읏……!”
로제타가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며 온몸을 비틀었다. 또다시 목구멍에서 피가 솟아올라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처절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발레리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미안.”
나지막이 사과의 말을 속삭인 그가 느릿하게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기어코 마법이 발동되고야 말았다.
‘안 돼……!’
로제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그의 마법에 당하지 않기를, 제 기운이 버텨내기를 간절히도 바라며.
정말 그 바람이 이루어진 것일까.
놀랍게도 로제타는 잠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몸이 가뿐해졌다. 자신을 짓누르던 압력도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정신을 잃은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모르트마르 기사들의 모습이었다.
“내가…….”
반대쪽에서 발레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잘못했어.”
굵은 눈물방울이 하얀 피부를 타고 줄기줄기 흘러내렸다.
발레리안은 울고 있었다.
눈가는 어느새 발갛게 물들었고, 붉은 입술은 바르르 떨리며 간신히 미소를 그려냈다.
“미안해, 로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과해오는 그의 모습은 그녀가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다정한 목소리도, 예쁜 미소도, 애정을 담은 눈빛도. 모두 익숙했다.
‘정말…… 발레리구나.’
우습게도 로제타는 그제야 눈앞의 사내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걸까.
방금까지만 해도 그리 차갑게 굴었으면서. 왜 이리도 애처롭게 흐느껴 제 마음을 흔들어놓는가.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촉촉하게 젖은 뺨에 닿으려는 찰나, 허공에서 눈길이 얽혀들었다.
투명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발레리안은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엷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러곤 제 품속을 뒤져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받아, 로제타.”
반사적으로 물건을 받아든 그녀는 이내 정체를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반짝반짝 빛을 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아르문트가 고백하며 준 선물이자, 사냥제 때 숲에서 잃어버렸던 바로 그것이었다.
“황태자는 괜찮을 거야. 내가 따로 보호 마법을 걸어뒀어.”
아무리 이성을 잃었다 한들, 발레리안은 황후의 농간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말은 고문을 하든 무얼 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하긴 했지만, 정작 뒤에서는 황태자를 위해 강력한 보호 마법을 걸어두었다. 모든 공격을 방어해주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가장 큰 위협은 벗어날 수 있으리라.
단지 그의 목숨을 살려놓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황태자가 조금이라도 다쳤다간 로제타가 힘들어할 것을 알았기에, 차마 내버려 두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니 얼른 가봐.”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된 듯 목걸이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빛무리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동 마법의 전조였다.
로제타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적절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책망의 말도, 위로의 말도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결과 그녀는 아무런 인사조차 남기지 못하고 빛무리 사이로 사라졌다.
“안녕.”
발레리안은 로제타가 있었던 곳을 찬찬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결국 사랑한다는 말은 단 한 번도 소리 내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미 정해져 있던 결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로제타를 제 삶보다, 목숨보다 사랑했지만.
그 빌어먹을 사랑 때문에 이런 처절한 짓까지 벌이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닌 로제타의 행복이었으니까.
그것을 위해서 발레리안은 무엇이고 포기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사랑도 예외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