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기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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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기적이 일어났다
2022.06.05.
검은 속눈썹이 희미하게 위아래로 팔랑거리며 몽롱한 빛깔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눈을 떠도, 감아도 시야는 똑같이 캄캄하기만 했다.
몇 번쯤 눈꺼풀이 오르내리기를 반복하자, 잠시간 꺼졌던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살았다.’
아르문트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꼼짝없이 죽는 줄만 알았는데, 어떻게든 살아남았구나. 정말 다행이다.
한때는 제 목숨에 조금의 미련도 없던 그였으나 지금은 그 누구보다 삶이 절박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로제타를 찾아내기 전까진 절대 죽을 수 없으니까. 죽는다 해도 그 뒤에 죽어야만 한다.
그는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상황을 살폈다.
시야가 너무 어두워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마법에 당해 아래로 떨어졌었지.’
밀리엄 백작 부인의 마법에 갑작스레 바닥이 꺼졌고, 그는 두 기사와 함께 추락했다. 그리고 제 머리 위로 커다란 바윗덩어리들이 떨어지며 의식도 끊겼다.
거대한 돌덩어리가 얼굴을 내리찍던 순간을 기억해낸 그는 저도 모르게 움찔 입술을 떨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다행이긴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슬며시 손을 뻗어 얼굴을 더듬거렸다. 이마 쪽이 찢어졌는지 몹시 따가웠으나, 뼈에는 큰 무리가 가지 않은 듯했다. 얼굴이 철로 만들어진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그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돌덩어리가 머리에 부딪히던 순간의 기억이었다.
-콰드득!
분명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단단한 무언가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 사냥제 중 그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들었던 것과 매우 비슷했다.
아르문트는 어렵지 않게 그 정체를 추측해냈다.
‘보호 마법. 대마법사가 걸어둔 거군.’
그렇다면 낙마하고도 큰 상처를 입지 않은 것도, 돌덩어리에 깔리고도 살아남은 것도 모두 이해가 되었다.
동시에 기대감이 솟았다.
자신에게도 이렇게 보호 마법을 걸어두었다면, 그의 성격상 로제타의 안전에는 이보다 훨씬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분명, 살아 있다.
고통으로 흐릿해졌던 황금빛 눈동자 위로 굳은 의지가 깃들며 점차 색상도 또렷해졌다.
슬슬 어둠에 눈이 익었는지 주변 환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커다란 바위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러크의 음성이었다.
살아 있었군. 아르문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나는 괜찮다! 경은, 경과 리처드 경은 무사한가?”
“……예! 둘 다 무사합니다. 저희는 같은 쪽에 있습니다! 얼른 돌을 치우고 나가시죠.”
“그래. 무너지지 않게 조심하게.”
셋 모두 무사하다니 정말 신이 도왔다고 할만한 일이었다.
안심한 아르문트는 돌덩어리가 와르르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하나씩 바위를 치워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겨우 빠져나갈 만한 크기의 통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기듯이 바위 사이의 틈을 빠져 나왔다. 마침내 돌무덤을 벗어나자 은은한 햇빛이 창문 너머로 들어와 그의 눈을 따갑게 쏘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가늠이 잘 안 되었으나 적어도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곤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아직 리처드와 러크는 나오지 못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러크 경! 어느 쪽에 있나!”
“이쪽입니다.”
그가 나온 곳과 조금 떨어진 쪽에서 소리가 자그맣게 들려왔다. 이번에는 리처드의 목소리였다.
아르문트는 서둘러 돌무덤 가까이 다가가 그들이 얼른 나올 수 있도록 돌덩어리들을 치워냈다.
오 분쯤 지났을까. 새카맣고 좁은 틈 사이로 마침내 리처드의 얼굴이 보였다.
아까의 상처로 오른쪽 눈을 뜨지 못하는 듯했으나, 그래도 추락하며 입은 상처는 크게 없어 보였다.
추후 신관에게 치료받으면 시력은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아르문트는 이렇게 생각하며 리처드가 편하게 나올 수 있도록 앞을 비켜주었다.
그러나 리처드와 러크가 간신히 빠져 나왔을 때,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러크의 한쪽 다리가 처참하리만큼 짓뭉개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전하.”
아르문트의 표정을 확인한 러크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쾌활한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만 보아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뻔히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신음을 참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응급 처치는 했습니다. 하지만…….”
러크를 부축하고 선 리처드는 조용히 말을 삼켰다.
듣지 않아도 이어질 말은 알 수 있었다.
빠르게 치유하지 않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며, 운 좋게 치유사를 찾는다고 하더라도 평생 다시 걸을 수 없을 테다. 기사로 사는 것 또한 오늘이 마지막이리라.
참담한 사실 앞에 아르문트는 그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가 업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 고작이었다.
“아닙니다, 전하. 제가-.”
“경도 부축할 상황이 아니지 않나. 무리하지 말고 지금은 의무병을 찾는 데 집중하지.”
“……알겠습니다.”
리처드가 얌전히 수긍했다. 아르문트의 말대로 그 또한 발목을 다친 상태였다. 고통을 참고 걸을 수는 있지만, 러크를 업고 다니는 것까지는 무리다.
아르문트는 러크를 조심스럽게 업어 들며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 전투가 한창인 듯, 황궁의 곳곳에서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난무했다.
저 멀리 푸른 바탕의 문양을 등에 새긴 기사들이 모르트마르를 상대로 싸우는 것도 보였다.
‘루니엘라 공작가에서 지원이 왔군.’
잠시 기절한 사이에 상황이 거기까지 진척된 모양이었다.
루니엘라에서 사람이 왔다면 의무병이나 신관도 찾을 수 있을 테다. 아르문트는 그렇게 믿으며 중앙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명의 적들이 그를 노리고 달려들었으나 금세 목이 베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러크를 업어 든 상태에도 아르문트의 검 끝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러나 아침과 비교하면 확실히 동작이 느리고 커졌다. 수많은 전투와 추락으로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까닭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흔들렸으나 아르문트는 쉬지 않고 나아갔다.
그 결과, 중앙홀에 다다르기 직전 루니엘라 공작가 소속의 신관을 마주했다.
“이자의 상처를 좀 봐주게.”
아르문트는 러크를 조심히 내려놓으며 부탁했다.
이내 그의 얼굴을 알아본 신관이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헉! 저, 전하!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됐으니 얼른-.”
치료부터 해.
그렇게 명령하려던 순간이었다.
휘이이잉!
거센 바람이 갑작스럽게 불어오더니 아르문트의 몸을 휘감았다.
“큭! 이게 무슨……!”
끌려가지 않으려 버텼으나 소용없었다.
어느새 그의 몸이 하늘로 치솟더니, 중앙홀을 향해 날아갔다.
“전하!”
리처드는 주위 사람들을 제치고 다급히 아르문트를 잡으려 달렸으나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거대한 흑마법의 힘이 이내 아르문트의 몸을 중앙홀의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크읏……!”
꼬리뼈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에 아르문트는 신음을 흘렸다.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계단에서 내려오는 황후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 잔뜩 여유를 부리던 것과 달리, 그녀는 몹시 조급하고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곁에는 밀리엄 백작 부인과 그레이한이 함께였다.
밀리엄 백작 부인은 무엇 때문인지 입가에 피가 묻어 있었고, 그레이한은 아르문트를 발견하고는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디 있어.”
황후의 붉은 입술 사이로 사나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두 눈동자 또한 금방이라도 아르문트를 잡아먹을 것처럼 번뜩였다.
느닷없는 질문에 아르문트는 미간만 찌푸렸다.
“라그나르의 심장, 어디 있냐고.”
그 늙은이에게 없으면 분명 네게 있겠지. 그녀가 뱀이 쉭쉭 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 아르문트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황후 폐하께서 그딴 미신을 다 믿을 줄은 몰랐군그래. 아들놈의 멍청함이 어디서 나왔는지 잘 알겠군.”
바닥에 앉아 생긋 미소 짓는 모습이 여유롭기 짝이 없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안 그래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은데, 하필이면 바람에 실려 날아올 때 검마저 놓치고 말았다.
이대로 황후 무리와 맞섰다간 결과는 뻔하다. 그렇다고 마법사에게 등을 보이며 도망을 갈 수도 없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지원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라그나르의 심장이 뭔데? 어디 있는지를 물으려면 적어도 생김새는 말해줘야지.”
“말하는 꼴을 보니 정말 모르는 모양이군.”
“글쎄, 그거야 모를 일이지.”
아르문트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반응은 그레이한 쪽에서 돌아왔다.
“어머니!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손가락부터 하나하나 잘라주면 언젠가는 불겠지요!”
그레이한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씩씩거리며 튀어나왔다.
검을 뽑아 들고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아르문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네 이놈! 감히 전하를……!”
리처드와 다이크, 그리고 루니엘라 공작가의 기사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아르문트의 낯빛이 금세 환해졌다. 흑마법사가 있다곤 해도, 기사단장인 다이크 경과 루니엘라의 지원이 함께라면 충분히 해치울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바람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브리.”
“……예.”
황후의 명령에 밀리엄 백작 부인이 또다시 손을 휘저었다.
울컥! 그녀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터져 나오더니, 이내 투명한 결계가 중앙 홀의 일부를 감쌌다. 황후 일행과 아르문트가 있는 곳이었다.
“전하! 전하!”
다이크는 주먹으로 결계를 쾅쾅 두들기며 부수려 했으나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밀리엄 백작 부인이 생명을 일부 희생하여 만든 것이니만큼 무척 견고했다.
아르문트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혼자서 버텨내야만 했다.
“주제도 모르고 히죽거리더니 꼴좋군. 그래, 이제 어쩔래?”
휘익!
그레이한은 아르문트를 비웃으며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어?! 어떡할 거냐고!”
계속되는 공격에 다리가 점차 휘청거렸다.
빌어먹을. 아르문트가 욕설을 중얼거렸다.
평소에는 상대도 되지 않는 놈이었으나 지금은 여건이 너무 좋지 않았다.
시야는 자꾸만 이리저리 흔들렸고, 근처에는 무기로 쓸만한 것 하나 찾아볼 수가 없다.
겨우 그레이한을 제압하고 죽인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흑마법사와 모르트마르의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도무지 살아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윽!”
설상가상, 비틀거리며 피하던 중 그만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
아르문트의 몸이 거칠게 바닥을 굴렀다.
“크하하하! 도망치는 꼴 하고는! 죽어, 이 재수 없는 새끼야!”
그레이한은 잔뜩 흥분한 나머지 아르문트를 살려둔 채로 고문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날을 응시하며 아르문트는 그리운 이름을 입술 위에 그렸다.
‘로제.’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화아악!
그의 눈앞에 장대한 빛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