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누구도 당신에게 손댈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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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누구도 당신에게 손댈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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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누구도 당신에게 손댈 수 없어
2022.06.09.
눈 부신 빛이 로제타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곧 익숙한 기운이 그녀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상쾌한 기운. 발레리안의 마나였다.
그와 동시에 피부 위로 기이한 감촉이 느껴졌다.
못 견디게 간지러우면서도 따끔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뭐지?’
로제타는 살며시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그녀의 목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에 쥐고 있던 그 목걸이가 매어진 채 달랑거리고 있었다. 검도 다시 반지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러나 그보다 신기한 것은 따로 있었다. 곧 당황스러운 장면이 그녀의 시선을 잡아챘다.
잔뜩 부르터 붉게 달아오른 손바닥 위로 점차 보드라운 새 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장기가 뒤틀린 것 같던 속도, 미친 듯이 따끔거리던 목도 조금씩 나아졌다.
몸이 회복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상처가 사라질 일은 없다. 누군가 그녀에게 치유 마법을 쓴 게 분명했다.
‘발레리……!’
로제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푸른 눈동자 위로 불안한 마음이 득실거렸다.
발레리안은 정말 치유 마법에 소질이 없다. 그리고 로제타가 무리하게 깨달음을 얻으며 생긴 내상은 어지간한 신관조차 쉬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모든 상처가 사라지고, 내상까지 깨끗하게 치유가 된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의 대가를 치렀음을 의미했다.
즉, 발레리안이 제 생명력을 바탕으로 로제타를 치유한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 그는 피를 온통 토하고 의식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목숨에도 지장이 갔을 것이다.
주위에 그를 도와줄 사람이 한 명도 없을 텐데.
제 의지와 관계없이 치솟는 걱정에 로제타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비록 발레리안은 자신을 방해하고, 또 아르문트를 위험에 빠트렸지만…… 그럼에도 로제타는 도무지 그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레리안이 지독히 원망스러웠으나, 그와는 별개로 그가 무사하기를 바랐다. 제 잘못을 충분히 반성하고, 벌을 받은 뒤, 친구로서 그녀의 곁에 남아주기를. 불가능할지도 모르나 그렇게 소망했다.
로제타에게 발레리안은 그런 존재였다. 아르문트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우 소중하고, 또 못내 애정하는.
‘괜찮을 거야. 발레리는…… 강하니까.’
이렇게 멋대로 죽어버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렇기에 로제타는 바보 같을지라도 다시 그를 믿기로 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도망치지는 않을 거라고. 반드시 살아남아 제 곁에서 반성하리라고 말이다.
그러니 발레리안에 대한 걱정은 제쳐두고, 지금은 아르문트를 구하는 것에 전념해야 할 때였다.
비록 발레리안이 따로 보호 마법을 걸어뒀다곤 하나, 커프 링크스에서 반응이 온 이상 안전을 장담할 순 없다.
제발, 제발 무사하기를.
로제타는 빌고 또 빌며 간절한 얼굴로 앞을 응시했다.
마침 새하얀 빛이 다시 그녀와 가까워졌다.
윽, 짧게 신음한 로제타가 눈을 질끈 감았다.
번쩍!
장대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낯선 감각이 또다시 몸을 감쌌다.
그리고 마침내 공간이 바뀌었다.
비릿한 피 냄새 사이로 그리운 향기가 은은하게 밀려왔다.
로제타는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희미한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다름 아닌 제 연인의 모습이었다.
피투성이 몸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아르문트가 자신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옅게 흔들리더니 이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전하.”
로제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르문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면서도, 그의 처참한 모습이 가슴에 사무쳐서.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로제……!”
상대의 무사에 절절하리만큼 감동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로제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아르문트는 조금 전까지 제 온몸을 짓누르던 고통과 괴로움을 모두 잊었다.
그저 그녀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그는 바르르 떨리는 팔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손가락을 갖다 댔다.
톡. 피부가 닿는 감촉에 안도감이 치밀어올랐다.
정말이구나. 정말 살아 있었구나.
아르문트가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로제타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단정하던 옷은 온통 붉게 물든 채 이곳저곳이 찢어져 있었고, 온몸에 가벼운 찰과상과 자상이 가득했다.
이성이 뚝, 하고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대마법사……!”
계단 위에 서 있던 황후는 로제타를 발견하고 거칠게 이를 갈았다.
그녀가 빛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은 곧 대마법사가 배신했다는 의미였다. 황후가 아무렇지 않게 아르문트를 죽이려 한 것처럼, 그 또한 약속을 지킬 마음 따위 없었으리라.
“뭐, 뭐야!”
그레이한이 당혹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빛에 깜짝 놀란 나머지 재빨리 뒷걸음질 친 상태였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온 것이 대마법사가 아닌 로제타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애인이랑 같이 죽고 싶어서 왔나 봐? 지고지순하기도 하지.”
세기의 사랑이 따로 없네. 그레이한이 킬킬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 와, 로제.”
아르문트는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 그녀를 제 뒤로 끌어당겼다.
지금은 재회의 기쁨을 누릴 만한 여유가 없다. 자칫하면 그녀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때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어떻게든 그녀만큼은 지켜야 했다.
아니, 그녀를 지키고 자신도 살아남아, 약속한 여행을 떠나야만 한다.
아르문트가 제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를 무심하게 닦아냈다. 그리고 다시 드러난 그의 얼굴에는 강렬한 의지가 선명하게 묻어났다.
“큭큭, 무기도 없이 뭐 어떡하려고?”
“고작 네놈을 상대하는 데 무기까진 필요 없지.”
“하! 여자 앞이라고 허세는!”
그레이한이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아르문트는 로제타를 붙잡고 빠르게 옆으로 비켜섰다. 동작이 워낙 커서 피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젠장, 전하!”
“누가 이것 좀 없애봐! 어서!”
“로제타!”
어느새 결계 주변에는 훨씬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리처드와 다이크는 결계를 부수기 위해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고 주먹질을 했고, 살아남은 황실 기사들과 루니엘라 공작가 소속의 사람들도 부단히 애를 썼다.
아는 얼굴도 몇몇 보였다. 멜라니와 페이즐리, 테오도르 신관이었다. 다행히 모두 이번 습격에서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짧게 안도한 후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로제! 얼른 뒤로……!”
“걱정하지 마요.”
아르문트가 다급히 그녀를 저지하려 했으나 로제타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순 피부가 오싹해질 정도로 거대한 힘이 그녀에게서 퍼져 나왔으나, 그가 우뚝 멈춰선 이유는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 누구도 감히 당신에게 손댈 수 없어.”
해사하게 미소 지으며 속삭이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성스러워서. 그래서 아르문트는 바보처럼 멍하니 굳어 버렸다.
그레이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검을 내저었다.
그 순간, 로제타의 오른손에서 환한 빛과 바람이 터져 나왔다.
까가아앙!
단단한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홀을 가득 울렸다. 댕그랑, 하고 무언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도 함께였다.
아르문트를 포함한 사람들은 모두 멍한 얼굴로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응시했다.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새하얀 손에는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검이 반짝반짝 빛을 냈다.
그리고 그레이한이 들고 있던 검은 어느새 두 토막이 났다.
허공에서 검을 생성해낸 로제타가 단숨에 그의 검을 부순 것이었다.
“마, 마법 물품……?”
누군가 놀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대마법사의 절친한 친구이니, 단번에 검을 반 토막 낼 수 있는 마법 검을 선물 받았으리라고 말이다.
설마 로제타가 제힘만으로 그레이한의 검을 부러트렸으리라곤 그 누구도 추측하지 못했다.
딱 한 명, 황후를 제외하고는.
“이년이 어딜……!”
그레이한은 숨을 씨근덕거리며 부러진 검으로 로제타를 공격했다.
로제타는 아르문트를 가볍게 옆으로 밀어내곤 궤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다시금 검의 손잡이를 말아쥐었다.
반짝, 화려한 보검이 기이하게 반짝거리며 황후의 눈길을 끌었다.
동시에 황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거다.’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
라그나르의 심장이 바로 저 검이었다.
황제도, 황태자도 한낱 미신쯤으로 취급했으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라그나르의 심장은 실재하며, 그 속에 담긴 진귀한 힘도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째서 저 보물이 하녀의 손에 들려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게든 빼앗아와야 했다.
‘저것만 있으면……!’
다시는 무시당하고 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을 연기하며 누군가의 비위를 맞출 필요도, 행여 제 아들이 잘못될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붉은 눈동자 위로 짙은 욕망이 번들거렸다.
“그레이한! 물러나라!”
황후가 큰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러곤 다급히 고개를 돌려 밀리엄 백작 부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브리, 아직 한 번은 더 쓸 수 있겠지.”
“죄송하지만, 콜록, 이제 더는…….”
밀리엄 백작 부인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계속해서 피를 토했다. 조금 전 결계를 만들며 그녀가 가진 마나를 모두 쥐어짠 탓이었다.
“오브리.”
황후가 서늘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함께 장기가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이 밀리엄 백작 부인의 전신을 감쌌다.
흑마법으로 묶여 있는 이상 그녀에게 거부권은 없다. 이를 알면서도 거절의 말을 뱉은 것은 작은 반항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름의 효과는 있었다. 황후에게 보복할만한 시간쯤은 벌었으니까.
푸욱!
“커억……!”
익숙한 목소리에 황후는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붉은 눈동자가 충격으로 바르르 흔들렸다.
뚝, 뚝. 검붉은 피가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로제타의 검이 그레이한의 몸을 꿰뚫은 것이었다.
콰직. 그녀가 확인 사살을 하듯 그대로 손목을 돌렸다. 그레이한의 입에서 혈액이 줄줄 흘러나오더니, 이내 그의 몸이 힘없이 아래로 쓰러졌다.
“화, 황자 전하!”
모르트마르의 기사가 다급히 외치며 뛰어갔다.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로제타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결과는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레이한의 몸에서 검을 뽑아낸 로제타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기사의 목을 베어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믿을 수 없는 실력에 기사단장인 다이크조차 입을 쩍 벌렸다.
아르문트 또한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죽여.”
눈앞에서 자식의 죽음을 목격한 황후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녀는 시뻘건 핏발이 선 눈으로 명령했다.
“네가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마법으로. 생명력을 전부 끌어내서라도, 죽여.”
그러지 않으면 내 직접 너를 죽일 테니.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목구멍 안에 용암이 끓고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