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제국 유일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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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제국 유일의 소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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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제국 유일의 소드마스터
2022.06.12.
밀리엄 백작 부인이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계단 아래에는 로제타가 모르트마르의 기사들을 상대로 가뿐히 활약하고 있었다. 아르문트도 죽은 기사의 검을 빼앗아 밀려드는 적들을 처치했다.
빛이 바랜 눈동자가 그리운 이를 바라보듯 아르문트의 얼굴을 훑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로제타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이내 손바닥 위로 짙은 흑마법의 힘이 점차 모여들었다.
그럴수록 그녀의 몸속에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생명의 기운은 사그라들었다.
“크헉…….”
밀리엄 백작 부인이 신음을 토했다. 어느새 드레스가 입에서 흘러내린 피로 젖어 축축해졌다.
멈추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심장은 흑마법의 금제로 묶여 있었고, 제 의지와는 관계없이 황후의 명을 수행해야만 했다.
“전하! 위험합니다!”
리처드가 결계를 쾅쾅 내리찍으며 외쳤다.
아르문트 또한 밀리엄 백작 부인에게서 뻗어져 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로제, 내 뒤로 와.”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아르문트는 로제타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강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음에도 똑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그 다정함이 고마워 로제타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전하야말로 얼른 제 뒤로 와요.”
그러나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현실은 현실인 법이다.
그 몸 상태로 뭘 하겠다고! 로제타가 눈을 사납게 뜨고 잔소리했다.
피를 줄줄 흘리는 꼴이 척 보기에도 위급한데, 왜 자꾸 자신을 지키겠답시고 무리하는지, 원. 걱정이 돼서 싸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회귀하기 전에도 아르문트는 그랬다. 전투는 호위 기사에게 맡기고 가만히 쉬어도 되는 신분이면서, 꼭 끼어들어 도와주고는 상황이 끝나면 다시 무뚝뚝하게 굴곤 했다.
‘그 모습에 반했던 걸까?’
어쩌면 반한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로제타는 이렇게 생각하며 그를 제압해 제 뒤로 끌고 왔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계단 위의 상황을 확인했다.
새카맣고 끈적한 흑마법의 힘은 어느새 그녀의 머리 두 개만큼이나 크기를 부풀린 상태였다.
쿠구구구…….
계단의 난관과 주변 장식들이 새카만 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찌릿,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저 정도 힘이라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위험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본궁 자체가 무너져내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결계 바깥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결계의 두께가 점차 얇아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 저 흑마법이 완성되자마자 결계는 사라질 것 같았다.
‘꽤 힘들 수도 있겠는데.’
로제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미 저만큼이나 완성이 됐다면 지금 당장 뛰어가 밀리엄 백작 부인을 죽인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물론, 아르문트와 함께 저 마법을 피하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다. 건물이 무너진다고 해도 아르문트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다.
그럼에도 힘들 것 같다고 염려하는 까닭은, 그녀의 목적이 단지 아르문트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황궁 안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녀가 하녀로서 일하며 인사를 나누고, 정을 주고받은 이들이 이곳에 가득한데. 차마 방관할 수가 없었다.
모두를 지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몹시 힘들 테지만…… 한 가지 방법은 있었다.
‘아마 발레리가 옆에 있었으면 미쳤다고 했겠지.’
로제타는 이대로는 그대가 위험하다며 버둥거리는 아르문트를 다시 제압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만히 좀 있어요, 아문.”
“로제, 지금 이럴 때가……!”
“모든 상황이 끝나면 다 설명해줄게요.”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했다. 푸른 눈동자가 잔잔하게 반짝이는 모습에 아르문트의 눈썹이 휘어졌다.
“황실의 보물 중 하나인 이 검을 누가 주었는지, 제가 지금까지 무얼 감추고 있었는지…… 전부 말해줄 테니까.”
“…….”
“지금은 날 믿어줘요.”
어여쁜 얼굴에 걸린 미소는 상황에 맞지 않게도 무척 천진하고도 해사했다.
자신이 전속 하녀가 되었다며 헤실헤실 웃음 짓던 그 날처럼, 어떻게 보면 그저 순진무구한 바보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그래.”
그리고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마주 웃었다.
“그대가 아니면 누굴 믿겠나.”
그는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검을 바닥으로 던졌다.
멀리서 리처드와 다이크가 놀라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위험한 선택이라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았다. 그러나 아르문트는 개의치 않았다.
설사 상황이 그녀가 의도한 대로 돌아가지 않아 자신이 죽는다 해도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현재 그녀가 제 곁에 있고, 자신은 로제타를 믿는다는 사실이었다.
고마워요. 로제타가 작게 속삭였다.
그 순간, 그녀의 뒤쪽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기어코 밀리엄 백작 부인의 흑마법이 완성된 것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여인의 몸이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그와 동시에 깊고 아득한 흑마법의 구가 홀 가운데로 뻗어져 나왔다.
“으, 으아악!”
황후의 곁에 서 있던 기사 한 명이 새카만 구에 잡아먹혔다. 새된 비명조차 곧 암흑에 삼켜졌다.
이내 황궁 전체에 거센 진동이 일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결계가 사라지자 균형을 잃고 이리저리 넘어지기 바빴다.
로제타는 이제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흑마법의 구를 향해 뛰어들었다.
“로지!”
멜라니의 비명을 뒤로하고 로제타가 거세게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흑마법과 황실의 보검이 맞부딪쳤다.
콰과과광!!
황궁이 무너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엄청난 빛이 번쩍 터져 나왔다.
아르문트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로제타의 온몸을 휘감은 성스러운 빛.
그것은 결코 일반인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선 모든 기사들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세상의 진리와 검의 경지를 모두 깨우친 자.
제국 유일의 소드마스터가 나타났음을.
콰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새카만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흙먼지가 매캐하게 일어 시야를 가렸다.
아르문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급히 앞으로 나아갔다. 로제타의 무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곧 먼지가 사그라들고 가려졌던 모습이 드러났다.
홀의 한 가운데에는 로제타가 우뚝 서 있었다. 다소 차림새가 흐트러지고 머리카락도 이리저리 엉켜 있기는 했으나, 큰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푸른색 구슬 같은 것이 들려 있었으니, 바로 마력핵이었다.
이는 곧 로제타가 실로 흑마법을 파훼했다는 뜻이자, 그녀가 소드마스터라는 증거와도 같았다.
또다시 짧은 정적이 흘렀다.
로제타는 무심한 얼굴로 입가에 묻은 피를 쓱 닦아냈다.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워낙 큰 마법이었던지라 다소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와, 와아아아아!”
“와아아아!!”
곧 우레와 같은 함성이 곳곳에서 터졌다. 귀가 떨어질 것 같은 손뼉 소리도 함께였다.
결계 바깥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이들이 목소리 높여 로제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환호성이 머쓱한 나머지 그녀는 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러곤 아르문트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보냈다.
아르문트는 그녀를 믿는다고는 했으나 이런 결과까지는 미처 상상하지 못한 듯 멍한 얼굴이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떨렸다.
“큭.”
갑자기 긴장이 풀린 탓일까. 그의 다리가 순간 휘청이더니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깜짝 놀란 로제타가 달려가려는 찰나, 옆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맙소사, 전하!”
마담 르블랑과 테오도르 신관이 황급하게 달려와 아르문트의 상태를 살폈다. 페이즐리와 루니엘라의 기사들도 빠르게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테오도르 신관이 신성력을 펼치는 모습을 확인한 로제타는 몸을 돌려 가볍게 계단 위로 도약했다.
그리고 죽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던 황후를 단숨에 덮쳤다.
“커억……!”
“무슨 자신감으로 도망도 안 가?”
로제타는 흥 코웃음을 치며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강하게 잡아 쥐었다.
황후의 몸이 허공에서 바들바들 떨렸다.
마음만 같아선 이대로 목을 꺾어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수많은 시간을 고생한 건 모두 이 여자 때문이니까.
그러나 로제타는 애써 살의를 참아 누르고 황후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두 눈에서 흘러내린 피눈물이 그림같이 예쁜 얼굴을 가로질렀다. 황후는 숨통이 끊어질 것만 같은 순간에도 로제타를 죽일 듯 노려보며 전율했다.
그 모습이 퍽 처절하고도 참혹해, 로제타는 조금도 더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곧장 그녀를 기절시켰다.
황후를 죽이는 것은 로제타의 몫이 아니다. 그녀의 처분은 오로지 아르문트의 손에 달려 있었다.
로제타는 황후의 몸을 대충 업어 들고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아르문트에게 다가갔다.
“전하는 괜찮아요?”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십니다. 계속 치유를 받으시고, 치료제도 따로 드셔야 해요. 그런데 지금은 장소도 마땅치 않고, 신전도 반쯤 무너져서 당장 치료제를 구하기가…… 아!”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테오도르 신관이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전하의 침실에 제가 따로 보관해둔 치료제가 있습니다! 본궁과 달리 황태자궁은 습격 피해도 심하지 않으니, 그곳에서 치유하면 될 것 같습니다!”
로제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곳에서 치유를 받는 것보단 황태자궁 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이크 경. 전하와 부상자들을 데리고 황태자궁으로 가주시겠어요? 저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이곳을 맡을게요.”
“아, 예. 물론-.”
“로제, 나는 괜찮다.”
아르문트가 다급히 말을 잘랐다. 어쩐지 그는 매우 초조한 얼굴이었다.
“더는, 그대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로제타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마냥 낙관하기에는 상황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모르트마르 백작은 아직 살아있고, 그의 기사들도 끊임없이 황성을 공격해왔다. 누군가는 이곳에 남아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아문, 가서 치료받고 있어요. 제가 금방 끝내고 갈게요.”
“……로제, 나는…….”
“전하, 이럴 시간이 없어요! 얼른 가서 치유를 받으셔야 해요. 로제타 양, 잘 좀 부탁드릴게요.”
이번에는 마담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다른 대답은 듣지 않겠다는 듯 아르문트를 부축하고 일어섰다.
로제타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마침 멀리서 기사들이 돌진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담의 말대로 지금은 대화할 시간이 아니었다.
이내 다이크 경과 몇몇 정예 기사들이 마담과 함께 아르문트를 모시고 떠났다.
로제타는 아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