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흑막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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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흑막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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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흑막의 정체
2022.06.16.
전투가 계속되었다.
모르트마르의 사병은 끝을 모르고 밀려들었고, 본궁에 남은 기사들은 그들에 맞서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다.
황실 소속 중에서도 배신한 이들이 많은 탓에 여전히 수적으로는 열세였다. 루니엘라 공작가의 지원이 왔다곤 해도,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해온 역모인 만큼 진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사들의 낯빛은 몹시 밝았다. 눈동자 위로는 희망이 반짝였고, 표정도 어딘가 상기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무려 소드마스터의 등장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백 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던 소드마스터가 드디어 제국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소드마스터가 황태자의 연인이라니. 기사 출신도 아니고, 하녀 출신의!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재미없는 농담 말라며 나무랄 정도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그것도 구전 설화에서나 들을법한 종류의.
그런 신화 같은 일을 제 두 눈으로 목격하고 나니, 길어지는 전투로 쌓여만 가던 피로감이 싹 달아났다. 역사에 기록될 순간에 자신이 함께했다는 생각이 들며 의욕도 치솟았다.
반면 모르트마르의 병사들은 그레이한의 죽음과 황후의 패배로 급격히 사기를 잃었다.
이미 계획은 실패했고, 앞에는 상대해야 하는 소드마스터가 있다. 모반에 발을 들인 이상 도망칠 길은 없다는 것을 알지만, 본능적인 공포가 그들을 도망으로 이끌었다.
로제타는 여기저기 도망자가 속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이제 남은 건 잔당들을 제압하고 모르트마르 백작의 목을 베는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릴 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로제타는 제 앞을 가로막은 세 명의 기사를 단칼에 해치웠다. 그러곤 흘끗 시선을 돌려 제 근처에서 전투 중인 이에게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페이즐리는 여기까지 무슨 일이에요?”
“스승님이 가는 곳에, 제자가 가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얇은 갑옷으로 무장한 페이즐리는 자신을 향한 공격을 가뿐히 피해내며 능청스럽게 답했다.
“그리고 저도 스승님처럼 제 남자를 지켜야 해서.”
그녀가 황태자궁이 있는 쪽을 향해 슬쩍 눈짓했다.
로제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루니엘라 공작가의 외동딸인 그녀가 이런 위험한 전투에 참여하다니. 자신이 소드마스터인 것과 마찬가지로 놀라운 일이었다.
어떻게 루니엘라 공작을 설득한 건지는 몰라도, 그 의지가 대단했다.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그야 제가 제국 유일의 소드마스터의 제자라서요.”
유일하게 소드마스터의 존재를 진즉 알아봤던 사람이기도 하고. 페이즐리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로제타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름 유쾌한 대화였으나 지금은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목적지는 계단 위 난간이었다. 정확히는, 그곳에 쓰러져 있는 밀리엄 백작 부인을 향해 다가갔다.
로제타는 무표정한 얼굴로 중년의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평소의 단정한 모습을 모두 잃은 채 온몸을 피로 물들인 상태였다. 무리한 마법을 쓴 결과 핏줄까지 다 터진 모양이었다.
아직 죽지는 않은 듯, 희미한 숨결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 슬……. 구…….”
무슨 말을 하는 거람?
로제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적의 유언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자신을 처절하게 바라보는 시선 때문인지, 혹은 알 수 없는 직감 때문인지 그냥 넘겨선 안 될 것 같았다.
“녹색……. 구, 슬…….”
“녹색 구슬? 난데없이 웬 구슬?”
답답한 마음에 로제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밀리엄 백작 부인은 파르르 속눈썹을 떨더니 입술을 몇 차례 더 뻐끔거렸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꼭 무언가 그녀의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처럼.
언젠가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흑마법에 의해 금제가 걸린 사람이 꼭 저렇게 입을 뻐끔거리곤 했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눈을 깜빡거리는 것만으로 대답할 수 있도록 유도해볼까.
이렇게 생각하던 순간,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털썩 떨어졌다. 죽은 것이었다.
로제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가 남긴 유언을 중얼거렸다.
“녹색 구슬…….”
흐릿한 시야 위로 무언가 떠오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상 같던 것이 점차 선명해졌다.
“아.”
사냥제 때 아르문트를 시해하려 한 혐의로 감옥에 갇혔던 말콤. 그리고 죽은 그의 입안에서 나온 녹색 구슬.
장면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그리고 곧 로제타는 깨달았다.
어쩐지 그 구슬이, 예쁘게 반짝거리던 그것이 낯설지 않다는 사실을.
-“마담도 녹색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리세요.”
-“아, 고마워요. 제법 비싼 돈 주고 산 거랍니다. 황궁에 올 때만 입으려고요.”
시체 목구멍에서 나온 구슬의 생김새가, 마담 르블랑의 드레스에 달려 있던 장식과 일치했다.
쿵.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마담은 아르문트를 아주 어렸을 적부터 기른 유모인데. 그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인데……!
그러나 마담이 배신했다고 가정하자 수많은 것들이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로제타가 후원에서 살기를 느꼈을 때, 그곳에는 마담이 있었다.
아르문트의 방에 가득하던 저주 물건들은 대부분 마담이 선물한 것이었다.
마담은 아르문트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었고, 그만큼 편하게 그의 침실을 드나들었다. 그런 만큼 아르문트를 죽인 독침도, 독이 든 차도 준비하기 쉬웠을 테다.
심장마비가 사인이라고 생각했던 세 번째 죽음 당시에도, 마담은 아르문트의 곁에 있었다.
생각이 이어질 때마다 로제타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만 갔다.
푸른 눈동자가 크게 일렁거리며 아르문트가 사라진 쪽을 향했다.
어쩌면, 지금도-.
“안 돼.”
로제타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도약하듯 일어났다.
그러나 다급히 계단을 달려 내려가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중심을 잃고 말았다.
콰당탕!
가느다란 몸이 거칠게 계단을 굴렀다.
“로제타! 괜찮아요?!”
화들짝 놀란 페이즐리가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로제타는 아파할 시간도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에요?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얼른, 전하에게 가봐야 해요.”
그녀는 페이즐리를 밀어내며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계단을 구르며 꺾였던 발목이 아플 만도 하건만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페이즐리가 걱정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으나 로제타의 시선은 오로지 황태자궁이 있는 쪽을 향해 고정되었다.
다리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도중 몇몇 적군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로제타는 단칼에 갈라내고 시체를 넘어 뛰었다.
“제발, 아르문트……!”
절실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
황태자궁의 가장 화려한 방.
아르문트는 소파에 앉아 테오도르 신관의 치유를 받았다.
다행히 본궁에 비해 황태자궁의 피해는 적었다. 모르트마르의 수하가 몇몇 있기는 했으나 기사단장인 다이크의 손에 처형되었다.
덕분에 아르문트는 치유에 전념할 수 있었고, 마담 르블랑도 그의 맞은편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전하, 괜찮으세요? 어디 더 아픈 곳은 없으시고요? 속은 어떠신지…….”
마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걱정을 쏟아냈다.
“……나는 괜찮으니 베티, 그대의 몸부터 챙기도록 해.”
“괜찮다니, 전하의 지금 얼굴이 얼마나 창백한 줄 아세요? 신관님. 혹시 전하께서 독에 당하신 건 아닐까요? 너무 안색이 안 좋으신데…….”
“아, 예. 중독 반응이 있으시긴 했습니다만, 지금은 괜찮으십니다. 최대한 다 치유했어요.”
테오도르 신관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야말로 영 안색이 좋지 않았다. 종일 많은 사람을 치유하느라 기력을 다 쓴 모양이었다.
“고맙네. 그대도 이만 가서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군. 어차피 나도 이제 다시 본궁으로 갈 생각이니-.”
“네? 거길 왜 다시 가요! 위험해요, 전하!”
마담 르블랑은 경악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아르문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승하하신 이상, 황실의 사람을 돌볼 사람은 나야. 그러니 본궁으로 돌아가 모르트마르를 몰아내야 함이 당연하지 않나.”
“유일하게 남은 황손이시니 어떻게든 안전한 곳에 숨어 목숨을 부지하셔야지요!”
“내 그리 얍삽한 성격은 아니어서.”
“얍삽한 게 아니라 현명한 거예요! 지금까지 평생을 그리 해오셨잖아요!”
단정한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아르문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마담 르블랑을 마주 보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날이 선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테오도르 신관은 이곳에 있다간 새우등이 터지리란 걸 깨닫고 슬금슬금 방을 떠났다. 어차피 쉬러 가라 했으니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며.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르문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평생을 그리 해왔지.”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었다.
“황후를 피해 숨고, 그레이한을 피해 숨으며.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목숨만 보전하기 바빴어. 다른 것들은 철저히 모른 척하면서.”
“…….”
“이제는 그리 살고 싶지 않아.”
마담 르블랑은 아르문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거든.”
과거, 그녀가 키운 아이의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또렷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의 것만 같았다.
누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여자, 로제타가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었으니까.
마담 르블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못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어요. 전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막지 않을게요. 다만, 가시기 전에 이거라도 마시고 가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조금 전부터 우려내고 있던 차를 잔에 따랐다.
이런 상황까지 티타임인가?
아르문트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보내지 않기 위해 이런 수를 쓰는가, 의심하는 눈이었다.
마담 르블랑은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해독에 좋은 차예요.”
“베티, 그대는 늘 찻잎을 가지고 다니는 건가?”
“네. 귀부인의 기본 소양이라길래, 열심히 흉내 내는 중이랍니다. 조금 뜨거워도 쭉 들이키세요. 얼른 제국민을 지키러 가시려면 뜨거운 것 정도는 참으셔야죠.”
“웃는 얼굴로 빈정거리는 걸 보니 이미 완벽히 귀부인 같은걸.”
아르문트가 장난스럽게 눈매를 휘며 말하자 그녀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담 르블랑은 짓궂게 말한 것과는 달리 차가운 물을 섞어 온도를 맞춰주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아르문트에게 찻잔을 건넸다.
아르문트는 옅게 미소 지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특이한 홍차 향기가 콧가를 스쳤다.
그가 즐겨 찾던 종류는 아닌 듯, 진하면서도 톡 쏘는 듯한 향이 낯설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손가락으로 잔을 매만졌다. 따끈한 온기가 손바닥 위를 맴돌았다.
온도를 확인할 목적인지 잠시 머뭇거리던 아르문트가 마침내 잔을 들어 올렸다.
마담 르블랑은 그런 그의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찰나 같은 순간, 그녀의 녹색 눈동자 위로 기대감인지 불안감인지 모를 것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곧 맑은소리가 황태자의 침실을 가득 울렸다.
쨍그랑!
예쁜 찻잔이 처참하게 깨져 바닥을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