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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괴로운 건 모두 끝 (136/145)


136화. 괴로운 건 모두 끝
2022.06.19.


로제타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다리를 뻗었다.

본궁에서 황태자궁으로 가는 길.

아르문트와 함께, 혹은 다른 친구들과 수도 없이 오간 길이었으나 이토록 빠르게 지나간 적은 처음이었다.

걸어서 십오 분은 걸리는 거리를 단 삼 분도 안 돼서 돌파했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녀는 쉬지 않고 아르문트의 침실로 향했다.

도중 그녀를 발견한 몇몇 기사와 하인들이 아는 척을 해왔으나 빠르게 지나쳤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방문이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로제타의 귓가에 닿았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들은 적 있는 소리였다.

바로 직전인 네 번째 생에서, 아르문트가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쓰러졌을 때. 잔이 깨지며 저것과 같은 소리가 났다.

안 돼, 안 돼……!

절박하게 중얼거린 로제타가 방문 앞을 지키던 기사보다 먼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콰앙!

두꺼운 문짝이 한쪽으로 날아가며,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복도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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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문!”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여러 조각으로 깨져 바닥을 구르고 있는 찻잔의 모습이었다. 독살에 대한 불안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하듯, 축축하게 젖은 카펫이 까맣게 물들었다.

깨진 찻잔 옆에는 누군가 주저앉은 채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소파에 앉아 그 모습을 차갑게 지켜보고 있었으니.

맑은 밤하늘처럼 새카만 흑발과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라그나르의 황태자, 아르문트였다.

로제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소파에 앉아 마담 르블랑을 내려다보는 아르문트의 얼굴은 그녀의 예상과 달리 멀쩡했다. 치유를 잘 받은 듯 아까 전보다 안색도 훨씬 나았고, 피도 깔끔하게 닦아 한결 단정해 보였다.

다만 표정만큼은 몹시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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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았구나.’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차에 독이 들어있음을 깨닫고 마시지 않은 게 분명했다.

겨우 힘을 주고 있던 다리가 짧게 휘청였다. 안도감이 차오르며 긴장이 풀린 까닭이었다.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뻐 이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실제로 눈가가 뜨거워지기도 했다.

다만 마냥 기뻐하기에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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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무슨…….”

로제타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기사가 당혹하여 입술을 뻐끔거렸다.

마담 르블랑이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벌벌 떨고 있는데, 그걸 가만히 지켜보는 아르문트라니. 그가 마담을 얼마나 아끼는지 아는 이라면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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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괜찮으세요?”

로제타가 그의 곁으로 성큼 다가가 물었다.

아르문트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괜찮았지만, 차마 괜찮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푹 고개 숙인 마담의 모습에 수많은 감정이 가슴속에서 휘몰아쳤다. 입을 열면 날 선 감정이 울컥 터져 나올 것만 같아 아르문트는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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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나.”

한참을 고르고 골라 꺼낸 말은 겨우 이것이었다.

도대체 왜. 왜 당신마저 날 죽이려 했느냐고.

로제타를 만나기 전, 그가 삶을 이어나가던 이유를 하나만 꼽으라면 그건 당연히 마담 르블랑이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그녀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유일하게 그를 아끼고 걱정한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정이라는 것을 그에게도 준 사람이었다.

아르문트는 그녀가 자신에게 건네준 모든 것을 기억했다.

아침을 깨우는 상냥한 인사, 울고 있는 등을 쓰다듬던 부드러운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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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말이지만…… 가끔 저는 정말 전하가 제 아들 같아요.”

 
어린 날의 자신을 살아가게 한, 그 다정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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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 도대체 왜-.”

아르문트의 커다란 손이 소파 손잡이를 부술 듯 잡아 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는 신음 같은 숨결이 흘러나왔다.

지독한 원망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자, 마담 르블랑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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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들이, 제롬이 아파요. 황후 폐하께서, 협조하지 않으면 아들을 죽이겠다고 해서, 그 아픈 애를 죽인대서…….”

더듬거리며 밝힌 이유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를 배신한 모든 이들이 이와 비슷한 말을 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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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제롬은 전하와 달리 약하고, 외로워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아르문트가 작게 실소를 뱉었다.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하는 것까지 똑같았다.

그 말만은 하지 말지 그랬어. 그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제 잘못을 밝히고 사과만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비참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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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거친 목소리가 목구멍을 긁고 튀어나왔다.

마담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다시금 벌벌 떨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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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언제부터 날 속였는지. 내가 일말의 동정이라도 베풀길 바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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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십여 년 전부터였어요. 처음에는 협박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제롬의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져서…… 그래서 흑마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 죄송……!”

쾅!

화를 참지 못한 아르문트가 기어코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잘게 떨리는 속눈썹 사이로 황금빛 눈동자가 사납게 이글거렸다.

저런 진심 없는 사과 따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억울하다는 듯 울먹거리는 얼굴이 너무나도 역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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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고 가.”

아르문트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기사들은 빠르게 움직여 마담 르블랑을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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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전하! 잘못했어요, 전하! 제발 제 아들만은……!”

마담은 절박한 얼굴로 계속해서 제 아들의 목숨을 살려달라 빌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 했으면서. 이런 순간에 와서야 자비를 바라다니.

이내 한 쪽만 남은 문이 닫히고 마담의 절규가 점차 희미해졌다.

아르문트는 소파에 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얼른 다시 본궁으로 가봐야 하는데, 도무지 기력이 나질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로제타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아르문트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따스한 품이 얼굴을 감싸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울컥 차올랐다.

아르문트는 천천히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 쥐었다. 피가 묻은 팔이 힘없이 전율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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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놀랍게도 이것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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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아.”

아르문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로제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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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아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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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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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질 때까지, 제가 곁에 있을게요.”

옷자락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로제타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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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괴로운 건 모두 끝났어요.”

창문 너머로 황실 기사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밝게 상기된 표정이 전투의 결과를 짐작하게 했다.

이제 진짜 다 끝났구나.

이렇게 중얼거리며, 로제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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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트마르 백작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소란했던 모반도 마침내 끝이 났다.

다만 상황을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서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우선 패잔병을 소탕하고, 이번 반역에 가담한 이들을 모두 잡아 투옥했다. 그들에 대한 처형은 추후 공개 집행할 예정이었다.

사용인들은 무너진 외벽을 수리하고 전투 흔적을 지우느라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뿐만 아니라 시체와 부상자를 옮기는 것도 급했다.

이번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다친 이들은 더욱더 많았다.

소식을 들은 펜리르 신전에서는 서둘러 대신관들을 파견해주었다. 원래 이렇게 일 처리가 빠른 이들은 아닌데, 이번 모반에 대신관이 끼어 있었다는 사실을 듣고 질겁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부상자들은 가능한 최상의 치유를 받았지만, 신성력이 만능이 아닌 이상 치유되지 않는 상처도 많았다.

그 예로 리처드의 오른쪽 얼굴에 남은 화상은 치유가 되지 않았다. 강력한 흑마법에 당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평생 새카만 반가면으로 오른쪽 얼굴을 가리고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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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에 이어 화상이라니. 이제 정말 연애는 글렀군요. 뭐, 어차피 지금 같은 업무 강도로는 연애할 시간도 없었지만요.”

속이 쓰라릴 만도 하건만 리처드는 그저 장난스럽게 넘겼다. 많은 기사가 목숨을 잃은 때에, 고작 이 정도 상처로 유난을 떨 순 없다며 말이다.

실제로 그는 치유를 받은 뒤 괴물 같은 회복력을 발휘하여 금방 호위 업무에 복귀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것만 아니면 이전과 다른 점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운이 좋은 경우가 있다면, 반드시 운이 나쁜 사람도 존재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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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윽, 흑……. 러크, 러크가 어떻게…….”

멜라니가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들썩거렸다.

로제타는 심란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로제타의 위로에 멜라니의 울음은 더욱 커졌다. 이내 그녀가 괴로운 얼굴로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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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러크 자식이 내 남편이 될 수가 있어어……! 흐어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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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어쩌다 그런 끔찍한 결정을 했어.”

잠시 미치기라도 했던 거니?

로제타가 눈썹을 시무룩하게 늘어뜨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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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식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고백을 하니까아…… 흐윽. 나도 모르게 그만 그 자리에서 결혼하기로 해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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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다정도 병이라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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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혹시 이런 말은 나 없는 자리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닌지…….”

병상에 앉아 있던 러크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헤헤 웃었다. 그러나 멜라니의 살벌한 눈초리가 자신을 향하자 냉큼 저자세를 취하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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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 환자인 거 알지? 때리면 안 돼! 그리고 결혼은 네가 하자고 했어! 난 고백만 한 거고! 어쨌든 무르는 거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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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나아, 러크. 그래야 내가 널 때리지.”

장난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둘의 모습에 로제타는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반역이 일어난 날 밤, 러크는 감염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져 머지않아 죽으리란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고비를 넘겨 살아남았다. 다만 돌덩이에 깔렸던 다리는 앞으로 쓸 수 없을 거라 했다. 기사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항상 러크를 제 소꿉친구에 불과하다 주장하던 멜라니는 그 소식을 듣고는 곧장 그에게 청혼했다. 앞으로 돈은 자신이 벌 테니,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내조하라며 말이다.

마찬가지로 늘 멜라니는 소꿉친구에 불과하다 주장하던 러크는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이를 수락했다. 다행히 호위기사로 일하며 제법 돈을 벌어놓은 모양인지 수도에 작은 신혼집 한 채는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괜히 이렇게 우는 척을 하고는 있지만, 멜라니도 그와 함께할 인생이 제법 기대가 되는 듯했다.

둘은 아마 행복하게 잘 살 것이다. 서로를 향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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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연인의 모습을 보니 문득 아르문트가 보고 싶어졌다.

로제타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조금 있으면 그와 식사하기로 한 시간이었다.

꿀꺽.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벌써 긴장이 밀려들었다.

오늘의 식사 자리에서 로제타는 아르문트에게 자신의 비밀을 모두 밝힐 작정이었다.

회귀 사실을 포함하여,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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