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일장춘몽 혹은 (138/145)


138화. 일장춘몽 혹은
2022.06.26.


갑작스러운 프러포즈에 가장 놀라고 긴장한 것은 로제타도, 아르문트도 아닌 리처드였다.

그는 입을 쩍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르문트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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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타이밍에 청혼이라니, 진심인가?’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하지 못한 그였으나 보통 청혼을 이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알았다.

무려 제국의 황태자가 하는 청혼이라면 적어도 어마어마한 보물을 주거나, 하다못해 집채만 한 꽃다발이라도 안겨주어야 하지 않나.

고작 평범한 저녁 식사 후 고백이라니. 심지어 로제타는 조금 전까지 엉엉 울었던 탓에 붕어 눈이 됐는데!

실망한 그녀가 거절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리처드는 아르문트의 연애 실력이 몹시 서투르다고 생각하며 혀를 쯧쯧 찼다. 만약 제가 한다면 이보다 백배는 낫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로제타는 퉁퉁 부은 눈으로 아르문트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무척 귀여우면서도 멋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지금의 프러포즈는 무척 뜬금없었지만, 리처드가 예상한 대로 실망하거나 속이 상하지는 않았다.

아르문트가 왜 이런 방식을 선택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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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떤 프러포즈가 좋아?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고, 진짜로 다른 데 안 말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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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잘 생각해보진 않았지만……. 그냥 평범한 게 좋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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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거라면 어떤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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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평소처럼 함께 밥을 먹은 뒤에 결혼하자 한다던가? 아니면…… 따끈한 차를 마신 뒤에?”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중에 하는 자연스러운 청혼. 로제타가 멜라니에게 제 취향이라며 밝혔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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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을 걸고 안 이르겠다더니.’

로제타는 호언장담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다정한 눈으로 아르문트를 마주 보았다.

분명 아르문트는 그 나름대로 꿈꾸던 프러포즈가 있었을 것이다. 청혼에 대한 로망과 기대감이 여자만의 전유물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군말 않고 그녀의 취향대로 분위기를 맞춰준 것이 고마웠다. 그러고도 행여나 거절당할까, 두려워 떨리는 눈동자는 더욱이 사랑스러웠고.

로제타는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손을 뻗었다.

굳이 대답에 더 시간을 끌어 그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한참 전부터 답변은 정해져 있었으니, 망설일 이유도 없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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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에요, 전하.’

로제타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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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우웅-!

커다란 이명이 머리를 마구 울려댐과 동시에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황하여 아르문트를 부르려 했으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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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뭐야. 왜 이러는 거야!’

로제타가 다급히 숨을 헐떡였으나 숨조차 제대로 내쉬어지지 않았다.

시야가 금세 새카맣게 물들고 머리는 계속해서 돌았다. 귓가에는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속삭이는 것만 같은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제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만 같고, 세상이 마구 반전하는 듯한 기이하고도 괴로운 감각.

모든 회귀를 포함하여 딱 한 번 겪어본 느낌이었다.

발레리안이 그녀의 검을 매개로 시간 마법을 완성했을 때.

가장 처음으로 시간이 뒤로 돌아갔던 바로 그때, 이 같은 경험을 했었다.

그러나 갑자기 왜?

모든 일이 비로소 해결된 지금, 왜 이러한 감각이 느껴지는지.

로제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고통 속에 아르문트의 이름만 되뇌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아득하고도 신성한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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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은 이루어졌다.]

 
동시에 세상이 밝아졌다.

파앗!

로제타가 눈을 떴다.

초여름의 화창한 햇살 사이로 청명한 풀벌레 울음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새카맣게 물든 시야도, 숨이 막혀오는 압박감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던 그녀가 이내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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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

통통한 입술 사이로 거친 숨결이 터져 나왔다.

방금처럼 세상이 빙빙 돌지는 않았지만, 어지럼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왔다. 이 또한 그녀가 처음으로 회귀를 경험했을 때 느꼈던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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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풀밭을 더듬어 짚고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찌푸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 연못가의 풍경이 시야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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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로제타도 아는 곳이었다.

과거, 그녀가 기사단장이던 시절. 자유시간이 생기면 종종 이 연못가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었다.

잔잔한 수면 위로 어렴풋이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아주 익숙하고도, 낯선 모습이.

등 뒤로 펄럭거리는 새카만 망토와, 은으로 장식되어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제복. 기사단장임을 나타내는 옷깃 아래의 문양.

젖살이 빠져 갸름한 턱과, 한결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얼굴까지.

이것은 서른 살 로제타의 모습이었다.

회귀를 경험하기 전, 제국의 소드마스터이자 최연소 기사단장으로서 살아가던. 아르문트를 향한 사랑을 제대로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바로 그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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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은 이루어졌다.]

 
조금 전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로제타는 재빨리 제 허리춤을 더듬어 검을 찾았다.

뭉툭한 검의 질감이 느껴졌다. 아르문트가 하사한 검이 아닌, 다른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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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나르의 심장…….’

아르문트가 그러기를, 황후가 제 검을 그렇게 칭했다고 했다. 신의 힘을 지녔다는 그 보물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이다.

이를 전해 들은 로제타는 어쩌면 발레리안이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시간 마법을 완성해낸 것이 보물 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이는 그저 장난스러운 추측에 불과했다. 신의 힘이라니, 너무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조금 전 그녀가 들은 목소리는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제 할 일을 모두 끝났다는 듯 사라져버린 검이 이를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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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로제타는 멍한 얼굴로 자신이 회귀 전 소원하던 것을 떠올려 보았다.

아르문트를 살리는 것. 당연하게도 그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렇다면, 아르문트를 살렸기 때문에 다시 시간이 돌아왔다는 것인가? 회귀를 경험하기 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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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 전하는…….’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손을 향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에는 그동안의 고생을 드러내듯 굳은살이 이곳저곳 박여 있었다.

아르문트와 수줍은 미소와 함께 건넸던 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쿵,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고작 십 분 전까지만 해도 행복으로 물들었던 얼굴에는 이제 절망과 불안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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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로제타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비틀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러곤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시간 여행의 부작용으로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렸지만 멈추지 않고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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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거야. 제발, 아닐 거야……!’

내딛는 걸음마다 절박한 마음이 흘러넘쳤다.

아직 청혼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지금껏 숨겨온 비밀에 대해서도 전혀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그 모든 회귀가, 노력이, 사랑이. 이렇게 일장춘몽으로 끝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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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단장님! 어딜 그리 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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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님? 무슨 일입니까?”

아르문트의 침실로 향하던 도중 몇몇 기사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누군가는 뒤를 쫓아오기도 했으나 로제타는 차갑게 지나쳤다.

순간 마담 르블랑과 함께 있던 아르문트를 찾으러 갔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아르문트는 무사할 것이다. 무사히 살아남아 제게 사랑을 속삭일 것이다.

로제타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리고 마침내 방문이 가까워졌다. 과거와는 달리, 그 누구도 지키고 서 있지 않은 모습이 불안을 자극했다.

콰앙!

로제타가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지금 당장 아르문트를 마주하지 못하더라도, 제발 그가 살아있다는 흔적이나마 발견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텅 빈 방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침대도, 소파도, 그 어떤 가구나 장식도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텅 빈 방.

아르문트가 죽은 이후, 서둘러 치워진 그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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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멍하니 벌어진 입술 틈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로제타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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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울컥, 눈물이 솟아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툭,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눈물방울을 보며 로제타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너무도 괴로워 제대로 된 울음마저 나오지 않았다. 그저 꺽꺽거리는 소리만 뱉으며 눈물을 줄줄 흘려댈 뿐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뜨거웠고, 흐려진 시야는 또다시 빙글빙글 돌았다.

얼른 대답할걸. 물론이라고, 기꺼이 당신과 결혼하겠노라고. 최대한 빨리 대답할걸.

그랬더라면 적어도 기뻐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찰나의 순간이라도 좋으니, 아르문트의 아내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로제타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아직은 어린 티가 나는 얼굴로 진지하게 청혼해오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새겨진 것처럼 자꾸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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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단장님! 무슨 일이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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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어디 아프신 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기사들이 다가와 걱정의 말을 건넸다.

어느새 뒤에 사람이 잔뜩 몰린 듯 주위가 소란해졌다.

다만 로제타는 이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눈물만 뚝뚝 흘려댔다.

가슴이 정말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냥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신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몇 번이나 마주하고도 멀쩡할 수는 없다.

그를 살리려던 노력과, 그와 나눈 행복한 추억들이 고작 자신만의 환상에 불과했다면 더욱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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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는 무리야.’

바닥을 짚은 손에 점차 힘이 풀렸다.

그렇게 포기하듯 눈을 감으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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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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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입니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다급히 잡아 쥐었다.

동시에 특유의 시원한 향기가 콧가를 스쳤다.

호칭도 무척이나 생경한 데다, 목소리도, 말투도 그녀가 아는 것과 미묘하게 달랐으나 로제타는 알 수 있었다.

제 어깨를 쥔 손이, 자신이 그토록 부르짖던 이의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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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다치기라도 한 겁니까?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로제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바라던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잘 정돈된 머리카락, 냉정한 듯하나 그녀에 한해서는 끝없이 부드러운 눈빛, 더 선명해진 턱선과 넓어진 어깨.

그리고 황제를 상징하는 붉은 망토까지.

서른네 살의 아르문트가 눈앞에 있었다.

무사히 살아남아 어엿한 남자이자 황제가 된 모습으로, 그녀를 향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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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정말 전하예요?

로제타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너무 울어서인지, 혹은 놀라서인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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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괜찮으신 겁니까?”

무릎을 꿇어앉은 아르문트가 다급히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걱정과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 상냥한 목소리. 조금 전 다이닝 룸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다소 다르지만, 분명히 그였다.

로제타는 그의 옷깃을 꼭 붙잡은 채로 서서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내가 아르문트의 부인이 되었구나.

내가 아르문트의…….

그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무겁게 내리 덮였다.

긴장이 풀리며 아까부터 그녀의 머리를 흔들어놓던 어지럼증이 기어코 의식을 집어삼켰다.

로제타의 몸이 힘없이 늘어지자 놀란 아르문트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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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신관을 데려와! 대마법사도 서둘러 불러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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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 그녀의 표정만큼은 무척이나 평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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