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첫사랑을 못 잊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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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첫사랑을 못 잊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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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첫사랑을 못 잊어서
2022.06.30.
붉은 속눈썹이 느릿하게 살랑거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 희미한 시야 속에 애틋한 얼굴이 담겼다.
로제타는 멍하니 눈을 껌뻑거렸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아르문트가 보였다. 동시에 과거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세타르를 마시고 누워 있던 때, 자신을 간호하고 있던 그의 모습이 현재의 아르문트 위로 겹쳐졌다.
정신이 몽롱한 탓에 어느 것이 현실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 순간, 아르문트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부인, 일어나셨습니까.”
아르문트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로제타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깨어난 것에 무척 안도한 기색이었다.
로제타는 비로소 조금 전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모두 꿈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느닷없이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도, 아르문트가 황제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도 모두 현실이었다.
깊은 안도감과 함께 당혹스러움이 밀어닥쳤다.
‘정말 시간이 돌아왔다고?’
청혼을 받자마자 10년의 세월이 뚝딱 사라져버리다니. 당황스럽다 못해 억울할 지경이었다.
그가 무사히 살아 있고, 또 함께 사랑을 나눈 기억이 모두 미래에 반영되었다는 사실은 몹시 다행이었지만. 안심하고 나니 억울함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내, 내 행복하고 풋풋한 신혼 생활은? 인생에 한 번뿐일 결혼식은?’
같이 가기로 한 여행은 다 어떻게 된 건데!
로제타가 속상한 마음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서러워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러자 이를 발견한 아르문트가 황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어디 아프십니까?”
그는 로제타가 아파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고 생각한 듯 서둘러 신관을 불러들였다.
로제타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 아니에요. 저는 멀쩡해요. 아픈 곳은 없으니, 걱정 마세요.”
“……멀쩡한 사람이 그리 울다 기절까지 한답니까. 부디 말해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떤 새끼가 감히 그대를 울렸습니까.”
황금빛 눈동자가 사납게 번들거렸다. 커다란 사내의 몸 주위로 살기가 풍겨 나왔다.
확실히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10년 전보다 목소리가 더 낮아진 것 같았다. 얼굴과 몸의 선도 더 굵어졌다.
‘회귀하기 전 모습과는 또 다르네…….’
그녀가 기억하는 서른네 살의 아르문트는 이보다 더 몸이 가늘었었다. 낯빛도 조금 더 어두웠고,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녀가 과거를 바꾼 결과 이런 사소한 것들도 다 변한 모양이었다.
“……부인?”
그녀가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제 얼굴과 몸만 응시하자, 아르문트는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로제타는 그제야 방금 제 눈빛이 무척 변태 같았음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열고자 했다.
그러나 한 마디 꺼내기도 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로즈!”
“폐하께서 깨어나신 건가요?”
마찬가지로 익숙한 듯 낯선 얼굴들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사내의 가슴께에서 결 좋게 찰랑거리는 금빛의 머리카락이었다.
시선을 올려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을 발견하자 이내 로제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발레리, 네가 어떻게 황궁에……?”
분명 유배형에 처해 한동안 수도에 오지 못할 거라고 했었는데.
멍하니 중얼거리던 로제타는 곧 지금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음을 새삼 인지했다.
“아, 5년 형이라고 했었지. 그런데 머리가 엄청 길었네.”
그녀의 말대로 발레리안은 전에 없이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분명 첫 번째 인생에선 나이가 어떻게 되든 항상 단발을 유지했었는데, 지금은 머리카락이 가슴 아래까지 내려왔다.
물론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 알려진 사람인만큼, 발레리안은 장발마저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시선을 옆으로 옮기자 이번에는 테오도르 신관이 보였다. 신기하게도 그는 10년 후가 아니라 10분 후라고 해도 좋을 만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테오도르 신관님은 그대로고…….”
로제타가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물론 방이 워낙 조용했기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듣고 말았다.
일순 세 남자 사이에 미묘한 시선이 오갔다.
곧 테오도르 신관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정적을 깼다.
“폐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진찰 결과 피로가 쌓인 것 말고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혹 다른 증상은 없으신지요.”
로제타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았다.
약 십 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저요?”
‘폐하’가 혹시 나?
로제타가 손가락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켰다.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다.
테오도르 신관 또한 몹시 당혹한 듯한 표정으로 떠듬떠듬 말했다.
“예, 황후 폐하께 여쭌 것입니다만…….”
로제타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황후 폐하라니. 내가 라그나르 제국의 황후라니!
물론 아르문트가 자신을 부인이라고 불렀고, 그는 황제가 된 듯하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막상 폐하라는 호칭을 들으니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로즈, 설마 해서 묻는 건데.”
여태껏 침묵을 유지하던 발레리안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입을 열었다.
“혹시, 기억이 사라진 거야?”
세 남자의 시선이 로제타에게 집중되었다. 모두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이걸 기억을 잃었다고 말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던 로제타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기억이 사라졌다고도 말할 수 있으니까.
그러자 아르문트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잘생긴 얼굴 위로는 깊은 충격이 번졌다.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은 표정이었다.
“이, 일시적인 기억상실일지도 모릅니다! 황후 폐하, 혹시 어디까지 기억을 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어…….”
로제타가 슬며시 아르문트의 눈치를 보았다.
“전하가 제게 청혼하는 순간까지요.”
정적이 더욱 깊어졌다. 이제는 숨소리 하나마저 들리지 않았다. 모두 숨을 멈추기라도 한 것 같았다.
“……설마, 10년 전 겨울을 말하는 겁니까?”
아르문트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제발 아니라고 해주길 바라는 듯, 간절한 목소리였다.
로제타는 민망하고도 억울한 마음에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누구 하나 충격으로 기절하지 않기를 바라며 빠르게 덧붙였다.
“아니, 사실 기억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발레리안을 흘끔 쳐다보았다.
현재의 자신이 아르문트에게 회귀 사실을 밝혔는지, 아닌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발레리안의 표정만으로는 그 유무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뭐, 어차피 말하려 했던 거니까…….’
갑자기 시간이 돌아가지만 않았더라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밝혔을 비밀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발레리안이 마법으로 돌렸던 시간이,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온 것 같아요. 저는 약 10년의 세월을 건너뛴 거고요.”
“……시간을 돌리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말 안 했구나.
아르문트의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요-.”
로제타는 작게 숨을 들이마신 후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수년간의 이야기이다 보니 압축해서 말했음에도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다.
그녀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아르문트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죽음의 진정한 이유를 깨닫고, 전하께 청혼을 받은 순간. 갑자기 세상이 빙빙 돌더니 시간이 원래의 궤도로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그러고 눈을 뜨니 지금이었죠. 전하께서 하사해주신 검이 사라진 걸로 보아, 아마 ‘라그나르의 심장’이 신비한 힘을 발휘한 것 같아요.”
“…….”
“그리고 제가 울었던 이유는…… 황태자궁에 갔더니 전하의 침실이 비어 있어서, 미래가 바뀌지 않은 줄만 알고 절망했던 거였어요. 전하께서 계승식을 준비하던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바보같이 황제 폐하가 되었으리라곤 생각을 못 한 거 있죠.”
로제타가 어설프게 헤헤 웃음을 흘리며 아르문트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은 충격으로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피부는 파리했고, 눈가는 파르르 떨렸으며, 입매는 잔뜩 굳었다. 손에는 얼마나 힘을 줬는지 탄탄한 팔뚝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그대로 두었다간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 어쨌든 모든 게 잘 풀렸으니 정말 다행이에요. 미래도 잘 바뀐 것 같고……. 그보다, 제가 기억하지 못 하는 10년간 무슨 일이 있었나요? 듣자 하니 결혼은 한 것 같은데.”
그녀는 재빨리 말을 돌려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했다.
다행히 발레리안이 눈치껏 그녀의 말을 받아주었다.
“저놈은 날 웬 시골 마을에 유배시킨 뒤 바로 황제로 즉위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고, 로즈, 넌 제국민들의 환호 속에 황후가 되었지. 기사단장 자리도 겸하면서 말이야.”
저놈이라니! 로제타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발레리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럽게 답했다.
“괜찮아. 우리 친해.”
“……정말로?”
“응. 적어도 네 앞에서는.”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로제타가 로제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발레리안을 째려보았다.
발레리안은 그녀의 눈초리를 가뿐히 무시하며 부연했다.
“신혼여행은 같잖게도 내가 유배된 마을에서 멀지 않은 남부의 바닷가 도시로 가더군. 쳐들어가서 저놈의 멱을 따고 싶은 걸 참느라 어찌나 힘들었었는지.”
“……정말 친해진 거 맞아?”
“그럼.”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결같은 뻔뻔함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테오도르 신관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재차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그럼, 둘은 결혼했나요?”
“아, 예. 전 5년 전쯤 했습니다. 부끄럽지만, 루니엘라 공작님이 제 반려자 되십니다.”
“루니엘라 공작이요……?”
머릿속에 위압감이 넘치는 중년의 남자가 떠올랐다. 반짝거리는 은발이 매력적인 페이즐리의 아버지였다.
“우리 페이즐리를 말하는 겁니다. 얼마 전에 공작위에 올랐습니다. 대단하지요?”
테오도르 신관이 헤실헤실 웃으며 제 아내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예상 못 한 결과에 로제타는 감탄을 흘렸다.
그녀가 공작위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검술을 가르치는 동안 대충 짐작했다. 황태자비의 자리에 있을 때는 죽은 생선의 것처럼 침침한 눈빛이, 검을 휘두르거나 공작가의 경영에 대해 얘기할 때면 반짝반짝 빛났기 때문이었다.
쉽지 않은 길인 걸 알기에 걱정했는데, 결국은 이뤄냈구나.
한때의 스승으로서 권력도, 남자도 모두 쟁취한 그녀가 몹시 자랑스러웠다.
“그럼 발레리는……?”
목소리가 한결 더 조심스러워졌다.
치열했던 전투의 결과로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발레리안이 그녀를 향해 사르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 덕에 걱정스럽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10년간, 그도 마음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은 모양이다.
로제타는 이렇게 추측했으나 안타깝게도 발레리안은 언제나 예측 가능한 범주의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결혼 안 했어.”
“아, 그렇구나. 하긴, 결혼하기엔 아직 어리긴 하지.”
“그것도 그렇고.”
발레리안이 불그스름한 입술을 예쁘게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아직 첫사랑을 못 잊어서.”
말이 끝나자마자 날카로운 나이프가 그의 목을 향해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