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지나치게 섹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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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지나치게 섹시하다
2022.07.03.
아르문트는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나이프들을 발레리안을 향해 마구 던졌다.
어찌나 세게 던져대는지, 자칫 스치기라도 하면 피부가 된통 찢어질 것 같았다.
발레리안은 놀라운 스피드로 공격을 거의 피해냈다.
두어 개 미처 피하지 못한 칼날이 그의 귀를 스쳤지만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얍삽하게도 방어마법을 펼쳐둔 모양이었다.
“내 분명 경고했을 텐데. 한 번만 더 헛소리를 지껄이면 그 예쁜 입술을 찢어놓겠다고.”
“제 입술이 예쁜 건 저도 알지만, 그렇게까지 대놓고 칭찬하면 부끄럽습니다, 폐하.”
“진정 오늘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가 보군.”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아르문트가 살벌하게 협박을 하면 발레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능글맞게 웃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친해진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기에는 비수를 던지는 아르문트의 움직임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로제타가 깜짝 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테오도르 신관은 그들의 이러한 행동이 매우 익숙하다는 듯 몇 걸음 뒤로 물러나 평온한 얼굴로 전투를 지켜보았다.
쯧쯧. 작게 혀를 찬 그가 이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리 소란을 피우시면 황후 폐하의 몸에 좋지 않습니다!”
마법 주문이라도 외운 것처럼 아르문트와 발레리안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목을 조르고 싶다는 듯 서로를 사납게 응시하면서도 손가락 하나 더 까딱하지 않았다.
우와. 로제타가 감탄하며 테오도르 신관을 올려다보았다. 손쉽게 두 남자를 제압하고 콧방귀를 뀌는 모습이 흡사 노련한 맹수 조련사 같았다.
‘그러게 발레리는 왜 이상한 농담을 해선.’
저놈의 주둥아리. 스물두 살일 때나 서른두 살일 때나 쓸데없는 소리로 아르문트의 화를 돋우는 건 한결같았다.
첫사랑을 운운하는 모습에 잠시 자신도 가슴이 철렁하긴 했지만, 뻔뻔하게 미소 짓는 모습으로 보아 그저 장난이었던 모양이다.
로제타는 다시금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새로운 주제를 골랐다.
마침 궁금한 게 하나 떠올랐다.
“저, 그러면 혹시, 우리…… 아기도 낳았나요?”
결혼한 지 10년째라면 아이 한둘은 있을 법하다.
만약 정말 아이가 있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자식이 있는 게 싫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이의 입장으로 보면 제 어머니가 자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은 게 돼버리니까. 그건 아이에게 너무 못 할 짓이지 않나.
무슨 일인지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아르문트의 낯빛도 재차 어두워졌다.
이번에는 발레리안도, 테오도르 신관도 대신 대답하지 않았다. 사안이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아이는 없습니다.”
아르문트의 눈동자가 처연하게 흔들렸다.
이를 본 로제타는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군요.”
주변의 반응도 그렇고, 연신 제 얼굴을 살피는 아르문트의 태도도 그렇고. 아무래도 자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던 모양이다.
“……대마법사는 마법 부작용이라고만 설명했습니다. 어떤 마법의 부작용인지는 평생토록 말해주지 않았고요. 그때는 그것이 부인을 배려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르문트가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지막이 깔린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이제 보니, 부인께서 절 배려한 것이었군요.”
로제타는 그제야 왜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이 아르문트에게 회귀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시간 마법의 부작용으로 불임이 된 것을 알게 되면, 필연 아르문트는 지금처럼 죄책감에 괴로워할 테니까. 그것이 걱정되어 지금껏 말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아르문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이런 순간까지도 자신을 걱정하는 로제타의 모습이 고맙고도 서러워, 아르문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렇다면…… 후계는 어떻게 할 계획인가요? 혹시, 정부를…….”
이는 몹시 자연스러운 추측이었다. 황후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경우, 황제는 황후를 교체하거나, 또는 정부에게서 후계를 보았으니까.
“정부를 들일 생각은 일절 없습니다.”
아르문트가 가차 없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커다란 손이 로제타의 손을 압박하듯 덥석 잡아 쥐었다. 꼭 정부라는 말을 꺼낸 것을 원망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귀족들이 그렇게 두지 않을 텐데요…….”
“누가 감히 제 앞에서 그딴 개소리를 들먹인단 말입니까.”
으득, 거칠게 이가 갈리는 소리가 새어나갔다.
사실 이미 로제타가 걱정한 대로의 사례가 있었다.
수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귀족 몇몇은 아르문트에게 정부를 들일 것을 권했다.
그리고 아르문트는 그러한 제안을 한 신하를 그 자리에서 파면하였다. 죄목은 황족모독죄였다.
그 결과 귀족들은 아르문트 앞에서 철저히 입조심을 하게 되었다. 황후를 향한 그의 지극한 사랑도 제국을 넘어 타국까지 널리 널리 알려졌다.
“제 인생에 아이는 없어도 됩니다. 황제라는 이유로 아이를 꼭 들여야 한다면 황위를 버리겠습니다. 말하지 않습니까. 제 목표는 영원히 부인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뿐이라고.”
절절한 고백에 로제타의 두 뺨이 점차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스물네 살의 아르문트에게 저 말을 들었을 때도 몹시 기뻤지만, 지금은 기쁘고 행복하다 못해 부끄럽기까지 했다.
아르문트의 진득한 눈빛도, 손등을 느릿하게 쓰다듬는 손길도 모두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꿀꺽. 로제타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서른넷의 아르문트는 지나치게…….
지나치게 섹시하다.
로제타가 드디어 그에게 어울리는 형용사를 찾아냈다.
한층 깊어진 눈빛 하며, 나긋하면서도 중후한 목소리, 은근하고도 야릇한 향기. 모든 것이 관능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시선을 오래 마주하기가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분명 제 연인이 맞긴 한데, 몇 년 만에 마주한 것처럼 낯설었다. 풋풋한 첫사랑이 매혹적인 사내가 되어 나타난 느낌이었다.
“크흠, 흠. 보아하니 달리 아프신 곳도 없는 것 같고……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테오도르 신관은 아르문트와 로제타 사이에서 흐르는 은근한 기류를 감지하고 재빨리 발을 뺐다.
발레리안 또한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인사를 건넸다.
“나도 이만 가볼게.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짓궂게 둘만의 시간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예상과 달리 제법 깔끔하게 물러서는 그였다.
그러나 문을 나서기 직전, 기어코 발레리안이 말을 보탰다.
“그나저나 아쉽다, 로즈. 만약 네 기억이 저놈과 사랑에 빠지기 전에 머물러 있다면 내가 다시 노려보는 건데.”
쨍그랑!
이번에는 탁자에 올려져 있던 유리잔이 그를 향해 날아갔다.
발레리안은 고개를 돌려 유리 조각을 피하곤 문틈 사이로 쏙 빠져나갔다. 닫힌 문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번에는 꼭 죽일 겁니다.”
“으음…… 응원할게요.”
그녀가 보기에도 몹시 얄미운 모습이었던지라, 로제타는 차마 발레리안을 변호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중에도 차마 아르문트와 제대로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둘만 남으니 괜히 더 긴장된 탓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런 그녀를 배려하듯 아르문트가 갑작스럽게 자리를 떠났다.
그냥 좀 어색했던 거지, 아예 가길 원했던 아닌데.
로제타는 풀죽은 얼굴로 그가 떠난 자리를 더듬었다.
황제의 침실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라 더욱이 마음이 불편했다.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아르문트가 돌아왔다.
손에는 따끈따끈 김이 나는 수프를 들고선.
“갑자기 기름진 걸 먹으면 탈이 날 수도 있으니 저녁은 수프로 대신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서른네 살의 아르문트는 섹시한데 다정하기까지 하다.
사실 스물네 살일 때도 다정한 건 마찬가지였음에도 로제타는 괜히 의미부여를 하며 감탄했다.
“아, 하십시오.”
“제, 제가 먹을게요!”
지나친 상냥함에 로제타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음식을 날름날름 받아먹기에는 아직 그가 너무 낯설었다.
아르문트는 이러한 그녀의 마음을 파악하곤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더 강제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트레이를 그녀의 무릎 위로 올려주었다.
흠흠, 괜스레 헛기침한 로제타가 열심히 수프를 떠먹었다.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르문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결혼식이 끝난 뒤 잔뜩 지쳐 서로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던 것도, 함께 소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바닷가를 거닐었던 것도. 매일 매 순간이 너무나 소중해, 애지중지 아껴 보내던 나날들도…… 전혀 기억에 없습니까?”
이렇게 묻는 그의 얼굴은 몹시 슬퍼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아내가 결혼 후의 기억을 모두 잊었는데, 어느 누가 서럽지 않을까.
로제타는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며 차분히 답했다.
“네. 미안해요, 전하.”
아르문트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아니요.”
그는 거칠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미안함은 제 몫입니다. 부인께서는 저를 위해 수없이 많은 시간을 반복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긴 시간 동안, 당신께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을지. 반복되는 시간을 홀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을지. 저는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헤아릴 길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그의 가슴속에서 휘몰아쳤다.
조금 전, 그녀에게서 모든 사정을 들은 후부터 그는 사무치는 슬픔에 가슴이 에는 듯했다.
애써 분위기를 바꿔보려 노력하는 로제타의 모습에 애써 참아냈으나 음식을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방을 나섰을 때는 기어코 소리 없이 눈물까지 쏟고 말았다.
“저는 부인과의 행복한 추억만을 기억하는데, 그 모든 행복을 선사해준 부인께서는 저로 인해 힘든 기억을 온전히 안고 가야 하니…….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도무지 할 말이 없습니다.”
10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어제처럼 생생했다.
로제타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얼마나 많이 다치고 또 가슴앓이했는지. 그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기억하는 것은 기껏해야 그녀가 경험한 것들의 오 분의 일일 뿐.
로제타가 가시밭길을 걷도록 한 주제에 그 고통을 전혀 알아주지도 못한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아니에요, 아문.”
로제타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을 돌린 것은 온전히 제 선택이에요. 그에 대해 당신은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으면 해요. 그리고, 회귀를 반복하는 동안 여러모로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 기억들이 전혀 괴롭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녀가 아르문트의 손을 꽉 잡아 쥐며 시선을 맞추었다.
흔들림 없는 눈빛이 그를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왜냐하면, 당신이 살아 있으니까. 당신이 살아 이렇게 나를 걱정해주니까. 고난은 명예가 되었고, 반복된 시간은 지나올 가치가 충분했던 길목이 되었어요. 10년간의 행복한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좀 아쉽지만, 우리 앞에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이 남았으니까요.”
소중한 추억은 앞으로 더 많이 만들어가요.
로제타가 다정한 눈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아르문트는 그런 그녀를 한참 멍하니 응시했다.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가 눈물을 떨굴 듯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나이를 먹으며 눈물 참는 능력을 길러낸 모양이었다.
그가 이내 살포시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뻗었다.
“……그렇다면, 고생한 부인께 수프를 먹여주는 것부터 시작할까요.”
“푸핫! 알았어요. 먹여주세요.”
로제타가 웃음을 터트리며 그에게 트레이를 다시 건네주었다.
아르문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스푼을 잡아들었다.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양의 수프를 쏙쏙 입안에 넣어주는 것으로 보아, 한두 번 먹여준 게 아닌 듯싶었다.
“그나저나, 존댓말은 언제부터 쓴 거예요?”
“결혼 후부터 쭉 써왔습니다. 부인께서 제게 절대 말을 낮추지 않으시기에, 제가 높이기로 했죠. 부부관계란 무릇 평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 안 되었다고 대답하면 다시 말을 낮춰달라고 할 심산이었는데. 무려 10년이나 되었다니 할 말이 없었다.
제가 모시던 주군이 제게 말을 높인다는 것이 몹시 어색하긴 했지만, 계속 듣다 보니 나쁘지는 않았다.
저런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한다면 어떤 말투이건 이상하겠냐마는.
“10년 전에 비해 몸집도 더 커진 것 같아요.”
“부인께서 탄탄한 몸이 좋다고 하시기에, 꾸준히 키웠습니다.”
과거의 나, 잘했다.
로제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아르문트가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나긋하게 물었다.
입가에 묻은 수프를 엄지로 슬며시 닦아내는 손길이 문득 야하게 느껴졌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만져봐도 좋습니다.”
서른넷의 아르문트는 지나치게 섹시하다.
로제타가 또다시 그 사실을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