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변하지 않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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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변하지 않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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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변하지 않는 사실
2022.07.10.
여기서도 했다고?
로제타는 얼굴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만 보였던 마차 내부의 모습이 다시 보니 몹시 야릇하게 보였다.
자신을 놀리고자 농담한 건가, 짧게 고민했지만 그렇다기엔 아르문트의 표정이 너무나 진심이었다.
생각해보니 과거 첫 데이트를 끝내고 궁으로 돌아오는 길, 아르문트가 비슷한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비록 그때는 미수로 끝났으나 결혼 후 기어코 일을 치른 모양이었다.
‘너무 아쉽다!’
그런 소중한 기억이 사라지다니. 내심 아르문트와의 관계를 흡족하게 즐겨왔던 사람으로서 아쉽기 그지없었다.
물론 장소도 준비되었겠다, 아르문트의 것도 의지가 넘쳐흐르겠다, 당장 재현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러기엔 너무 민망했다.
아직 해가 한창인 데다가, 심지어 여행지에는 도착도 안 했는데 벌써 이렇고 저런 짓을 하자니 부끄러움이 밀려드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로제타는 고개를 팩 돌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크흠, 흠! 그나저나 이제 거의 도착해가는 모양이네요!”
괜스레 창밖 너머에 시선을 고정하자 저 멀리 푸른 수면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바다가 가까워진 듯했다.
아르문트의 외모가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는 동안, 마차는 벌써 남부의 작은 바닷가 마을 입구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런, 아쉽군요.”
아르문트는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으며 속삭였다.
단단한 무릎이 그녀의 허벅지를 슬며시 지나쳤다.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다리가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바짝 긴장이 밀려들었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얇은 외투에 가려진 중심부에 제 무릎이 닿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부인.”
입술이 딱 붙어버린 나머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르문트는 그러한 반응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야살스럽게 눈웃음을 쳤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제가 오늘 부인을…… 꽤나 건드릴 텐데.”
몹쓸 짓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갓 스무 살 된 처녀를 바라보는 듯한 눈길에 로제타의 가슴속에서 일순 승부욕이 솟았다.
“제가 말했죠, 회귀한 시간을 다 합치면 전하보다 훨씬 나이 많다고! 무시하지 마요!”
“……뭐,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로제타는 찌릿 눈초리를 보내며 앞으로 그에게 연상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말겠노라 다짐했다. 물론 그리 오래 갈 다짐은 아니었다.
“폐하,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마부가 도착을 알렸다.
로제타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먼저 내려 그녀를 에스코트하려던 아르문트는 거침없이 자신을 지나쳐가는 로제타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며 뒤를 따랐다.
“와아, 바다가 바로 코앞이네요! 호텔도 엄청 예뻐요!”
“부인의 소유입니다. 신혼여행 당시 부인이 워낙 좋아하시기에 구입해두었죠. 오늘은 고객을 받지 않도록 말해두었으니 시선 신경 쓸 것 없이 즐기시면 됩니다.”
이 커다란 부지가 자신의 것이란 말에 로제타가 입을 쩍 벌렸다.
유일한 소드마스터이자 최연소 기사단장으로서 부는 누릴 만큼 누려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위에 또 다른 세계가 있었을 줄이야.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성공의 향기를 힘껏 들이켰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다시 눈을 뜬 로제타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르문트를 올려다보았다.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전하, 우리 그대로 해봐요!”
“그대로라 함은 무엇을……?”
“10년 전, 신혼여행 때 했던 순서 그대로요! 기억도 되살릴 겸, 재밌잖아요. 아, 존댓말도 쓰지 마요! 그때는 안 썼을 거 아니에요. 설마 여행 때도 썼어요?”
“……정확히는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 쓰긴 했습니다만.”
“그럼 지금부터 반말하는 거예요! 시- 작!”
아르문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침묵했다.
여태껏 여유를 부리던 그가 당황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 로제타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정말, 그대로면 되겠습니까?”
“어허, 반말해야죠!”
로제타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러자 그의 단정한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그녀는 그런 얼굴을 보지 못한 척 재빨리 호텔 직원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휴양지 느낌이 물씬 나는 방이었다. 이국적인 태피스트리와 초록빛의 식물로 장식된 내부가 무척 아름다웠다.
기분 좋은 바람에 반투명한 커튼이 이리저리 살랑거렸고, 열린 문 너머로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훤히 보였다.
“와아……!”
로제타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감탄했다. 새삼 여행을 왔다는 게 느껴져 가슴이 벅차올랐다.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은 그녀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뭐부터 할까요? 배고파요? 식사부터 할까요? 아니면 바로 바다부터…… 으앗!”
로제타가 신이 나 조잘거리다 말고 비명을 내질렀다. 아르문트가 느닷없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든 탓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제 몸이 침대 위로 옮겨졌다. 푹신한 질감이 허리에 닿자 로제타는 입술을 뻐끔거리며 설명을 요구했다.
“갑자기 뭐 하는……!”
“그대로 하자면서.”
그래서 그대로 하는 것이다만. 그가 눈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푸른 눈동자가 당혹감과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그제야 그가 왜 자신을 침대 위에 던져놓았는지, 또 왜 갑자기 상의를 거침없이 탈의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무래도 10년 전의 자신은 한시가 급했던 모양이었다.
“밥, 밥은요? 밥도 안 먹고 바로요?”
“말했잖아.”
능숙하게 셔츠 단추를 모두 풀어헤친 아르문트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내 침대에만 있었다고.”
나는 그냥 놀리려고 한 소린 줄 알았지!
로제타가 억울한 마음에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별다른 효과는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 표정이 그를 더 동하게 한 듯 손길만 빨라졌을 뿐이었다.
“잠깐만…… 흐읏!”
다급히 내저은 손이 금세 그에게 잡혔다.
아르문트는 굶주린 짐승처럼 갈급하게 로제타의 입술을 탐했다.
동시에 뜨거운 손길이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은밀한 곳을 부드럽게 지분거리는 손길에 로제타는 재차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신음마저 그의 입술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모든 곳이 짜릿했다. 탄탄한 허벅지가 제 아래를 은근하게 짓누르는 감각도 자극적이기 그지없었다.
생뚱맞게 시작한 행위임에도 금세 그녀의 몸이 녹진해졌다.
세상에. 서른넷의 아르문트는 그냥 섹시하기만 한 게 아니라, 능숙했다.
마치 그녀 자신보다도 그녀의 몸을 꿰고 있는 듯, 손길이 지나칠 때마다 아릿한 쾌감이 터져 흘렀다.
“전하, 흐윽! 잠시만……!”
“전하가 아니라, 아문이라고 해야지.”
아르문트가 벌을 주듯 여린 살을 꼬집었다.
온몸이 찌르르 울리는 쾌감에 가느다란 허리가 크게 들썩였다.
“즐기도록 해, 부인. 적어도 밤까지는 멈출 생각 없으니까.”
그러게 내가 경고했을 때 물러나지 그랬어. 그가 컴컴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다시 집요한 열락이 이어졌다.
***
아르문트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과거처럼 오래도록, 여러 번 관계하지는 못하지 않을까.
로제타는 이렇게 기대했으나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는 10년간 쌓은 관록을 보여주듯 더 오래, 더 능수능란하게 그녀를 자극했다.
쾌감이 너무 과해 울음까지 터뜨렸으나 그의 손길에는 자비가 없었다.
로제타는 어떻게든 상황을 끝맺기 위해 배가 고파 더는 못하겠다며 드러누웠다. 그러나 그는 이를 예상했다는 듯 음식을 주문해 입에 넣어준 뒤 또다시 관계를 이어나갔다.
정말 밤이 다 되고 나서야 그의 마수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진짜 아문은…… 옛날이고 지금이고 미친 것 같아요.”
테라스에 놓인 소파에 앉아 밤바다를 바라보던 로제타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결국 바다 구경은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종일 침대와 욕실을 오가며 사랑을 나눈 탓이었다.
“칭찬 고맙게 받겠습니다, 부인.”
어느새 평소의 말투로 돌아온 아르문트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이런 뻔뻔한 놈이 다 있나. 누구는 지금 허리가 아파 죽겠는데!
그녀는 자신이 기대고 있던 어깨를 확 깨물었다.
제법 아플 텐데도 아르문트는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뭘 좀 가져오겠습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보아하니 따뜻한 음료나 다리를 덮을 담요를 가져올 모양이다.
로제타는 저렇게 다정한 사람이 관계할 때면 왜 짐승으로 돌변할까 고민하며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철썩이는 소리와 함께 파도가 앞뒤로 오갔다.
어쩐지 그 소리와 모양새가 낯설지 않다는 생각에 그녀의 뺨이 또다시 발갛게 달아올랐다.
음흉하기 짝이 없다.
“로제.”
“저 아무 생각 안 했어요!”
제 발 저린 로제타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어라, 그런데 방금 로제라고……?’
시간이 돌아온 뒤로는 잘 듣지 못했던 호칭이었다. 아르문트는 항상 그녀를 부인이라고 불렀으니까.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다가오는 아르문트가 보였다.
이내 고급스러운 모양새의 케이스를 손에 든 그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디 나와 결혼해주겠나?”
케이스가 열리고 드러난 것은 반지가 아닌 목걸이였다. 화려한 디자인은 아니지만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모습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로제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인 후에야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신혼여행 때도…… 청혼을 했었나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아르문트가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부인께서 대답을 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돌아왔다 하시기에.”
아. 로제타가 작게 신음했다.
나른하게 풀려 있던 몸이 점차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감정이 울컥 솟아올라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그녀가 잃어버린 순간이 선물처럼 다시 찾아왔다.
그 사실이 너무나 애틋해 로제타는 파르르 속눈썹을 떨었다.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녀는 감히 아르문트를 가린 것을 벅벅 닦아내고는 환하게 웃음 지었다.
“물론이에요, 아문.”
이번에는 아무 이변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르문트는 수줍은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입을 맞췄고, 곁에 앉아 목걸이를 손수 걸어주었다.
“프러포즈도 성공했으니, 조만간 결혼식을 올리면 되겠군요.”
“네에? ……설마 진짜 다시 식을 올리겠다는 건 아니죠?”
“왜 아닐 거라 생각합니까?”
“어떻게 그래요. 팔불출이라고 온 나라에 다 소문이 날 텐데.”
“기억이 없는 부인께는 죄송하지만 이미 그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라그나르는 물론 이웃 나라에도 널리 알려졌죠.”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렇게까지 소문이 나?
로제타는 추궁하듯 그를 노려보았다. 다만 그 눈빛에서조차 넘실거리는 애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추후 알아보도록 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마음을 읽어낸 아르문트가 또다시 얼굴 위로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지금은 하던 일이나 마저 할까요.”
“……설마 그 ‘하던 일’이…… 제가 생각하는 그 일은 아니죠?”
로제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애정 어린 시선조차 금세 공포로 물들었다.
“이만하면 바다는 충분히 보았잖습니까.”
그리고 아르문트는 여전히 자비 없는 태도로 그녀를 잡아끌었다.
***
몇 주 뒤,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 각각의 나라에서 보낸 사절들이 라그나르의 황궁으로 몰려들었다.
오늘은 커다란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다름 아닌, 황제와 황후의 리마인드 웨딩이.
“리마인드 웨딩이라니, 별 해괴한 행사가 다 있군그래. 라그나르에는 돈이 남아도나?”
“팔불출도 저만한 팔불출이 따로 없지. 에이, 황제란 사람이 남자 망신 한번 다 시키네!”
이렇듯 불만을 토로하는 자도 몇몇 있었으나 그들을 한심한 듯 바라보는 눈길에 곧 입을 다물었다.
손님들은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으며 살구색 장미 사이로 걸음을 내딛는 부부를 바라보았다.
느끼는 바는 각각 달라도 한 가지 감상만은 동일했다.
“정말 행복해 보이는 부부야.”
그 사실만큼은 평생토록 변하지 않을 것이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