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외전. 만약 발레리안이 회귀한다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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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외전. 만약 발레리안이 회귀한다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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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외전. 만약 발레리안이 회귀한다면 (1)
2022.07.14.
어느 날 아침, 평소와 같이 침대에서 눈을 뜬 발레리안은 본능적으로 제 모습이 사뭇 달라졌음을 인지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시간이 과거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아직 소년티가 다 가시지 않은 얼굴. 완벽하게 정돈되지 않은 마나 회로와, 마탑에서 제공해준 넓지만 어두침침한 방의 모습.
모두 다 옛날 그대로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로제타가 그랬던 것처럼 전설 속의 보물에 대고 소원을 빈 것도 아니고, 자신이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느닷없이 시간이 돌아오다니.
심지어 회귀하기 전의 기억이 있는 것은 그만이 유일한 듯했다.
마탑의 마법사들도, 심지어는 로제타도, 미래 일어날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이를 확인하고 나서야 발레리안은 알아차렸다.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로제타가 황제 놈과 결혼한 지도 무려 10년이 넘었다.
둘 사이에는 귀여운 공주님이 태어났고, 발레리안은 라그나르를 수호하는 대마법사이자 로제타의 가장 절친한 친우로서 아이를 축복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그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는 로제타를 사랑했다.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감정을 차마 지우지를 못했다.
그녀가 행복한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제 더러운 욕망은 눌러 감췄다. 장난스러운 미소로 무장한 채 친구라는 이름으로나마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새롭게 얻은 인생에서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번 기회는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
그 길로 발레리안은 마탑에서 나와 메이필드 남작가로 향했다.
지금 그의 나이는 열아홉. 로제타는 열일곱이다.
메이필드 남작 부인이 작고한 지 2년 정도가 지났고, 이 당시 발레리안은 최연소 대마법사로서 마탑에 머무르고 있어 아주 간간이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차후 발레리안은 이 시기를 회고하며 로제타의 곁을 지켜주지 못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 그녀가 이때 메이필드 남작과 세레나 사이에서 외롭고 우울한 나날을 보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즈!”
쾅!
발레리안이 남작가의 대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저택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발레리? 갑자기 여긴 어떻게…….”
열일곱, 어리디어린 나이의 로제타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선 그를 응시했다.
홀로 밥을 먹고 있었는지 테이블 위에는 이가 나간 그릇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묽은 수프가 담긴 그릇. 그것이 다였다.
한창 자랄 나이의 그녀가, 메이필드 남작가의 정당한 계승자인 그녀가. 식사랍시고 먹는 것이 고작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묽은 수프뿐인 것이다.
심지어 옷은 짧아 손목 발목이 훤히 드러났고, 천에는 보풀이 마구 일어나 있었다. 꽤 오래 옷을 새로 맞추지 않았음이 명백했다.
통통해야 마땅할 볼마저 스무 살 적보다 훨씬 홀쭉했다.
이런 처참한 모습이 시야에 담기자 발레리안의 눈이 분노로 뒤집혔다.
“가자.”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 로제타의 손을 잡았다. 투명한 얼음 같은 눈동자가 흉흉하게 번쩍거렸다.
로제타는 눈치 빠르게 그가 화난 이유를 짐작하고 민망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랑 같이 살자, 로즈.”
그녀의 눈이 잘게 일렁거렸다.
그래도 되는 걸까. 나는 메이필드의 딸이고, 이 저택은 우리 가족의 집인데. 어머니와의 추억이 가득한 곳인데…….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단번에 결정을 내리기에 아직 로제타는 어렸고, 미숙했다. 일찍 철이 들었다고는 하나, 그래 봤자 아직 고작 열일곱이었으니까.
“감히 어딜 간단 말이야!”
소란을 듣고 찾아온 메이필드 남작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댔다.
옆에는 열다섯 살의 셀레나가 고개를 삐죽 내밀고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거지가 우리 집엔 웬일이래?”
“험, 험! 너…… 아니, 대마법사. 어찌 이렇게 막무가내로 남의 집에 들어올 수가 있소! 어려서 모르나 본데, 주거침입이 얼마나 큰 범죄인 줄 아시오?”
메이필드 남작은 재빨리 셀레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앞의 청년은 이제 그가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은근슬쩍 반말을 써서 기선제압을 해볼까, 짧게 고민했으나 발레리안의 커다란 키와 서슬 퍼런 눈빛을 보곤 급하게 말투를 바꿔 존대했다.
다만 스무 살도 채 안 된 놈에게 겁을 집어먹었다는 사실이 창피해 괜히 으름장을 놓는 그였다.
“게다가 우리 소중한 딸을 데려가겠다니! 이건 명백한 납치요!”
메이필드 남작이 씩씩거리며 소리치자 발레리안의 얼굴은 더욱 서늘해졌다.
마음만 같아선 당장 멱을 따주고 싶었으나, 어린 로제타의 앞에서 그럴 수는 없다.
“그리도 소중한 딸에게 저딴 걸 먹입니까?”
살기등등한 눈빛이 메이필드 남작과 셀레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셀레나가 입은 옷은 로제타의 것과 달리 추위를 충분히 막아줄 만큼 도톰했고, 기장도 딱 맞아떨어졌다.
메이필드 남작의 차림새야 말할 것도 없이 화려했고 말이다.
“이런 겨울날, 저렇게 작고 얇은 옷을 입게 두고요?”
발레리안의 팔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살기를 억눌러야 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상황을 인지한 메이필드 남작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했다.
“크흠. 그러게 아까 우리 식사할 때 같이 하지 그랬니, 로제타. 대마법사가 괜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말이야. 옷도 왜 셀레나처럼 알아서 못 맞춰 입고…….”
메이필드 남작은 식사자리에 그녀를 부른 적이 없다. 새 옷을 살 예산도 배정해주지 않았다. 자꾸 쓸데없이 검술에 관심을 보이는 그녀에게 버릇을 제대로 들이겠다는 이유로.
로제타는 그제야 깨달았다.
눈앞의 사람들은 제 가족이 아니며, 어머니가 없는 지금, 더 이상 이 저택을 집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넌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야.”
발레리안이 그녀의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우습게도 그녀보다도 더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선.
“같이 가자, 로즈.”
로제타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이를 목격한 메이필드 남작은 또다시 길길이 날뛰었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가기는 어딜 가! 대마법사, 우리 딸을 놓지 않으면 내 당장 그대를 고발할……!”
“그러십시오.”
발레리안이 제 겉옷을 로제타에게 둘러주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고용한 사람이 과연 마탑의 법무 부서를 이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
“참고로 정당히 로제타가 받아야 할 재산도 조만간 그를 통해 되찾아올 예정이니, 얼른 사람부터 구해두는 게 나을 겁니다.”
마탑의 법무 부서는 제국에서 가장 유능하다 칭해도 좋을 집단이다. 워낙 뒤처리할 것이 많은 데다, 황실의 요구에도 적절히 대응해야 하기에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제일 뛰어난 이들로만 선발해온 까닭이다.
없는 죄도 몇 분이면 만들어낼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상대로 지방의 조그마한 남작가가 승소할 수 있을 리 없다.
메이필드 남작도 이내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자, 잠깐, 대마법사 님. 제 말 좀……!”
그는 다급히 발레리안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했으나 헛손질만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발레리안과 로제타가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버렸다. 이동 마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한동안 메이필드 저택에는 남작의 괴성이 맴돌았다.
그러나 그건 로제타가 염려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새로운 가족을 찾았으니까.
***
그 뒤로 둘은 발레리안이 마련한 타운하우스에서 살게 되었다.
아직 그리 많은 돈을 벌어두지 못한 탓에 이전 생에 소유했던 집만큼 크고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둘이서 지내기에는 충분했다.
금세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남작가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행복한 나날이였다.
로제타는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었으며, 좋아하는 검술을 마음껏 수련할 수 있었다. 홀쭉했던 볼에는 살이 통통하게 차올랐고, 영양부족으로 잘 크지 않았던 키는 쑥쑥 자랐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도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구원자, 발레리안이 종종 낯선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그녀에게 웃어주다가도, 굉장히 어른스러운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 때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도 했다.
한번은 수련을 마친 로제타가 발레리안 앞에서 땀에 전 옷을 훌렁훌렁 벗었던 적이 있었다.
어차피 안에 내의도 입었겠다, 또 그와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겠다. 발레리안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미처 상의를 다 벗기도 전, 그의 로브가 거칠게 머리를 덮었다.
“으악, 뭐야!”
로제타는 시답잖은 장난이라 생각하여 얼굴을 내밀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시야에 담긴 것은 몹시 화가 난 듯한 발레리안의 얼굴이었다.
“당장 입어.”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로제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멍하니 굳어 있자, 발레리안은 눈썹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그녀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쩐지 흩날리는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가가 붉은 듯도 했다.
‘하긴, 아무리 소꿉친구라도 성별이 다르고. 게다가 이제 둘 다 성인이니까.’
발레리안도 남자구나.
새삼 떠오른 생각에 피부가 빳빳해졌다. 여태껏 가족으로만 생각했던 그를 이성으로서 인식하니 괜스레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에이, 남자는 무슨. 그냥 남자 형제지, 뭐.’
로제타가 고개를 양옆으로 붕붕 흔들었다.
그러나 한번 인식하기 시작하자 그 뒤로는 비슷한 상황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어느 날 아침, 잠이 덜 깬 채로 욕실 문을 연 로제타는 자신과 전혀 다른 생김새의 몸과 마주하고 말았다.
뚝, 뚝. 근육이 선명하게 박인 피부를 타고 투명한 물이 흘러내렸다.
막 목욕을 마친 발레리안이 허리에 수건만 두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남자의 몸을 이렇게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다.
아니, 이렇게 완벽한 몸을 본 것은 정말이지 처음이다.
로제타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노크해야지, 로즈.”
피식, 가볍게 웃음을 흘린 그가 로제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는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무척 관능적이었다.
쿵. 문이 닫히고 욕실에 홀로 남은 로제타는 여전히 얼음처럼 굳은 상태로 방금 자신이 보았던 반나체를 떠올렸다.
분명 수건을 두르고 있었는데도 굴곡이 선명했다.
진짜 남자다.
그녀가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생각했다.
그러나 몇 초 뒤, 다시금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내 남자 형제가 몸이 참 바람직하구나. 거, 앞으로 여자 여럿 울리겠다, 하하. 하하하!’
그녀는 필사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욕실이 하나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생긴 사고였다고 말이다.
고작 그것뿐이라기엔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댔지만, 로제타는 최선을 다해 모른 척했다.
다만 그다음에 터진 일은 그녀조차도 차마 모른 척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제타가 스무 살이 되고, 황궁 기사단에 입단한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난 어느 날.
늦은 오후 느닷없이 쏟아지는 비에 로제타는 그나마 친한 동료에게 뒷정리를 대신 부탁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빨리 들어가야지. 발레리는 비 오는 날을 무서워하니까.’
그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사 들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제법 가벼웠다.
발레리안을 놀라게 해주겠다는 일념 하에 기척을 죽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문단속을 깜빡했는지 대문은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덕분에 잠입하는 건 쉬웠지만 앞으로는 더 신경 써야겠다 싶었다.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그의 방문 앞에 다다랐다.
그러나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히려는 순간.
그녀의 예민한 청각이 낯선 소리를 잡아챘다.
무언가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 어딘가 질척거리는 듯한…….
“큿, 하아…….”
그리고 신음.
저건 정말, 의심할 여지도 없이.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