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외전. 만약 발레리안이 회귀한다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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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외전. 만약 발레리안이 회귀한다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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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외전. 만약 발레리안이 회귀한다면 (2)
2022.07.17.
로제타의 몸이 꽝꽝 언 얼음처럼 단단히 굳었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문을 응시했다.
방음이 잘 안 되는 나무문 너머로는 발레리안이 뜨거운 숨결을 내뱉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러니까 지금.
지금 발레리안이…….
화악!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푸른 눈동자는 정처 없이 흔들렸고, 도톰한 아랫입술도 파르르 떨렸다.
문이 닫혀 있어 그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지막한 신음을 들은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제 소꿉친구이자 가족인 발레리안이 이럴 줄이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그, 그럴 수도 있지. 발레리는 다 큰 남자고, 나쁜 행동도 아니고! 그냥 건강하게 성욕을 해소하는 방식이니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야. 실제로 발레리는 내가 집에 없는 줄 알고 있으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에는 딱 알맞은 타이밍이지.
로제타는 최선을 다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만 어쩐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낯이 더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엄한 상상이 떠오르려는 것을 애써 자제하며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일단은 자리를 피하는 게 급선무였다. 지금 그에게 제 존재를 들키는 것만큼 민망한 상황이 따로 없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한 시간 정도 뒤에 들어오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관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려는 찰나,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잡아챘다.
“큿, 로즈…….”
쿵. 심장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잘못 들은 거야. 빗소리 때문에 이상하게 들린 걸 거야.
로제타는 이렇게 합리화했으나, 발레리안은 그런 그녀의 믿음을 빠르게도 박살 냈다.
짙디짙은 욕정이 들끓는 목소리가 또다시 이어진 까닭이었다.
“로즈, 하…….”
질척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행위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온 피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다급히 현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타다닥! 타탁!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러자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던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발레리안은 로제타의 손수건으로 제 손을 느릿하게 닦아냈다.
회귀 전의 기억을 통해 더욱 빠르게 마법의 경지에 다다른 그는 로제타보다 훨씬 강했다.
그 말인즉슨, 조금 전 로제타가 제 방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쯤은 진작에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품은 마음을 파악할 수 있도록, 일부러.
2년간의 동거 생활 동안 발레리안은 그녀에게 제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로제타가 너무 어리기도 하고, 달리 갈 곳 없는 그녀에게 호감 표시를 하는 것은 그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행위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로제타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고, 황실 기사로 일하며 일정한 수입도 생겼다.
이는 즉, 만약 로제타가 발레리안의 마음이 부담스럽고 싫을 경우 이 집을 나갈 수 있는 선택지가 생겼음을 뜻했다. 그것은 분명 큰 차이였다.
그리하여 이제 발레리안은 지금껏 억제해왔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기로 했다.
그에 대해 로제타가 무슨 결정을 하는지는 오로지 그녀에게 달려 있다.
‘로즈, 과연 넌 어떤 선택을 할까.’
발레리안은 낡은 나무문을 응시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
다음날 새벽.
동이 제대로 트기도 전 일어난 로제타는 빠르게 나갈 준비를 마친 뒤 슬금슬금 거실로 나왔다. 목적은 발레리안과 마주하지 않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일은 그녀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벌써 나가?”
“히약!”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로제타가 비명을 꽥 내질렀다.
주방 쪽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 발레리안을 발견함과 동시에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거칠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던 그 장면이 말이다.
“거, 거기서 뭐 해?”
“보다시피, 커피 마셔. 오늘따라 일찍 눈이 떠져서.”
왜 하필 오늘 일찍 일어나고 난리야!
로제타가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었다.
“너는, 왜 벌써 나가?”
“그, 오늘 아침 수련이 있어서! 얼른 나가봐야 해.”
“아침 수련도 여섯 시는 돼야 시작하지 않아? 지금 네 시 반인데.”
“나는 막내니까! 미리 가서 이것저것 준비해야지. 귀찮아 죽겠네, 하하…….”
그녀는 피곤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태도에 발레리안 또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나는 오늘 일 없는데, 점심에 도시락 가져다줄까?”
“아니! 괜찮아! 너무 바빠서 점심 먹을 시간도 없어. 그, 아무래도 소문이 나면 좀 곤란해질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소문.”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치는 로제타를 향해 발레리안이 나지막이 되물었다.
“나랑 동거한다는 소문?”
동거.
맞는 말이긴 한데 어제 그런 상황을 겪고 나니 어감이 전혀 다르게 들렸다.
로제타의 얼굴이 점점 더 새빨개졌다. 그녀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잠시 입술만 뻐끔거렸다.
“어, 어쨌든 난 이만 가볼게! 늦겠다!”
로제타가 허둥지둥 짐을 챙겨 발레리안을 지나쳤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눈치 빠른 그에게 제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들키고 말 테다.
발레리안은 그녀를 더 붙잡지 않고 느긋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인 로제타가 귀여워 더 짓궂게 굴고 싶었지만 자제했다. 아직 그녀에게 시간이 더 필요하리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발레리안과 눈길이 닿기라도 하면 로제타는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도망을 쳤고, 최대한 일찍 나가서 늦게 귀가했다. 그와 마주하는 상황을 부단히도 피하는 것이었다.
‘들어올 때까지 소파에서 기다릴까.’
그렇게 해서라도 얼굴을 볼까.
한참 고민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랬다가 로제타의 귀가 시간이 더 늦어지면 위험하니까. 아예 외박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그러나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발레리안의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져 갔다.
내가 너무 일렀던 걸까. 괜히 그런 식으로 마음을 드러냈나.
냉기가 감도는 거실을 바라보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후회와 걱정 속에 마음을 졸이던 어느 날이었다.
“발레리, 나 오늘 회식 있어!”
출근 준비를 하던 로제타가 느닷없이 말했다. 여전히 발레리안과 제대로 시선을 마주할 자신은 없어, 괜스레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회식?”
“응. 신입 기사 환영회 겸해서. 아마 늦게 들어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자.”
로제타가 입단한 지가 벌써 한 달이 다 돼 가는데, 무슨 환영회를 이제 와서 한단 말인가.
혹 머저리 같은 사내놈들이 그녀에게 헛짓거리를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짜증이 울컥 솟았지만 발레리안은 능숙하게 제 감정을 감췄다.
“그래, 잘 다녀와.”
“응!”
“그런데 로즈.”
현관문을 나서려던 로제타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곧 사르르 눈웃음을 짓는 그를 발견하고는 또다시 눈을 다른 쪽으로 데구루루 굴렸다.
“기사단 회식은 어디에서 해?”
그냥, 궁금해서. 발레리안이 입가에 짙은 미소를 걸친 채 덧붙였다.
***
요즘 들어 로제타는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장담하건대 아버지인 메이필드 남작이 뜬금없이 네 여동생이라며 셀레나를 데려왔을 때도 이렇게까지 당혹스럽진 않았던 것 같다.
발레리안이 날 좋아한다니.
날 떠올리며…… 그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발레리안은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인데. 어떻게 그와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바뀔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더 말도 안 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으니-.
‘아까 웃는 거 좀 멋있었지…….’
자신마저 발레리안을 이성으로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를 마주하기만 하면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날 밤, 그런 장면을 목격해버린 게 문제였나.
아니, 생각해보면 그전에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욕실에서 마주쳤을 때도, 함께 저녁을 먹던 중 자신을 향해 다정하게 미소짓는 그를 보았을 때도, 장난을 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마주 잡았을 때도…….
로제타는 발레리안에게 설렜다.
‘미쳤어, 미쳤다고!’
쾅, 쾅! 그녀가 술집 화장실 벽에 연신 이마를 박았다. 다소 힘이 강했는지 벽에 금이 생기고 말았다.
무슨 벽을 이렇게 부실하게 지어놨어?
로제타는 제힘을 생각하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술이 제법 오른 탓에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현재 그녀는 기사단원들과 함께 회식 자리에 나와 있었다.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한 병 두 병 마시다 보니 어느새 밤은 저물었고 그녀는 얼큰하게 취해버렸다.
‘어우, 남은 술만 비우고 슬슬 집에 가야겠다.’
로제타는 이렇게 생각하며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일인지 오 분 전만 해도 복작복작하던 테이블이 허전했다. 자리에 있는 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선배 기사 한 명이 유일했다.
“줄리안 경. 다들 어디 가셨나요?”
“아, 먼저 갔어. 펠릭스 놈도 그렇고, 에바도 그렇고 너무 취해서.”
하긴, 많이 마시긴 했지. 시간도 늦었고.
로제타는 자신도 귀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선배, 줄리안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까우니 우리는 이 병만 마저 비우고 일어나자.”
“아, 저는…….”
“그보다 로제타. 너 요즘 고민이라도 있어?”
일순 그녀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다시금 발레리안이 떠오른 탓이었다.
“……네?”
“어쩐지 요즘 표정이 안 좋아서. 고민이 있는 것 같길래. 아니야?”
줄리안이 그녀를 자연스럽게 옆자리로 이끌었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 앉은 로제타는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선배는 검술 실력은 별로여도 연애 관련 상담 실력은 최고라고 들었다. 연애 횟수만 총 스무 번이 넘는다나 뭐라나.
‘나도 상담을 받아볼까?’
연애 경험이 전무한 그녀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야 그에게 상담받는 것이 나을 테다. 어쩌면 속 시원한 방법을 가르쳐줄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나 어쩐지 발레리안과의 관계에 대해 낯선 이의 조언을 받는 것이 썩 달갑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별로 고민 없어요. 그냥 어떻게 해야 검을 더 잘 다룰 수 있을까가 고민이죠, 뭐.”
“에이, 여자치고 그 정도면 대단하지. 뭘 더 하려고 그래?”
여자치고.
로제타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 하나였다.
제 뒷배만 믿고 매일 수련도 게을리하는 놈이 평가질이라니, 같잖기 짝이 없다.
이런 놈에게 무슨 상담을 받겠다고. 그녀는 짧게 자조하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시간이 늦었으니 저도 이만 가볼게요.”
“어어, 잠깐!”
덥석!
줄리안이 로제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 쥐었다.
“어허이, 선배가 아직 앉아있는데 어딜 가려고! 이것만 비우고 가자니까.”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를 잡아끌었다. 물론 약하기 짝이 없는 놈이기에 로제타의 몸은 전혀 끌려가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것.
짜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다른 기사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
은근히 몸을 치대오는 행동까지.
이제야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었다.
‘이 새끼를 어떻게 할까…….’
손목을 분질러 놓을까. 아니면 그냥 기절시킬까.
로제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민했다.
그때였다.
은은한 꽃향기가 콧가를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누군가 줄리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로즈.”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회식이라더니…… 이런 놈이랑 놀고 있었어?”
발레리안이 그녀의 손목에서 줄리안의 손을 떼어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줄리안의 비명을 뒤로하고, 로제타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현재 발레리안이 몹시 화가 났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