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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흠흠~”
김명석은 오랜만에 고급 수트를 차려입었다.
가디언 남양주 지부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키야···어떻게 연락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먼저 연락이 올 줄이야?”
명함을 슬쩍 찔러주길 잘했다. 대놓고 준 조공의 덕도 컸다. 과거에 쌓은 작은 명분들이 시혁에게로 하여금 김명석에게 연락이 닿게 한 작은 눈덩이가 되었다.
“그런데···이곳 맞겠지?”
상호명이 아니라 불러준 주소로 왔기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 최고봉 라면.
“남양주 지부 근처에 이런 데가 있었나?”
잘 오지 않고, 후미진 골목에 위치해서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진짜 이곳이 맞는 건가?
하지만 의심할 수가 없는 것이, 분식집 안쪽 와글와글한 사람들 사이에 김명석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 앉아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맛있습니다. 매운 거 못 드시면 순한맛에 파랑 계란 추가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장님이 계란을 풀고 면을 다시 집어넣으시네요. 배우신 분입니다.”
시혁은 이미 라면을 종류별로 3그릇째 비운 상태였다.
“얾······.”
* * *
시혁과 명석은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둘의 배는 빵빵하게 불러 있었다.
“흐으···2그릇을 비우다니. 라면을 이렇게 과식한 건 처음입니다.”
“가디언 지부에 이런 맛있는 곳이 있는데 처음 와 보셨다니 놀랍습니다.”
“허허허허. 그러게요. 아무래도 본부에 더 많이 있다 보니 이런 귀한 곳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 지나갔다.
대부분 그간 어떻게 지냈냐 하는 식의 이야기였다.
“20만원 덕분에 조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줄 수 있었습니다. 뒷주머니에 20만원이 없었더라면 조카에게 위신이 서지 않을 뻔했어요.”
“···아. 제 돈이 그렇게 쓰였군요? 이거 참···뿌듯해지는데요?”
“제 은인이십니다.”
“하하하하. 저희야말로 너무 감사하죠. 귀환자님이 그곳을 철통같이 지켜주신 덕분에 아무도 죽지 않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젠 귀환자가 아닙니다. 혹시 협회에서 절 아직 제명하지 않은 겁니까?”
“아뇨. 제명되셨습니다.”
얼마 전, 한국 귀환자 협회에서 시혁이 탈퇴 되었다는 공문이 왔다.
특이점은 분명히 있었다.
제명이 아니라 탈퇴라는 것이 첫 번째 특이점이었고, 아무 첨언도 없었다는 것이 두 번째 특이점이었다.
원래 한귀협은 탈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제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 사유 역시 장황하기 그지없다.
탈퇴 된 정옥자만 해도 귀환자들의 공익에 나서지 않았다는 메시지만이 담긴 A4용지 3장에 달하는 장문의 비아냥과 그것을 강화하는 미사여구 덩어리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한귀협은 시혁이 탈퇴 되었다고만 말했을 뿐 그 이유와 설명을, 본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비아냥을 단 하나도 넣지 않고 담백한 한 마디만을 다른 단체에 알렸던 것이다.
한귀협이 알아서 사리거나 말거나, 탈퇴 되었다는 말에 시혁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다행입니다.”
‘···허허. 도대체 무슨 일이 그 안에서 일어났는지······.’
인간인 이상 이 부분이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농담으로라도 묻지 않았다.
화기애애한 대화는 이어진다.
분위기가 적당히 말랑말랑해졌다.
이쯤 되자 김명석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묻고 싶은 말을 꾹 참고 대화를 이어 나가자니 진심이 되고 싶은 이 자리가 점점 불편해진다.
“저···가디언에 소속될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 말에 시혁이 싱긋 웃었다.
저 웃음은 긍정의 뜻일까, 정중한 거절의 뜻일까?
“전 어디에 소속될 생각이 없습니다.”
“아······.”
김명석의 입에서 깊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흡사 나라를 잃은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본 시혁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뿜을 뻔했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웃음이 앞선다.
“아니, 그 정도로 아쉬우세요?”
“개인적으로···네. 너무 아쉽군요. 이유라도 알 수 있을까요?”
헛기침을 한 시혁이 진솔하게 대답했다.
“전 이제 막 귀환자 협회에서 나온 상황입니다. 쉬고 싶습니다. 가족들과의 시간도 지금처럼 많이 보내고 싶고, 혹시 모를 위험한 일에서도 지켜주고 싶습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서 소속감을 가져야 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시혁의 정중한 거절에 김명석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기보단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저희 가디언은 그 어떤 이들의 습격이나 그 밖의 위기 상황에도 귀환자···아니, 시혁씨와 가족을 보호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돈도, 조건도.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맞출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 말에 시혁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지금 저에겐 큰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조건 역시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제 가족은 제가 지킵니다.”
그것은 김명석에게 말한 게 아닌, 시혁 자신에게 한 다짐이기도 했다.
그것이 굳이 김명석에게 고맙다는 말만을 전해도 되는 자리에 자신의 부탁을 끼워넣는 이유였다.
“하하···혹시 제가 주제 넘었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말씀은 너무 감사하죠.”
“하하······.”
김명석에게선 절실함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 말에 김명석은 입을 다물었다.
다음 순간 내뱉어질 말이 이 상황을 좌우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나는 왜 이 사람에게 끌릴까?’
300년차 귀환자라 앞으로 출몰한 몬스터에 대해 잘 알 것 같아서?
그게 아니면 S급이 예상되는 무력 때문에?
물론 둘 다 이유가 될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혁의 질문을 듣고, 김명석은 저런 조건만 가지고 정시혁이라는 사람이 탐이 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시혁씨는 300년을 그곳에서 살다 오셨지요. 그곳이 연 대륙인지, 에드가라트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전 귀환자가 아니니까요. 다만 저는 이렇게 오래 살다 온 귀환자가 되돌아와서 가족부터 찾고, 그 가족을 소중히 지키고, 지나가다 생긴 균열을 목숨 바쳐 지키는 경우를 정말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시혁의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는 것은 눈앞의 남자가 하는 말이 모두 다 진심에서 우러나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했을 뿐입니다.”
“그게 당연하지 않게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지 뭡니까.”
김명석의 자조 섞인 미소에 시혁 역시 같은 미소로 화답했다.
돌아오자 마자 몬스터가 창궐해 있고, 협회에서 기 싸움을 걸어 오고, 암습을 당해서 가족이 위험해지고···지금 이 순간 김명석의 말을 가장 격하게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시혁일 테니까.
“하지만 거절을 해야 할 것 같군요.”
“하하···그렇군요.”
오히려 김명석의 표정은 후련했다. ‘졌지만 잘 싸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한각협에서는 연락이 왔나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와도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까. 그건 좀 위안이 되는 말이군요. 하나만 확실하게 듣고 싶습니다.”
서글서글하던 김명석의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나중엔, 기회가 있을까요?”
시혁이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글쎄요. 사람 사는 일은 모르니까요.”
“그거면 됐습니다.”
그렇게 관계 정리가 끝났다.
이제 시혁이 궁금한 것을 물을 차례였다.
“사실 제가 김명석 본부장님을 찾은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아. 예! 뭐든 말씀하시죠. 저도 어떤 것 때문인지 궁금하던 참입니다.”
김명석의 말에 시혁의 눈동자가 차분해졌다.
“얼마 전, 제 여동생이 괴한들에게 습격받았습니다.”
“······!”
김명석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몇 분 전에 시혁씨의 가족을 지켜 드리겠다 약속드렸던 사람이라···허, 이거 참 면목이 없군요.”
“탓하려고 물어본 게 아닙니다. 그자들을 만나고 싶어서 물어본 겁니다. 아직 가디언에서 잡아두고 있을까요?”
김명석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겁니다. 아마 남양주 지부에···아아, 그래서 이곳에서 보자고 한 겁니까?”
시혁의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제가 그들을 좀 볼 수 있을까요?”
* * *
흑곡을 인터넷에 쳐보면 당연히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빌런들이 그렇다.
흑곡 역시 그런 빌런들의 조직 중 하나였다.
청부살인에서부터 인신매매까지 돈이 되는 건 전부 하는 집단.
쌍둥이 녀석은 그런 흑곡에 의뢰하여 자신과 가족을 위협했다.
자신을 덮친 전력은 B급 빌런 5명.
비슷한 전력이 시아와 창익, 그리고 단비를 덮쳤다.
만약 시혁이 호랑이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때문에 지워버릴 생각이었다.
개인적인 분노도,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서도 이게 맞았다.
‘한 명 정도는 살려둬도 괜찮긴 했을 텐데.’
시혁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든 녀석을 태웠다.
흔적을 남겨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흑곡을 캐낼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 두 명의 빌런들이 아직 남양주 지부에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
“저···아무리 시혁씨라도 이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하시면 곤란합니다.”
시혁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제가 그들을 죽이려는 거겠습니까? 그저 얼굴을 보고싶을 뿐입니다. 제 여동생에게 위해를 가하려던 놈들을. 그리고 그 목적을 묻고 싶군요.”
그 말에, 김명석이 한숨을 푹 내쉰다.
“아마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녀석들의 몰골이 정말 말이 아니거든요. 참으로 대단하신 여동생분을 두셨습니다. 듀얼 클래스는 정말 드문 케이스이죠.”
그 말에 시혁이 피식 웃었다. 며칠 전, 호랑이 기운(?)을 숨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가족회의를 열었다.
비공개로 놔두면 비장의 한 수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공개하게 두면 호랑이 기운까지 상정하고 습격이 올지 몰랐다.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굳이’ 숨기지 말자는 거였다.
이유인즉슨······.
- 아니, 연봉이 올라갈 기회인데 왜 숨겨?
- 맞아. 이렇게 된 거 적극적으로 활용해야지!
호랑이 기운을 사용하면 C급이던 정시아도 B급이던 김창익도 A급의 힘을 발휘한다.
받을 수 있는 연봉 역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애초에 남양주 미친개 정시아는 그렇게 행동하기도 했다.
빌런들을 제압하고, 직접 전화를 걸어서 신고했으니까.
머지않아 자격심사를 받으면 정시아는 C급 힐러이자 A급 속성딜러라는 화려한 스펙의 소유자가 되겠지.
그걸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녀석들. 걱정하는 사람 속도 생각 안 하고 막 지르긴.’
그럼에도 기분이 좋은 이유는, 녀석들이 벌벌 떨며 자신을 원망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호랑이 기운을 오래 사용하다 보면 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어느 정도 기운이 충전되는 경지에 오른다는 걸 알려주고 부터는 눈에 불을 켜고 호랑이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기를 쓰는 모습에 나름 뿌듯하기까지 했다.
시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김명석이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취조실이었다.
“제가 보고듣기론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동생분을 공격한 목적도, 소속이 어디인지도 모르죠. 정신방벽에 락이 걸려있다고 하더군요.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빌런집단의 우두머리들이 흔하게 가지고 있는 특성입니다.”
그 말에 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한 놈들인가 보네요.”
“예. 괜히 속 터지실까 봐 미리 말씀드린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김명석이 문을 열어주었다.
“20분···오래는 못 드립니다.”
“그것보다 먼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시혁은 김명석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사실상 김명석은 시혁의 부탁 때문에 직권을 남용한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혁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뒤를 돌자, 온몸에 3도 이상의 화상이 생긴 두 남자가 시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미한 웃음을 머금고 있기까지 하다.
츠츠츠츠.
시혁의 몸에 호랑이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두 빌런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 떠졌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들을 제압하고 태우던 정시아와 같은 불길을. 아니, 훨씬 선명한 불길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흑곡인 것을 알고 있다.”
그 말에 커진 둘의 눈이 더더욱 커진다.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지만, 조금 전처럼 여유를 부리진 못하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의 눈이, 호랑이의 직감이 두 놈이 흑곡과 관련되어 있음을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거만 알면 되었다.
“앞으로 입도 벙끗하지 마라. 너희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시혁의 검지에서 푸른 기운으로 이루어진 30센티의 장침이 솟아올랐다.
푸욱!
그것이 한 빌런의 정수리를 뚫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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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곡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