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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73년 하고도 112일차.
정말 오랜만에 석영이의 꿈을 꿨다.
석영이와 오늘부터 1일! 하게 된 그날의 꿈이었다.
3년 전 서울 숲으로 이사 갔던 석영이가 시아를 통해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보고 싶다나 뭐라나.
난 없는 돈에 양복을 차려입고 3년 만에 석영이를 만나러 갔다.
석영이는 내 기억보다, 상상보다 훨씬 예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날은 석영이의 생일이기도 했다.
스무 살의 생일.
본인은 이제 어엿한 성인이라며 술을 마시자고 했고, 나는 그게 귀여워서 한 잔 두 잔 같이 마시게 되었다.
술 먹는 도중 부랴부랴 달려가 없는 돈에 향수와 장미를 사서 건네 주기도 했다.
석영이는 환하게 웃었고, 뛸 듯이 기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자 향수였는데, 한 1년 동안 나와 석영이는 그것만 뿌리고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인적이 드문 밤까지 취하게 마시고 들었던 말.
- 나 라면 먹고 갈래!
난 정말 그게 라면을 먹고 가자는 소리인 줄 알았다.
집으로 들어가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라면 레시피를 자랑할 생각에 상당히 들떠 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석영이의 라면 먹고 간다는 말은 진짜 라면이 아니었고, 답답했던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 침대 위로 밀었다.
- 나 이제 성인이라니까, 오빠?
- 그, 그래. 축하한다니까? 어, 어어···?
난 그때 처음으로 여인의 몸을 취했다.
내 나이 23세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꿈을 꾸는 도중 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 이게 무슨 개소리지?
그래. 분명 그날 난 석영이와 1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속속들이 안 건 그날 이후로도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후다.
물론 꿈이기 때문에 사실과 다를 수는 있다.
1일이 되었을 때 석영이가 날 덮칠 수도 있겠지.
꿈이니까.
그런데 이게 정말 꿈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서야 꿈을 꾸기 전 상황이 기억나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꿈을 꾸기 직전, 난 숲길을 걷던 중이었다.
그다음 순간 석영이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걷던 중에 갑자기 꿈을 꾼다는 건 뭔가 이상하다.
백번 양보해서 그게 가능하다 해도 깨어나 상황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부터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척추 쪽이 찌릿해졌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고, 점점 죽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두웠다.
눈앞에 석영이가 있는데 왜 어둡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왜 눈을 떠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가까스로 눈을 떴다.
갈색의 숲이 보였고, 난 엎어진 채로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어린아이 크기의 푸른 모기가 내 등골에 침을 박아넣은 것이 보였다. 녀석의 꽁무니는 생수통만큼 빵빵해진 채 지금 이 순간에도 거대해지고 있었다.
모기의 홑눈에 비친 수십 개의 내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빨렸다. 그렇다면 이대로 죽는 것일까?
가족을. 석영이를 보기 전까진 절대로,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마음. 그게 나를 살렸다.
움직일 순 없었지만, 호랑이 기운을 발현할 수는 있었다.
호랑이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온몸에 황금빛 불이 붙었다. 그것에 노출된 모기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기운에 몸이 노출된 모기는 늪에 빠진 듯 날개를 움직이지 못했고, 그대로 화형당했다.
정신을 잃고, 다시 그 정신을 되찾았을 땐 눈앞에 거대 모기의 사체가 있었다.
솔직히 먹기 싫었다.
먹어 봤자 피 빠는 능력이나 얻을 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도 싶었다.
내가 이 거대한, 갑각류라 해도 믿을 곤충을 먹은 이유는 오로지 체력 보충을 하기 위해.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후우, 피를 빠는 능력을 얻게 될 거라니?
뱀파이어도 아니고 우울하기 그지없다.
아마 이후에 능력을 얻어도 좀처럼 사용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 *
다행히 푸른 모기에게 얻은 능력은 피를 빠는 능력이 아니었다.
원하는 꿈을 꾸게 하는 능력도 아니었다.
짐승의 머릿속에서 오감의 정보를 끄집어내는 능력이었다.
그렇게 뽑아낸 정보는 상당히 유용한 것이었다.
새의 머리에선 주변의 지형을, 맹수의 머리에선 다른 맹수의 정보와 물이 있는 장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을 인간에게 사용하는 건 처음이군.’
“···끄, 끄, 어어···어···!”
손가락 끝에서 나온 푸른 기운이 빌런의 정수리를 꿰뚫는 순간, 시혁은 녀석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뜬 순간 보인 것은 적당히 넓고 얇은 웅덩이였다.
웅덩이 아래는 검은 자갈과 하얀 자갈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그 아래에 깔린 자갈 중 흑곡의 정보가 달린 자갈을 찾아내는 것이 시혁의 일이었다.
시혁이 물 밑 자갈을 들어서 느꼈다.
좋아하는 음식에서부터 취향, 온갖 더러운 일들과 행위들. 자라 온 불우한 환경들까지 느껴졌다.
시혁은 그곳을 누비며 원하는 정보를 찾아 헤맸다. 그가 걸을수록 흙이 일어나며 가뜩이나 탁하던 물이 더욱 혼탁해졌지만 그것은 시혁이 알 바가 아니었다.
‘찾았군.’
흑곡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한 번 찾은 정보의 주변엔 똑같은 정보가 몰리기 마련.
시혁은 그것들을 전부 들어서 터뜨렸다.
터진 결과물이 가루가 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시혁은 빌런의 머리에서 파란 기운을 뽑아냈다.
당한 빌런은 이미 눈을 까뒤집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모든 것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또 다른 빌런의 눈동자가 공포로 절여졌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왜···왜 저 녀석이 저렇게 됐···끄어어억!”
시혁의 손가락 끝 푸른 장침이 말하던 빌런의 정수리에 박힌다.
“너희는 말할 필요가 없다.”
또다시 머릿속 정보 찾기가 시작되었다.
헤집고, 헤집고, 또 헤집었다. 가뜩이나 탁하던 머릿속 웅덩이가 시커멓게 변했다.
이들은 십중팔구 백치가 될 것이지만,
그것은 시혁이 알 바가 아니었다.
* * *
끄억. 으어어억!
“으음···.”
문 앞에서 빌런들의 신음이 들려 온다. 하지만 굳이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해코지 하지 않겠다는 시혁의 말을 믿기로 했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그렇게 흘렀을까?
끼익 소리와 함께 시혁이 취조실 밖으로 나왔다.
“어···용무는 다 끝나셨나요?”
시혁의 입가에 방긋 미소가 그려졌다.
“입도 벙끗하지 않더군요.”
“아······.”
그렇다면 그 신음도 이해가 된다. 김명석 같아도 가족을 해코지한 이들이 묻는 말에 닥치고 있으면 작은 무력정돈 사용했을 테니까.
“후련하십니까?”
“아직 후련하려면 먼 것 같습니다. 다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거면 되었지요.”
가디언 지부의 입구까지 나온 시혁이 김명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정말 반가웠습니다.”
김명석이 보기보다 두툼한 시혁의 손을 맞잡았다.
“저야말로 정말 반가웠습니다.”
종종 이렇게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을까요?
김명석은 이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의 위치가 오히려 시혁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럼 또 뵙죠.”
그렇게 시혁을 보낸 김명석은 곧바로 취조실로 들어갔다.
죽인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문을 열어 빌런들을 확인한 김명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놈도, 다친 놈도 없었다.
물론 엄청난 화상을 입은 녀석들의 몰골은 보자마자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이지만 그것은 시혁이 오기 전부터 똑같았다.
즉, 시혁은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이렇게 자비로울 수가!
“너흰 진짜 운 좋은 줄 알아라.”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묵비권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무슨 말을 더할까?
“그래. 얼마나 너희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는지 지켜보마.”
저런 녀석들은 각성자 전용 감옥에 쳐 넣고 평생 썩게 하는 게 나을 터다.
김명석은 의미 없는 취조실에서 빠져 나왔다.
······.
두 빌런은 그 후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조금 전에는 바보를 연기 했지만 지금은 그냥 바보가 되었다는 듯이.
아마 그들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영원히.
* * *
두 명의 빌런에게서 빼앗은 정보는 퍼즐 조각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잘 모아서 짜 맞추자 하나의 그림이 완성될 것이다.
눈을 감고 뽑아낸 정보를 취합해 보았다.
빨간 약. 두려움. 명령을 하달 받음, 쇠를 긁는 목소리. 거친 오크나무 냄새. 보라색 스포츠카의 뒷모습. 낯선 숲길. 자주 보인 간판. 그리고 반쯤은 폐허가 된 공장 등등등······.
이런 조각 중에서 두 빌런에게 중복된 정보들만 추려 보자면,
낯선 숲길, 폐허가 된 공장.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 두려움. 검은 날개.
그리고 빨간 약.
시혁은 일단 폐허가 된 공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녀석들의 기억을 토대로 걸어가던 시혁은 문득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니, 일체감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곳, 내가 알던 곳이네.’
과거 시혁이 일한 적 있는 공장이었다.
정확히는 정상적인 공장이 가동될 때 일한 적이 있었다.
‘무슨 공장이었더라. 단추공장이었나.’
아주 옛날, 그는 안 해본 게 없었다. 그중에는 공장에서의 단순노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순노동. 그리고 임금의 체불. 좋은 공장도 많은데 왜 하필 이런 공장에 들어가서 생고생을 했는지 그때는 참 화도 많이 났었다.
지금 시혁은 그런 곳을 부수러 가고 있었다.
‘인생이 참 재밌네.’
가다 보니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트럭 한 대 지나갈 정도로 철조망도 뜯어진 상태.
숲바닥엔 바퀴가 지나간 자국이 여럿 있다.
시혁은 철조망을 지나쳐 걸어갔다. 과거엔 깔끔했을 포장도로는 여기저기 깨져 있었고, 그 틈으로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다.
아마 두 녀석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숲길이라는 게 이 길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녀석들의 기억 속과 똑같이 생긴 공장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에는 빌런 하나가 서서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 콰아앙!
“와···거북이 등껍질 뒤집어지는 거 보소. 미쳤네, 미쳤어.”
낄낄거리던 빌런이 시혁을 보곤 고개를 갸웃한다.
하긴, 회색 후드를 눌러쓰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껄렁껄렁하게 누군가가 다가온다면 이상하게도 볼 것이다.
“어이. 암호.”
사무적인 말투에 시혁이 답했다.
“검은 날개.”
“맞네. 신참인가?”
대답 대신 시혁은 손을 채찍처럼 털었다.
즈컥!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쏟아지는 피.
“끄, 끄아아아악!”
비명을 들은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 명 남짓의 빌런들.
녀석들은 총을 들고 있었다.
“이, 이 새끼 능력자다. 조져, 조져버려어어어!”
양 팔이 잘린 빌런의 말에 모두가 품 안에서 총을 꺼냈다.
“이, 이 미친 샊······!”
우두두두두두!
빌런은 수많은 바람구멍이 나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총탄 세례의 중심이 된 시혁 역시 총탄 세례를 피하지 못했다.
촤르르르르륵.
수백 발의 총탄이 찌그러진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넝마가 된 후드가 벗겨지고 드러난 것은 갈색 각질을 온몸에 두른 괴한이었다.
갑옷 곰의 각질.
양팔의 끝에는 각질이 사슬처럼 이어진 채 축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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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곡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