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정옥자는 다른 ‘구원자’들과는 달리 개별행동을 즐겼다.
어차피 목표가 같기 때문에 모두가 이해해 주었다.
요즘 그녀가 꽂힌 건은 각성자 인신매매. 정확히는 그것을 자행하는 집단과 흑곡의 무분별한 세력확장이었다.
‘중국의 그 녀석들과 행동패턴이 너무 비슷하다.’
약하던 빌런이 갑자기 강해질 리 없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뭔가 특이점이 있다는 것인데 그 특이점이라는 것은 십중 팔구 ‘마령옥’일 수밖에 없다는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녀석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아무리 무리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빌런들이다.
숨기에 능하다. 그것도 사람들 틈바귀에서 숨는 것에 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녀석들의 본거지를 특정 지을 수 있었던 건 천운이나 다름 없었다.
꼬리가 길면 밟힐까 봐 혼자 움직였다.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인터넷에서 주문한 상등품 푸른 하수오 두 뿌리도 품 안에 챙겼다.
이로써 전투 중에 내공이 끊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했건만 모든 상황이 끝나 있다.
아니, 끝난 것을 넘어서 시산혈해, 아비규환의 현장이 눈앞에 있었다.
그럼 이 모든 것을 저지른 이가 누구일까?
당연히 유일하게 서 있는 저 존재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적군일까, 아군일까? 제 3의 세력일까? 대화를 시도해 볼까? 그러다가 선수를 빼앗기면?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결론은 일단 제압 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야.’
정확히는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일지도 모른다.
아주 짧은 고민 끝에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공장 바닥으로 내려온 정옥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주먹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
시혁은 죽이다 만 녀석을 보았다.
주저앉은 곽두호는 백치가 된 채 허공만 바라보는 상태.
원래는 좀 더 흔적을 성실히 지우고 사라질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시혁이 왼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었다.
촤르르르륵!
새로운 각질들이 돋아나고 탈락된 각질들이 오른 손의 주먹으로 모여들었다.
오른 주먹이 거대한 글러브라도 낀 것처럼 두터워졌다 싶은 순간.
쾅!
시혁의 몸이 총탄처럼 쏘아졌다.
둘 사이는 30미터 남짓.
정옥자는 양 손을 활짝 편 채 뻗었다.
- 빙설신장
30센티 두께의 손바닥이 나아갔다.
그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공중에 뜬 게 너의 실수다.’
공중에 뜬 상대는 쉽다. 얼음판에 얻어맞은 놈의 궤적은 달라질 것이다. 힘도 많이 빠질 것이다.
그때 혼신이 담긴 그녀의 주먹을 꽂아 넣으면···!
와창창!
회심의 얼음 손바닥이 쿠쿠다스처럼 부서져 나뒹굴었다.
‘미친!’
정옥자는 어이가 없었다. 당황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전신을 돌던 그녀의 빙공은 주먹으로 냉기를 내몰기에 바빴다.
어느새 그녀의 주먹과 그 주변엔 세 개의 얼음 고리가 탄환처럼 장전되어 있었다.
‘완벽!’
콰앙!
진각을 밟았다.
- 해빙패왕권.
그녀의 최선을 다한, 바다마저 얼려버린다는 패왕의 주먹이 눈앞 괴물을 덮쳤다.
정옥자는 자신있었다.
주먹끼리 부딪치기 전까지는.
정확히는 두 주먹이 부딪치자 마자 두껍던 상대의 주먹이 그물탄 처럼 쏘아져 그녀의 빙공이고 나발이고를 전부 씹어삼키며 그녀를 덮치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꽝!
촤르르르르륵!
수백, 수천 가닥의 사슬이 그녀를 옭아매는 압박감.
그녀는 수십 개의 거미줄에 걸린 채 대롱대롱 매달린 먹이 신세가 되었다.
커헉!
입에선 붉은 선혈이 토해졌다.
혼신의 일격이 저지당한 것도 모자라 두꺼운 사슬이 몸에 감긴 채 벽까지 내몰린 충격은 거대하기 그지없었다.
“···이런···괴물···같은······.”
정옥자의 고개가 푹 꺾였다.
“······.”
시혁은 정옥자의 상태를 살폈다. 생명에 지장이 생기진 않을 것 같았다.
‘각질을 두르고 있어서 다행이었어.’
무조건 도망치는 건 하책이다. 정옥자가 팔팔한 이 상황에선 더 곤란해질 개연성이 컸다.
죽인다는 선택지도 지웠다.
상대방은 가디언. 가디언 중에서도 특수조직인 구원자였다.
그렇다면 구원자가 흑곡의 흑막일까? 장기를 적출하고 팔아먹는 집단의 흑막?
상황도, 동물적인 시혁의 직감도 그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시혁이 한 발 앞섰을 뿐 이 여인도 똑같은 일을 하러 왔는데 죽일 수는 없었다.
물론 어쩔 수 있는 상황이란 건 있는 법이다.
자신의 얼굴이 드러났거나, 시혁이 평소 사용하는 기운인 황금 호랑이의 힘이라도 사용하고 있었다면, 그리고 상대방이 제압하지 못할 정도의 강자였다면 어쩔 수가 없겠으나 눈앞 여인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시혁이 주변을 둘러봤다.
뒤에는 시산혈해와 백치가 된 곽두호가 있었고, 앞에는 시혁이 쏘아낸 사슬그물에 정옥자가 뒤엉킨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펑!
곽두호의 머리가 풍선처럼 터졌다.
털썩.
마무리를 지은 시혁은 사슬을 그물에 붙여 통제권을 되찾았다.
거대한 각질이 무너지며 정옥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 * *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쿨럭!
정옥자는 죽은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정신을 되찾았다.
일어나자마자 한 것은 운기조식이었다.
내공을 모두 잃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주변 상황이 어떤지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반개한 눈을 완전히 뜬 정옥자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이건 십 중 십 내상이네.”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몸을 정양해야 하지만 상황이 그리 그녀에게 우호적이지가 않았다.
그녀가 공장으로 걸어갔다.
진각을 밟은 왼발이 저려 오나 싶더니 절뚝거리지 않으면 걷지 못하는 몸상태가 되어 있었다.
“젠장. 도대체 뭐였지?”
빙설신장이 시간을 벌어주진 못했지만 그건 그저 밑밥일 뿐 그녀의 해빙패왕권은 완벽했다.
진각까지 밟으며 공중에 뜬 상대방을 가격한 것도 자신감에 한 몫 했다.
결과는 그녀의 패배다.
공장 내부는 여전히 참혹했다.
아무리 전투에 익숙한 그녀라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이 모든 것을 그 자가 행했다.
아무 감정 없이, 생선 대가리 내리치듯 토막난 시체들이 주변에 즐비하다.
웃긴 건, 정작 자신에게는 그런 손속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난 이미 죽었겠지.’
실제로 그녀는 죽음을 예견했다.
이들은 도살하고, 덤벼든 자신은 오히려 제압했다.
적일까, 아군일까?
아군이라면 누구지?
“도대체 그 괴물은 누구니?”
“······.”
흑곡의 보스인 곽두호에게 한 말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터진 곽두호에겐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이것도 그자의 짓인가?’
한숨을 내쉰 그녀가 품 안에서 스마트폰을 들었다. 특수코팅된 각성자용 스마트폰의 액정은 이번 전투로 인해 산산조각 나 있었다.
한숨을 내쉰 정옥자가 음성명령어를 사용했다.
“얼음왕자에게 전화해.”
- 얼음왕자에게 전화를 걸게요.
통화음이 몇 번 울리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자기야, 나야. 어우···초장부터 쌀쌀맞네? 그런데 어쩌지? 이번엔 날 보러 와줘야 겠는데. 나 이러다가 내상 입고 죽게 생겼거든. 핸드폰 위치로 오면 될 것 같아. 여, 여보세요? 야, 야!”
하아······.
전화를 끊은 그녀가 오른손을 쥐락펴락 했다.
괴한의 일권을 받아낸 그녀의 오른손은 뼈가 나가 있었다.
* * *
다음날. 자신의 방에서 눈을 뜬 시혁이 맞은편 아파트로 향했다.
맞은편 60평 아파트엔 여동생 내외와 조카가 살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된장찌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시혁이 입맛을 다셨다. 냄새만 맡아봐도 밍밍한 된장국이 예상되었다.
아는 맛.
정시아의 된장국은 언제나 밍밍했다. 그렇게 밍밍한 게 몸에 좋으면 국 대신 물을 마시면 된다고 말해 봤자 등짝이나 맞겠지.
너무 밍밍한 엄마표 된장국을 먹으며 입이 댓발 나와 있던 단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삼쪼오오오오온!”
달려와서 포옥 안기는 녀석을 번쩍 들어올렸다. 머리가 콩 하고 천장에 닿았지만 아프기는커녕 좋다고 꺄르르 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어? 온다고 말을 했으면 숟가락 하나 더 얹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얹으면 되지.”
“그건 그렇네. 숟가락 가져 올게!”
“내가 간다.”
시혁이 능숙하게 주방으로 가서 숟가락을 꺼내 왔다. 다른 손에는 양념통이 들려 있었는데 죽은 국도 되살린다는 맛소금이었다.
시혁은 된장찌개라고 쓰고 물이 너무 많아 된장국이라 읽고 싶은 정체불명의 요리를 쥐고 호랑이 기운을 불어넣었다. 인간의 살도 태워버리는 그것이 뚝배기와 함게 내용물을 달구더니 원래 양의 70%로 졸여졌다.
“뭐, 뭘 한 거야?”
“졸인 거야. 네 된장찌개 밍밍하잖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아든 숟가락이 된장찌개를 한 숟갈 들어 입에 가져갔다.
김창익이었다.
“으어···아뜨뜨뜨! 크흐! 맛있다!”
“식혀서 먹어.”
밍밍하지도, 짜지도 않은 최고의 컨디션의 된장찌개다.
정시아 역시 한 숟갈 먹어보더니 패배를 시인했다.
“그래도 이러면 몸에 안 좋아.”
“너흰 달팽이 기름 때문에 웬만한 독도 괜찮다.”
김창익의 숟가락질도, 단비의 숟가락질도 갑자기 빨라진 것은 분명 기분탓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시아의 숟가락질도 빨라졌다. 밥을 한 공기 씩 더 먹고나서야 식사가 종료되었다.
배부르고 등따신 아침.
여동생이 아끼지 말고 살자고 다짐한 후 김창익이 곧바로 질러버린 150인치 롤러블 TV에선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 빌런조직, 흑곡의 본거지가 박살이 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닌 흑곡의 보스 곽두호라고 하는데요. 무분별한 마나 폭주로 인해 모두를 죽인 곽두호는 마나 폭주를 이기지 못하고······.
요컨대 흑곡의 보스, 빌런 곽두호는 마나폭주로 인해 부하들을 다 죽이고 본인도 죽었다는 뉴스였다.
이내 폐공장 내부가 모자이크 되어 비추어 진다.
김창익이 혀를 끌끌 찬다.
“쯧쯧쯧. 난리 났네, 난리 났어. 더군다나 남양주잖아? 진짜 집 산 거 잘 한 거 맞나 싶다······.”
“빌런 조직이 와해 되었으니까 집값이 더 오르지 않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여보. 이건 호재야!”
두 부부의 농담 따먹기에 시혁은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내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군.’
정옥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쏙 뺐다. 심지어 정옥자 본인의 이야기도 빼고 곽두호의 자살로 마무리 지었다.
- 흑곡은 각성자의 장기를 팔아 이익을 챙기는 공급책 역할을 하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금고에서 나온 장부에 따르면 많은 길드와 그 길드를 후원하는 기업이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그 배후에는 재계순위 22위인 미래그룹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기사는 이번 사건을 ‘흑곡 게이트’라고 말하고 있었다.
시혁은 자신이 한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다는 것에 대해 조금 당황했다.
아마 이번 일로 인해 한각협이 큰 혼란에 휩싸일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시혁이 알 바가 아니다.
그런 파렴치한 일에 연루되어 있는 모든 것들이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시혁이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정옥자가 나타나기 전 읽을 수 있었던 곽두호의 기억들이 신경쓰였다.
그 기억들은 선명한 붉은 색을 띠고 있었는데, 퍼즐 맞추기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녀석의 뇌에 각인되어 있었다.
한 편의 영상처럼 되새길 수 있을 정도로.
시혁은 눈을 감고 녀석의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
곽두호의 특성, ‘살인중첩’의 덕을 보려면 살인을. 특히 각성자 살인을 많이 해야만 했다. 던전에 들어가 각성자를 배신하고 모두 살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살인법이다.
마음 맞는 빌런들 끼리 팀을 결성했다. 던전 파티에 잠입해서 모든 이들을 도륙내는 그들의 특성상 검은 백조라는 뜻을 가진 흑곡이라는 이름은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여느때와 같이 작업을 끝마치고 시체들을 뒤적거리고 있던 던전 안.
로브를 둘러쓴 누군가가 나타났다.
붉은 피부. 검은 손톱. 결코 인간이 아닌, 그렇다고 몬스터도 아닌 녀석은 곽두호를 제외한 동료 빌런들을 모두 도륙냈다.
- @#[email protected]
#%@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괴물이 주머니 하나를 툭 던지고 사라졌다.
주머니 안에는 바둑알 크기의 붉은 보석 수백 개가 들려 있었다.
본능적으로 먹는 거라 생각되었지만 미쳤다고 먹어보겠는가?
그것을 먹은 부하들이 강해졌다.
랭크 한 단계쯤은 가뿐하게 상승했다. 하지만 많이 먹을수록 자제력이 상실되고, 흉포해졌다. 한 번에 10알을 털어넣은 녀석은 그때 그 괴물처럼 외형이 바뀌더니 자신의 목을 쥔 채 질식해 죽었다.
이쯤 되자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들었지만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미 그는 범죄자였고, 커진 세력의 꼬리는 길었다.
잡히지 않으려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붉은 보석을 이용해야만 했다.
이젠,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
“······.”
기억 속에 보이는 로브를 눌러쓴 존재는 마경에서 가장 마지막에 상대 했던 뿔과 날개가 달린 녀석이었다.
‘도대체 너희들이 왜······.’
생각이 복잡해진다.
다른 차원의 몬스터들이 이곳으로 넘어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크건, 고블린이건, 불가사리건 바다늪귀이건 간에 전 부다 그곳에서 넘어온 몬스터들이다.
그러니 충분히 그 녀석들도 지구로 넘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강했다.
‘생각이 많아지는군.’
- 다른 뉴스입니다. 대한민국의 자랑, 구원자가 중국의 초청을 받아 S급 몬스터 철갑기린을 잡고 있는 가운데 맴버 중 한 명인 정옥자가 중상을 입어 한국으로 후송 되었다고 합니다.
“······.”
“아이고···철갑기린 엄청 강한가 보네. 괜히 S급 몬스터가 아니라는 건가?”
“하···우리 옥자 언니, 그래도 죽지 않은 게 너무 다행이다. 고생 한 우리 옥자 언니 한동안 푹 쉬셨으면 좋겠네.”
“······.”
시혁의 등 뒤로 한 줄기의 땀방울이 흐른다.
‘그 중상 내가 입힌 것 같다만······.’
* * *
“흐응.”
낯선 천장을 바라보던 정옥자가 손을 쥐락펴락 해 봤다.
아직도 격돌 당시 부딪쳤던 주먹과 진각을 밟았던 왼다리가 저렸다.
도대체 그 녀석은 무엇이었을까?
천장의 무늬를 의미없이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아니, 진짜로 다쳤을 줄 알았겠냐고?”
김명석이었다.
────────────────────────────────────
────────────────────────────────────
융단폭탄박쥐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