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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의 환생-1화 (1/255)

의무병의 환생 1화

[프롤로그]

첩의 자식.

그 또한 아비에겐 어여쁜 자식이겠지만, 정작 가문을 이끌어야 할 후계자들에겐 눈엣가시나 다름없는 존재다.

태어난 배와 보살피는 어미가 다르니 혈육에 대한 정을 느끼기도 쉽지 않다.

잘 쳐봐야 집에 얹혀사는 식객.

그건 골드리안 가문을 평생 보필해온 늙은 시종장, 아리엣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아리엣. 그대에게 이 아이를 맡길 테니, 모쪼록 어미를 대신해 잘 길러주길 바라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오랜 주군, 골드리안 후작은 하필이면 자신에게 그런 애물단지를 보살피는 역을 맡기고 말았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정치적인 이유, 혹은 방황이나 불륜 등등. 귀족사회에서 첩을 들이는 건 매우 흔한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그런 일을 왜 하필 이 늦은 시기에 행했냐는 거지.’

앞으로 10년 후.

이 가문의 후계자가 결정될 것이며, 계승식이 다가올수록 후계자들은 더욱 치열하게 싸움을 벌일 것이다.

정실부인마저 제 자식들의 싸움을 부추기는 건 귀족사회에선 매우 흔한 일이니.

이런 잔혹한 싸움에 휘말리는 건, 이제 겨우 옹알이에 접어든 아이 역시 예외 없이 적용되는 바였다.

"이 시기에 서자를 데리고 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그나마 다행인 건 다른 후계자들이 후계자 수업을 준비하느라 바쁘다는 것.

아무리 경쟁자라도 갓난아이에 불과하니, 괜한 소동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들의 눈엣가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 정도라면 괜찮겠지.’

그렇게 아리엣은 가문의 무관심 속에서 어린 서자를 성심성의껏 돌보아주었다.

그 일은 굉장히 수월히 이루어졌다. 자그마치 8년이란 시간 동안, 정말로 아무런 문제도 없이.

‘…무슨 애가 이렇게 조숙하담?’

조숙함.

대개 나이에 맞지 않은 면모를 보일 때 쓰는 말이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나 쓰는 말이다.

유아는 물론 소년기에 막 접어든 시기에 쓸 말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젖먹이 때부터 울음 한 번 터뜨린 적이 없었지.’

의사를 전달할 수단이 울음밖에 없으니 울기에 바쁜 시기거늘.

그럼에도 이 아이는 걸음마를 시작한 후엔 대부분 구석에 박혀 있거나, 제 방에 가부좌를 튼 상태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병이 난 게 아닐까 생각하여 사제들에게 맡겨도 건강하다며 돌려보내기 일쑤였으니…….

"셰인 도련님, 지금 뭘 하고 계신 겁니까?"

그런 태도가 신경 쓰였기에 직접 물어보니.

"명상이요."

도련님은 그렇게 툭 내뱉고는 다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어지간한 성인도 몇 시간 동안 앉아만 있는 건 힘들거늘.

당초에 그런 걸 진지하게 하는 사람이라곤 마나를 다스리는 마법사, 혹은 몇 시간씩 기도를 드리는 교단의 신자 정도다.

물론 어디에서 주워들은 걸 흉내네나 싶을 수도 있지만, 도련님의 기행은 거기에서 끝이 나지 않았다.

"셰인 도련님, 지금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팔굽혀펴기요."

7살이 되었을 무렵, 셰인은 홀로 있을 때마다 팔굽혀펴기를 하고는 했다.

힘든 것도 처음뿐.

1년 정도 지나니 팔이 직각 밑으로 구부러지기에 이르렀다.

호기심이 왕성한 만큼 질리는 것도 빠른 것이 어린아이거늘.

그런 아이가 제 몸을 혹사시키는 일을 매일 같이 반복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렇게 험하게 운동하시면 키가 안 크실 겁니다."

그보다도 저러다 몸이 상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어 툭 내뱉으니.

"진짜 이 시대 사람들은……."

그럴 때마다 셰인은 고개를 돌리고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조숙한 도련님께서 유일하게 짜증이란 감정을 내는 순간.

뭐라고 말을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런 걸 볼 때마다 당부를 하는 것도 자제하고 말았다.

‘그래, 성숙하거나 이상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조용히만 있다면 문제될 건 없겠지.’

모쪼록 후계자가 정해질 때까지 만이라도 이런 상황이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셰인이 8세가 되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도련님, 지금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어느 날 밤.

어두운 서고에서 셰인이 책을 읽는 것을 발견하였다.

상당히 두꺼운 서적.

마나를 다루는 법에 대해 적힌 책을, 소년은 밤 중 램프의 불빛에 의존하여 읽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수상쩍은 행동.

그럼에도 셰인은 늘 그렇듯 덤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독서를 하고 있는데, 무슨 문제 있나요?"

8살의 아이가 다 큰 성인도 읽기 버거운 책을 읽는다.

그 또한 기행이라면 기행이지만, 명상이나 단련에 비하면 비교적 얌전한 취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소년의 지적 수준이나 호기심이 아닌 가문에 있었다.

"안 됩니다."

그날, 아리엣은 처음으로 셰인을 훈계하였다.

* * *

"허, 그 녀석이 요새 도서관을 들락거린다고요?"

별채의 귀빈실에서 보고를 받은 가문의 장남, 테올린이 이를 바득 갈며 아리엣을 쏘아보았다.

"네, 네에…. 일단은 출입을 금지시켰지만, 그 후에도 종종 도서관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계속 금지시키시죠. 서자 녀석이 주제도 모르고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장남 테올린 골드리안.

현 시점에서 가문의 계승서열이 가장 높다 점쳐진 자이지만, 그건 결코 먼저 태어나기만 해서가 아니다.

다른 형제들과 비교했을 때에 여러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기 때문.

가문의 일원과 사용인들 중 상당수가 그를 지지하고 있으며, 그런 테올린에게 대적할 수 있다 평해지는 자는 오직 장녀인 에버그린 뿐이었다.

‘대개 여식이라면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가게 마련이거늘, 그분은 여성의 몸으로 가주의 자리를 탐내고 있지.’

유능하기에 야망도 크고, 그럼에도 여성은 권위를 쥐기 어려운 풍조 때문에 더욱 독해질 수밖에 없던 사람.

그런 여자에 대한 거부감은, 반대로 아리엣에게 있어 테올린에 대한 지지도를 높이게 해주었다.

하지만…….

"외람된 말씀이지만 셰인 도련님은 아직 여덟……."

"아버지께서 정분나신 건 신경 쓰지 않습니다."

걱정을 토로하는 아리엣에게 테올린이 말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어머니에게 평생을 쥐어 짜이셨으니 뒤늦게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고 싶기도 했겠죠. 그런 사랑의 결과물을 애지중지하는 것도, 어른이 된 저는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테올린 역시 제 세력을 키우고자 여러 첩을 거느리는 상태.

그에 뒤따라오는 책임에서 아비가 느껴온 고충을 체험하였고, 그 경험은 아비에 대한 존중을 키우기에 이르고 있었다.

"그저 공과 사의 구분을 확실히 하자는 거죠. 제 경험상 어중간하게 공부하는 녀석들이 범생이들보다 욕심을 더 많이 부리더군요."

가문을 잇지 못해도 얻어먹을 걸 찾아 훼방을 놓는 것이다.

그런 약간의 방해가 다른 형제들이 치고 들어올 정도의 위험을 만들어 낸다면?

"다른 녀석들도 대놓고 덤벼들지 않을 뿐, 어느 순간 제가 삐끗하는 걸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태죠. 특히 에버그린 그 녀석이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네……. 장녀님 말씀이시죠."

"지금도 그 녀석이 하고 있는 걸 보세요. 꽃다운 시기에 시집갈 가문을 찾기는커녕, 절 밀어내고 대신 가주자리에 앉힐 녀석을 찾아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사교회를 매일 들락거리는 걸 볼 때마다 다른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걸 볼 때면……."

"크흠."

"…아,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장녀의 험담을 하던 테올린이 애매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에 서있는 것은 근래에 자신의 별채에 오가는 자.

이후 있을 후계자 싸움에서 자신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줄 지인이었다.

"네 뭐, 감정이 격해져 말이 험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레오드릭 추기경님께서도 제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추기경.

교단 내에서 교황 다음으로 가는 권력을 쥔 자로, 교단의 영향력이 큰 테라스 제국에선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지닌 자였다.

아직 정식 후작이 되지 않은 그에게 있어선 더할 나위 없이 큰 힘이 되어줄 자다.

그리고 그 관계에 매력을 느끼는 건 레오드릭 역시 마찬가지.

"공교롭게도 집안 사정에 대해선 제가 뭐라 의견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내 레오드릭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서로에 대한 존중을 가지며 공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인간은 사회를 이끌어줄 마땅한 지도자를 택해야 한다."

"……유일교의 교리로군요."

"제국의 모든 이들을 굽어 살피는 주님의 가르침이죠. 그리고 저는 그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테올린 님이 가장 걸맞는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높이 평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군요. 추기경님의 그 마음이, 훗날의 계승식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흡족히 웃는 테올린.

이후 눈치를 주자, 아리엣이 귀빈실의 찬장을 뒤져 은색의 잔을 가지고 왔다.

은으로 이루어진 잔은 주로 교단에서 취급하는 ‘성수’를 마실 때에 사용하는 것.

레오드릭이 그것을 보고 자신이 가지고 온 성수의 병을 열어, 안의 내용물을 컵에 기울였다.

하얀 액체가 가득 담긴 잔.

그것을 맞댄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한 채 근엄히 외쳤다.

"제국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그 미래를 주도할 이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테라스 제국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후작가 골드리안.

가문의 부와 영광을 거머쥐기 위한 후계자 싸움엔, 이제까지의 세대가 그렇듯 권모술수가 판을 치고 있었다.

* * *

‘근데 그런 권력 싸움은 내 알 바 아니고.’

아리엣이 별채로 빠진 가운데, 도서관에 숨어든 셰인이 역사책을 정독해나갔다.

테라스 제국의 500년에 대해 적힌 역사책을.

그중 페이지가 멈춰진 곳은 200년 전에 있었던 ‘정복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그 전쟁 이후로 벌써 200년이나 지났다는 건가."

셰인이 깊게 한숨을 내뱉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환생한 지도 언 8년.

제 조국을 멸망시켰던 제국에 환생한 것도, 이 대륙에 현존하는 나라가 제국뿐임을 생각하면 어찌어찌 납득한 상태였다.

어이가 없는 건 자신이 전생에 군인이자 ‘의사’였다는 것.

그리고 이 제국이 신성력이라는 ‘만능 치유의 힘’을 절대적으로 숭상한다는 것이었다.

"의술이 필요 없는 나라에서 환생한 의사라니."

앞으로 펼쳐질 고생길을 생각한 셰인이 깊게 한숨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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